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 ‘영웅문’이 ‘사조영웅전’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송과 금, 원의 교체기라는 격변의 시기와 정강의 변(靖康의 變: 1126∼1127)이나 징기즈칸[成吉思汗(성길사한), Chingiz Khan, 1155 ?~1227.8.18], 악비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배경으로 삼아 곽정과 황용 그리고 동사, 서독, 남제, 북개, 중신통이라는 무림 영웅들의 허구를 섞어 웅대한 스케일의 로망(roman)을 창조해 낸 것이 바로 김용이다. 무협이라는 장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그리고 개인적 기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무협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김용과 그의 영웅문 삼부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야기의 스케일과 역사와 허구를 조합하는 작자의 탁월한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성격과 흥미 넘치는 사건은 단연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사조영웅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인물은 주인공인 곽정이다. 어찌 보면 가장 매력이 없는 인물처럼 보이고, 또 머리가 지나치게 둔해 당하기만 하는 모습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성격이 고지식한 편이라 그런지 몰라도 노독물의 음흉함이나 황약사의 괴팍함, 그리고 노완동의 철부지 같은 모습에는 호감이 별로 가지 않는다. ‘사조영웅전’의 또 다른 주인공인 황용에 대해서도 그녀의 영민함에는 점수를 주고 싶지만 제멋대로이고 너무나 독한 듯해서 역시 온전히 좋아할 수 없다. 다만 홍칠공의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표표함과 단황야의 더없이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습은 좋아하면서도 내가 미칠 수 없는 바이기에 나는 곽정을 좋아한다. 때로는 답답하고 너무 요령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 특히 그 답답함은 나와 닮은 듯하여 그냥 눈감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사조영웅전’은 무협소설이다. 이 작품에도 ‘구음진경’이라는 무공비급을 둘러싼 무림고수들의 다툼이 있고, ‘항룡십팔장’이나 ‘탄지신통’, ‘일양지’, ‘합마공’ 등의 절세의 무공이 등장한다. 또 무림인들 사이의 은원(恩怨)과 오해, 그리고 기연(奇緣)들이 얽히며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도 다른 무협소설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조영웅전’을 다른 소설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인은 단순한 무공의 대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담아내려 한 것이 아닐까? 무능한 조정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외적과 야합하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무리들에 대한 분노 등의 역사의식이, 이 소설이 단순한 오락거리로 떨어지려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부의 골격과 재능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우둔하지만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을 걷는 곽정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점도 특징이다. 그리 잘나지도 못하게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인물들에게 결점과 실수투성이인 곽정이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꿋꿋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

<죽은 개는 이제 그만!(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9)>이라니, 도대체 무슨 책 제목이 이럴까? 여러 책을 읽고 또 제목을 보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가장 막막한 것 중 하나인 듯싶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책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 제목이어야 하는지 공감하게 될 것을 믿는 다. 그런데 제목뿐 아니라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성격 설정도 유별난데, 과연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성격이 앞으로 어떤 사건을 불러오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기대해도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월러스 월러스는 아빠의 거짓말 때문에 엄마가 이혼하자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맹세한다. 그로 인해 얻어맞기도 하고, 삼촌으로부터 2년이나 선물을 못 받기도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8학년 영어 시간에 유명한 고전인 <내 친구, 올드셰프>을 읽고 가장 지루한 책이라고 평을 했다가 포걸먼 선생님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게 된다. 그것뿐 아니라 근신 기간에는 좋아하는 미식축구 연습이나 시합에 참가할 수 없을뿐더러, 포걸먼 선생님이 연출을 맡은 연극반의 <내 친구, 올드셰프> 연극 연습을 참관해야만 한다.

연극반 대표인 레이첼 터너는 전국선수권대회 결승에서의 활약으로 베드포트의 영웅이 된 월러스가 연극반에 나타나자 관심을 보이지만, 연극에 대한 그의 무례한 태도에 화를 낸다. 그런데 연극의 무대 배경에서 ‘죽은 잡종 개, 올드셰프’라는 낙서가 발견되고, 마이크 줄과 전선 등이 뒤엉켜 묶여 있는 등의 일이 연이어 발생하자, 레이첼은 월러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그런 속에서 연극반 아이들은 <내 친구, 올드셰프>에 대한 월러스의 의견에 열렬한 지지를 표하며, 자신들의 뜻에 맞게 대본을 수정한다.

