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비가 내릴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라는 한 권의 책을 읽은 뒤에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그의 책에는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그만의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할 줄 안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치우치면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긴장감은, 현실과 환상 사이의 절묘한 넘나듦으로 인하여 작품의 끝까지 유지되고 책을 읽은 독자는 무엇이 현실이고 또 환상인지 구별할 수 없는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또 다른 그의 책인 <신기한 시간표>에서도 그의 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아쉽게도 책을 반 정도 읽었을 때 다른 할 일들이 넘쳐나 읽던 책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현실과 환상을 오간다고 해서 환상적인 세계가 중심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물이 수많은 골짜기에서 나오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작품집 속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은 서로의 아픔을 감싸고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

그렇기에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의 지은이가 오카다 준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대로 가득 찬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게다가 용을 물리치는 기사라니, 남자치고 용과 기사 이야기에 매료된 적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등 아이들이 열광하는 슈퍼히어로와 엄청난 능력을 지닌 악당들이 싸우는 영화들도 결국은 기사와 용의 이야기에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현대적 외피를 입힌 것이다. 게다가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용과 싸우는 기사 이야기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시절 단짝이었던 야스오와 유키는 6학년인 현재는 서먹서먹한 사이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둘은 과제물을 가지러 학교에 가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용을 물리치는 기사’라고 주장하는 제리를 만난다. 그 남자를 연극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야스오도 유키와 함께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드는데, 마침내 제리는 용과 싸움을 벌인다. 용이 없다고 생각하던 야스오와 유키의 눈에도 용이 보이고, 절체절명의 순간 둘의 도움으로 제리는 용을 물리친다. 다음 날 유키는 장래의 꿈에 대해 ‘나는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화장실 슬리퍼를 정리하겠습니다.’라고 적어낸다.

역시나 오카다 준의 이야기답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과연 용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야스오와 유키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말 야스오의 말처럼 ‘어색하고 서먹하고 긴장되는 그런 나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제리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용이 화가 나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 사이의 어색하고 서먹한 감정과 긴장과 가식으로 뭉쳐진 마음을 용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이 ‘화장실의 슬리퍼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이라니, 참 엉뚱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무언가 칼을 다루거나 말을 타는 법, 아니면 용기나 체력을 기르는 무엇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참된 마음으로 슬리퍼를 정리하면 다음 과제는 스스로 찾을 수 있’다나…. 그렇다면 참된 마음으로 슬리퍼를 정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유키는 ‘비뚤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이라고 했고, 야스오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하나의 정답이라고 말한다.

 

“세상일에 정답이 딱 하나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단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 체육관까지 가는 길만 해도 몇 가지나 있잖아. 어떤 길이든 정답이지. 현실에는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경우는 별로 없어. 이건 그런 종류의 문제 같은데…. 그러니까 화장실 슬리퍼에서 용을 물리치는 기사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는 거지.”(51쪽)

 

제리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볼까 신경 쓰였지만 슬리퍼 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고, 그래서 화장실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슬리퍼 정리를 계속해 나가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었다. 용이 온갖 나쁜 마음의 결집체라면 그것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것은, 참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할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고 싶다면 먼저 주변의 슬리퍼부터 정리해 보는 것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제리의 말처럼 ‘참된 마음으로 슬리퍼를 정리하면 다음 과제는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 책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그 질문을 듣고 유키는 ‘꿈이 없는 사람은 어쩌지….’라고 중얼거리는데, 제리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용과 싸우며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거나 꿈은 있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오카다 준은 용을 물리치는 기사의 이야기를 통해 에둘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꿈은 사람들마다 다 다를 수 있고, 설령 그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엉뚱해 보일지라도 꿈을 꾼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꿈에 이르는 길은 그야말로 다양하며, 그 시작은 바로 참된 마음으로 작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린 시절 읽었던 무협 소설 중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이 두 편 있다. 아마 두 편이 거의 전부였던 것도 같지만 말이다. 그 중 한 편은 ‘정협지’이고, 다른 한 편은 아마도 주간 스포츠(스포츠 서울인 듯도 하다)에 연재되었던 ‘영웅문’이다. ‘영웅문’은 그 당시 다른 제목으로 실려 있었던 것 같고 아마 서너 회분 정도나 보았을 것이다. 그 소설에서 곽정과 황용이 홍칠공을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야 그것이 ‘영웅문’인 줄 알게 되었다.

