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역설 : 오정희 『새』를 읽고
1.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
ㅡ 으아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XX! 입 더러워진다고 하지 말라던 욕이 절로 고이는데, 글쎄 세상은 이미 하수구 같았다고! 이 책을 봐. 이런 무책임한 작가를 보았나. 그래 힘들었겠다. 얘네 진짜 불쌍하네 그러면서 눈물 쓱 닦으며 책장을 덮으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절대 그러면 안 돼. 이런 애들일수록, 이런 사람들일수록 더 강하게 떨치고 일어서 깔깔 웃을 거라고 말해줘야지.
ㅡ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화가 난다는 것도 알아. 세상은 쉬 변하지 않을 거고,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고통 받고 죽어 가겠지. 그런데도, 번번이 헛것 같은 희망에 속으면서도, 절대 희망이 없다고는 말 못하는 우리. 눈앞이 깜깜하거들랑 고난을 견디고 도약한 ‘위인’들을 보라고 속삭여. 근데 정말 그래? 어둡게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배경이 되어서, 소수의 위인들이 찬란하다고는 왜 말 안 해? ‘자, 잘 들어봐. 너희처럼 고생을 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운이 좋아 성공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아. 평생을 바닥만 기다가, 바닥에 넘어져, 바닥 밑에 묻힌 사람들이 있단다. 그러니 희망 따위는 꿀꺽 삼키고 잊으렴.’
ㅡ 그게 사실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 아니야? 응? 말해선 안 되는 진실도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맞잖아. 누구든, 어떻게든 절망 않고 살 도리를 만들어야지. 그렇게 속고 살다보면 희망이 어느새 현실이 될 수도 있잖아. 살아 봤더니 그건 아니었다고 해서 그들도 아닐까? 기적처럼 연숙아줌마의 남편이 돌아오고 그녀 또한 발딱 일어날 수는 없을까?
ㅡ 아니, 삶은 끔찍해. 그 뿐.
내가 감정 과잉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도를 넘었다. 물이 콸콸 뿜어져 나오는 소방호스를 놓쳐버린 꼴이다. 격정이 사방으로 날뛰며 내 속을 엉망진창으로 때리는 바람에, 차분하게 분석하며 글을 읽는 시야는 흐려져 버렸다. 영국의 울프가 마련한 자기만의 방이나, 동독의 볼프가 폭로한 억압, 미국에서 모리슨이 읊조린 피묻은 폭소에선 그나마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대의 기반 위에 『새』가 그린 이 고통은 실감나게 익숙한지라 더 견디기 힘들다.
우미의 아비는 아내가 집을 나간 뒤 우일이를 3층에서 던져 영아 살해를 시도했고, 겨우 얻은 새 여자마저 떠나자 자기 연민에 빠진 채 딸을 성추행한다. 옆방 사는 ‘정씨아저씨’는 농부였지만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울면서 숨어 다니며, 홀아비 ‘이씨아저씨’는 허세 부리며 ‘과부새’하고 사는 우매한 사람. 안집할머니의 유일한 희망인 딸 ‘연숙아줌마’는 사랑 덕분에 ‘너무 너무 행복했기에 그 행복을 믿을 수 없어’(120) 지붕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었다는데, 그토록 사랑한 그녀의 남편은 결국 클라리넷을 들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우미와 우일이를 걱정해주던 공장집 부부는 동성애자들로, 자신들의 비밀을 알게 된 어린 소녀를 보듬어 줄만큼 강하지 못했다.
익숙하다는 것은, 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형태가 다른 소설들에 비해 흔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건들 밑에 억눌린 정서가 낯익다. 서로가 가해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를 닮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외롭고, 약하고, 말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오류와 환경 때문에 실패하는 인물들이 하나도 아닌 잔뜩이니, 읽는 내내 답답해서 속이 펑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읽다보면 작가가 손톱만한 희망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얘기할 거라고, 이 아이들이 한 번은 제대로 웃음을 터뜨릴 거라고 기다리며 읽었는데 웬 걸, 책이 끝나 버렸네. 우미를 철길에 버려 둔 채로. 마왕도 물리치기 전에 죽는 우주소년이 어디 있어. 다시 걷겠다는 바람으로 함께 심었던 해바라기 목을 잘라버리는 경우가 어딨어.