한편 월러스가 시합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식축구팀은 연패에 빠지고, 포걸먼 선생님은 연극에 인라인스케이트와 록밴드가 등장하는 등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자 월러스를 미식축구팀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그러나 월러스는 미식축구팀의 누군가가 연극을 방해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연극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공연을 나흘 앞두고 수정된 원고가 갈가리 분쇄되는데, 그 현장에서 월러스의 옛날 경기용 셔츠가 발견되고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일을 저지른 혐의를 월러스가 쓰게 된다. 과연 연극은 성공적으로 공연될 수 있고, 또 월러스의 누명은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자라서 점점 많은 거짓말을 배우고 거짓이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이 어려운 시대에,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소년의 결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의 거짓말, 베트남전에서 특수부대원 여덟 명을 구출했다거나 유전에 붙은 불을 껐다는 식의 진실하지 못한 모습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거짓말은 결국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갔고, 그 때문에 월러스는 비록 선의의 거짓말일지라도 결코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기성세대의 허위나 위선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수도 있는 그의 행동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여러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월러스와 레이첼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주인공, 그것도 미식축구 선수와 연극반 대표라는 얼핏 병립할 수 없을 듯한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하며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이 진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불러오고 그 오해는 더 깊은 불신을 가져오는 속에서 월러스와 연극반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공감의 폭을 넓혀 간다. 미시축구팀과 연극반 아이들이 월러스를 믿고 지지하게 된 것은 자신의 진심을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 때문이니, 그야말로 진실은 통하는 법이라 하겠다.

월러스는 14년 동안 내내 정직하다가 오직 한 차례만 거짓말을 한다. 그것은 레이첼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로, 그 순간 월러스뿐 아니라 읽는 독자들도 모두 놀랐으리라. 하지만 그것뿐 월러스는 역시 월러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첼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도 역시 여기 진실이 있으니,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하는 방식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레이첼은 월러스의 말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죽은 개는 이제 그만!>은 진실과 거짓말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개성을 지닌 십대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해 나가는 모습이 신선하면서 재치 있게 표현된 작품이다.

어린 시절 <전설의 고향>을 할 때면 정신을 쏙 빼놓고 보았는데, 특히 여름날 밤이면 우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구미호’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혼자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을 가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는데, 왜 그 이야기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그리고 어린 시절 무척이나 가슴 졸이며 들었던 이야기 중에 ‘여우 누이’가 있는데, 전설 속에 등장하는 여우들은 무척이나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어떤 여우는 100명의 사람을 죽임으로써, 또 어떤 여우는 진실한 사랑을 얻음으로써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그들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도승이 등장하여 그녀가 사람이 아닌 요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남자는 그녀(또는 여우)를 칼로 찔러 죽임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된다. 대개 여우는 “분하다. 하루만 지나면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하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그제야 우리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릴 적 당연히 들었던 구미호나 드라큐라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낯설게 느껴졌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물들은 진정으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과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어제까지 사랑하던 사람을 죽이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그것이 구미호였든 드라큐라였든)을 죽이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고, 그 후 행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어느 순간 떠올라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읽기 전 머리말인 ‘여우를 위한 변명’을 먼저 읽었다. 글을 읽으며 내가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고민이 새로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도대체 여우는 왜 그 집 딸로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그 집 딸로 태어나서 집안을 다 망하게 하고 부모와 두 오라비까지 다 죽게 만든 것이 그냥 우연일까? 그리고 이 전설에서 하려는 얘기는 뭘까? 여우가 단지 물리쳐야 할 요물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전설이 생긴 걸까?’하는 내용을 읽으며 나와 생각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은 지금, 내 마음은 한결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주인공 솔메는 사람이 되고 싶은 천년 여우의 이야기를 듣고는, 언젠가 천년을 채워 여우가 진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솔메의 아버지는 허황된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며 여우산의 여우를 잡아오고, 이듬해 솔메에게는 나리라는 예쁜 여동생이 생긴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여우산이라는 이름도, 천년 여우에 대한 전설도 잊은 어느 봄에 나리는 아흐레를 꼬박 앓아누웠다 일어난 뒤부터 눈에서 이상한 빛을 번뜩인다. 갑자기 말이 원인을 모르게 죽는 변괴가 생기자, 솔메는 말이 죽는 이유를 밝히려 밤을 새며 지켜보다 나리가 말의 간을 빼먹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가 노여움을 사 집에서 쫓겨난다. 솔메는 이제 부모님과 누이를 구하기 위해 도가 높은 스님을 4년 동안 모신 뒤 빨강 구슬, 노랑 구슬, 파랑 구슬과 부디 잘 선택하여 누이를 구하라는 당부를 듣는다.

<어여쁜 여우 누이>에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여우의 천년 소망을 무너뜨린 원한으로 인해 여우의 혼이 누이동생에게 씌었다는 것으로 이야기 전체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 여우를 단순히 무찔러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랑해야 할 또 다른 누이로 설정함으로써 전설의 동어 반복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시켰다. 솔메는 과연 여우를 죽일 것인지, 여우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누이마저 죽여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누이와 누이의 몸에 깃든 여우 누이 모두를 살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단지 사람이 아닌 여우가 사람이 되려 했다는 것으로 여우의 천년 공덕을 무너뜨린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을 되풀이하지 않고, 사람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확대되는 결말은 우리와 다른 존재들을 배척하는 현대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문득 부끄럽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해서 세계 여러 곳에서 서로를 죽이는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이것을 안다면 과연 여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할까? 같은 사람끼리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과연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혹시나 다시 여우가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를 천년 여우 앞에서 우리는 숙인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반성 108

김영승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영화를 생각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반성 (민음의 시 6) (양장본) / 김영승 지음 | 민음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