‘정협지’는 나와 두 번의 인연이 있는 소설이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니까 70년대에 소년중앙에 연재되던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두 회분을 읽었는데 대략 1권의 204쪽에서 221쪽의 내용이었다. 삽화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오백평이 연자심에게 달려들고, 이어서 악중악과 복면을 한 노영탄이 오백평과 대결을 벌이고, 연자심과 악중악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뒤, 놀라는 장면이 아직도 내 머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두 번째의 인연은 대학교 도서관에서이다. 도서관에서 무협지들을 발견했을 때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도서관에 무협지라니…. 그리고 그 속에서 ‘정협지’를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있는 것은 오직 1권뿐이었고, 나는 개가식 열람실에서 그 책과 다른 무협지를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읽느라 기어코 수업을 빼먹기까지 했다. 다시 십 몇 년이 지난 최근에 김훈이라는 소설가가 아버지가 번안한 ‘정협지’를 새로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을 구해 읽게 되었다. ‘정협지’의 원작은 웨이츠원(尉遲文)의 <검해고홍(劍海孤鴻)>이라고 하지만 김광주의 유려한 필치가 돋보여 창작역의 성격이 더 뚜렷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세 번째로 만나는 ‘정협지’는 그런 점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만나게 되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한다.

요즘의 무협 소설은 지나치게 가볍고 때로는 지나치게 황당하다. 초절정의 고수가 수백 명이 등장하고, 그 수백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단번에 몰살될 정도의 황당함이란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또 반복된 기연으로 해서 온갖 절정 무예와 금강불괴, 만독불침의 몸을 이루게 되는 식의 설정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무협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고 섣부르게 말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역시 내게는 초기 무협 소설의 협(俠)과 낭만이 좋다. ‘영웅문’에서도 양과나 장무기보다도 곽정이 마음에 드는 까닭이 이것이고, 아마 ‘정협지’는 386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반가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신조협려’에서 우리는 김용의 전작 ‘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인 곽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주인공을 만나게 되는데, 양강의 아들인 양과가 바로 그이다. 우둔하고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함 그 자체인 곽정에 비해, 양과는 지략과 임기응변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는 황용마저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인정할 정도의 영민함과 기지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제멋대로이고 예절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거칠 것 없는 성격 등 전세대의 영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고집이 세서 일단 마음을 정한 뒤에는 목숨을 잃을지라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없는 것 같다.

이전부터 나는 곽정의 우둔함보다는 신실함에 마음이 끌렸고, 양과의 영민함보다는 경박함과 교활함에 눈이 먼저 갔기 때문에 양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조협려’를 다시 읽어본 지금, 여전히 양과의 약삭빠름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곽정과 전혀 다른 양과는, 어쩌면 나보다도 더 21세기적인 신세대 영웅의 등장이라 말할 만하다.

다만 ‘사조영웅전’에 이어 한없이 망가지는 서독 구양봉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음진경에 집착하다 황용의 꾐에 넘어가 실성하여 물구나무선 채로 돌아다니던 서독의 이미지는, ‘신조협려’에서도 계속된다. 그리고 곽정을 협객이라 부르는데 ‘사조영웅전’에서도 그렇고 ‘신조협려’의 첫 부분을 보더라도 그들은 도화도에 은거하며 무공을 수련했는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협객으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호가 있는데 왜 곽정과 황용은 별호가 없는지 하는 것이 아쉬웠던 점이다. 그리고 양과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곽정과 금륜법왕의 제대로 된 대결이 나오지 않은 점도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