이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식상해진 말일 수 있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독일 녹색당을 창당으로 이끈 페트라 켈리의 말이 떠올랐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항상 신조처럼 되어버린 말임에도 항상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치의 영향은 위정자의 출세와 몰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 먹는 우리의 하찮은 밥상에 있는 것이다.”라는 1960년 이태영의 말 역시 우리에게 깊은 인식을 던져준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개인의 삶의 총합이 우리 사회라는 단순한 인식은 사회를 바라보고 사회를 공부하는 우리네 사회복지 실천가들과 연구자들에게 우리의 설 자리를 다시금 돌이키게 한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오래 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이 책을 보던 독일 여성들은 책에서 내담자로 등장하는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가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2001년 도서출판 이프에서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이 책을 보던 한국의 여성들 역시 서구 선진사회인 여성 역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심지어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바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며,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며, 우리 딸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그렇듯 여성의 문제는 마치 중산층의 여성의 억압 속성과 빈곤층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속성의 질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가해지는 가부장적 억압체계는 동일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듯, 우리 사회와 서구 사회와의 다른 문화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기제는 같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2001년이었다. 대학교 3학년 시절에 막 복학하고 하고 많은 책 중에 난 왜 이 책을 골랐을까? 반쯤 읽다가 접어둔 채 왜 다시 읽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식을 관념적으로 하기 보다는 바로 내 앞에 놓여있는 현상들로부터 사회를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개인적인 성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 앞서서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은 이 책을 통하여 페미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비록 책을 구입한 지 6년이 넘은 시간이 흘렀으나, 이 때 읽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이러한 책으로 묶어 내어 한국판 <아주 작은 차이>를 펴 내어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이제야 여성으로서 주체적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수 있는 책이 하나쯤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주변에 있었던 여성들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찌 보면 내가 만난 사람들의 <아주 작은 차이>라는 버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다양한 한국에서의 여성과 알리스 슈바르처가 만난 여성의 모습이 다르지 않음에 다시금 나는 놀랄 뿐이다.
첫째, 아주 가깝게 지내는 같은 학과 동기인 친구이다. 이 친구는 96년에 대학에 입학한 후 이념 동아리와 운동권 선배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96년 통일축전에 참여하였다가 가까스로 도망 나와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친구는 항상 1학년 내내 무언가를 갈망하듯 스스로를 불살라가며 좇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웠다. 항상 이 친구는 스스로가 여성임을 안타까워하며 보다 거칠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자신을 인정해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96년 여름 방학에 농활을 갔다가 돌아온 후 나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 그래서 여름 방학 중에 치열하게 살아보기 위해서 노가다도 뛰어 보려고 여기 저기 쫓아다녀 봤는데 여자라고 받아주는 데가 없네.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볼 수 있는 날이 언제쯤일까? 가끔 너처럼 남자로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네가 부럽다…….”물론 논리의 비약이기는 하나 노가다를 뛰는 것이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친구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하고자 하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없었던 그 현실 자체가 답답했던 모양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친구의 편지 중 “여성으로서 당당하게….”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둘째, 2003년 2월에 자활사업단에서 만난 한 여성이다. 당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자활사업을 담당하게 되며 간병사업단과 제과제빵 사업단을 운영하게 되었다. 제빵사업단을 시작하며 참여자들과 사업 초기에 한 분씩 상담하게 되면서 제빵사업을 시작하도록 만든 한 명 한 명의 여성들이 갖는 동기는 다양했다. 어떤 분들은 자활사업 자체에 천착하면서 수급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분도 있었는가 하면 이런 분도 있었다. 이 여성은 남편이 유망한 은행의 중견 관리자로서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을 해 오다가 갑작스런 IMF로 인한 실직, 이어서 얼마 안 지나 남편의 암 발병으로 인하여 남편을 여의게 되었다. 당시 남편이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서로 제과점을 내기로 하고 제과제빵 자격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의 사망으로 인하여 이 여성에게는 갑작스럽게 생계의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남편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던 존재였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남편과의 약속이자 재기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찾게 된 자활사업단은 이 여성에게는 신천지와도 같이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렇듯 자활사업 참여자들의 경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있어서 가족 내에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남성의 경제력 내에서 허락하는 범위까지의 자유였지, 여성 스스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없었던 셈이다.
셋째, 2007년 병원에서 만난 한 소아암 환아의 어머니이다. 이 아이는 2001년 처음 발병했다가 2004년 치료가 종료된 후 2006년 12월에 백혈병이 재발되었다. 어머니를 만나서 상담을 진행하게 되면서 남편과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었고 남편은 어머니에게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의무만을 강요해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이 여성은 지금까지 해 오던 학습지 교사를 그만 두고 아이의 간병에 전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남편은 당연히 아이 치료를 위하여 그만 두도록 하고 있음에도 남편은 실질적으로 치료비를 돕거나 하는 등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법적으로 이혼이 되어 있음에도 남편은 자신이 아직까지 남편이자 집안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꾸준히 가족에게 군림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에게 있어서 경우에 따라 보다 심각하게 갈등이나 문제로 불거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사회에서 부여된 여성의 성 역할에 의하여 인내하며 그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살아간다.
<아주 작은 차이>의 저자인 알리스 슈바르처는 여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갈등이 절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몹시 중대한 사회적 안건이며, 이를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이 점이 여성운동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한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라고 하면서 인내하는 몫으로 남아 있지만 실질적으로 여성 간의 연대는 사회를 변화시킬 중요한 기폭제임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아주 작은 차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결국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는 생물학적의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며 결국 여성과 남성을 가로 짓는 생물학적 특성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점이라고 한다. 인류를 분류하는 다양한 구분에는 민족이나 언어, 문화 등이 존재하고 이러한 다양한 구분의 하나로서 성(sex)이 존재할 뿐이지 이 성이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역설하고자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주는 사회복지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임상적 실천을 하는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가족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가족체제를 유지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많은 여성주의 사회복지사들은 페미니즘 상담을 통하여 여성의 인권에 대한 문제에 관점을 갖고 가족의 구성을 유지시키도록 하는 가부장적 여성 억압 기제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고 이를 돕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부분의 임상 실천가들에게 있어 ‘가족’은 무너뜨릴 수 없는 신화와도 같은 존재이다. 많은 실천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과연 가족을 유지하도록 도울 것인지, 여성이나 억압받는 가족 구성원을 해방시키도록 도울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을 하도록 만든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하여 여성의 삶에 대한 질적 연구와 근본적인 문제에 파고들 수 있도록 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사회복지적으로 다루어온 것은 요보호 여성에 대한 문제에 국한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빈곤 여성이든 중산층 여성이든 억압받고 있다는 근본적인 속성은 같음을 일깨움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여성의 문제 자체에 대하여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유도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 사회복지사들이 해 왔던 많은 일들이 요보호 여성을 보호함으로써 결국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유지시키고자 하는 억압적 기제로서 역할을 해 왔다는 점은 겸허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셋째,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관계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점은 바로 여성과 남성의 성관계의 불평등성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사회복지계에서는 여성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도 불평등한 구조를 다루면서도 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나 학대의 문제를 다루어왔지만, 앞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권력관계의 사회적 파급을 미치는 성관계의 불평등성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이는 우리 사회복지사들에게도 여성에 대한 상담을 할 때에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도록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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