내가 처음 분노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부도수표라도 등장하길 바랐건만, 이 속에는 날조한 희망이 없다. 해어지고 때 묻은 현실만 있다. 이 글의 화자인 초등학교 5학년 박우미 양의 말을 들어보자. 전신마비로 드러누운 연숙 아줌마의 남편이 집을 나갔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나갔을 때 사람들이 그랬듯이, 아저씨가 곧 돌아올 거라든가 걱정하지 말라든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김씨아저씨가 하던 것처럼 아줌마의 머리를 빗어 땋아주고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도 발라주었다. (120)
이게 전부였다. 우미는 감히 희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회의’ 때문에 그녀는 일기장에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이 닦고 학교에 갔다. 첫째시간은 국어 시간이고 둘째시간은 산수 시간이고…….”(134)만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 글뿐이던가. 사랑받는 대신 거듭 버림받고 거부당한 아이들에게서는 흔히 말하는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웃을 때도 싸울 때도 소리를 죽인다. “우리반 모두의 친구 곰순이는 헝겊인형일 뿐인데 왜 이런 따위 바보 같은 연극을 해야 하는 지 웃음이 터질 지경”(71)이란다. 우미와 우일이는 그렇게 모순투성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자기들의 방에 자물쇠를 채웠고, 상담 어머니가 내민 손길도 뿌리친다. 우미는 위선어린 동정을 파악할 정도로 ‘똑똑한’,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어른들은 애들이 왜 이 모양이냐고, 무섭다고 말한다. 왜 모르지? 아이들의 냉소적인 태도는 사실 당신들로부터 빨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실이 팍팍할수록 아이들은 비현실적인 공간을 찾는다. “언제나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즐거운 세상”(101)인 TV,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영화,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꿈과 환상, 단편적인 과거의 기억 속으로 파고든다. 그들의 작은 몸은 세계의 틈새에 빠져 버렸고, 거기서 조용히 죽어간다.
책을 덮고도 한참 떨칠 수 없었던 막막한 질문 - ‘대체 그래서 어쩌라고!’ 저 도저한 냉소를 녹일 방법은 없을까. 괴로운 그들을 가엾게 여기며 먹고 싶어 하는 팥빙수를 사 주면 될까? 아니다. 상담어머니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얘야, 잘 알고 있겠지만, 밖으로부터의 동정이나 행운 따위는 섣불리 기대하지 말아라. 세상이 너희들처럼 득이 될 것도 없는 아이들에게 신경 쓸 수 있겠니? 어머니가 도망치고 아버지가 아이를 내던진 건, 결국 버린 건 정말로 슬프지만, 세상은 그런 자기 연민에 아랑곳없이 흘러가니까. 그래, 울고 싶다면 울어. 소리 내서 엉엉 울라고. 하지만 그러고 있지만은 말란 말이다. 힘들어도 모두가 그렇게 산다. 대단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니까. 혼자 아픈 것 같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지? 다들 그렇게 착각해. 하지만 누군가 그 상처를 알아주길 바라기 전에, 스스로 일어서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 인생을 꽉 잡고 일어서라고. 좋든 싫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삶이 앞에 던져진 걸 어쩌겠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패배감조차 선택에서 비롯된 건지 몰라. 평생 그렇게 팔짱을 끼고 남의 인생인양 구경만 하며 살지 마. 좀 더 살고 싶은 삶을 향해 가보란 말이야. 부유해지라거나, 남한테 떵떵거리라는 게 아니야. 적어도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삶이 죄다 슬픈 거라고 체념한 채 살면서, 비탄 속에 혼자 죽어가지 말라고! 누가 알아주기나 한대! 태어난 게 죄가 아니라면 마음껏 소리 지르지 못할 이유가, 웃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 사람들을 튕겨내고 고독 속에 있고 싶다고? 해를 정면으로 쳐다보면 눈물이 나는 것처럼, 오래 혼자 있으면 외로운 거 아니니? 말을 해야지. 보고만 있지 말고. 사는 게 슬프다고, 동생이 아프다고, 걱정이 된다고, 아빠가 원망스럽다고, 어머니가 그립다고. 왜 말을 못하니. 밤마다 철길 따라 걷기만 하니. 일기에 적을 말이 그렇게 많은데 .
2. 그 집에 숨은 내 방
이 책은 내가 그동안 가라앉히려 애써 온 어린시절의 앙금을 마구 휘저었고, 가라앉았던 눈물을 깊은 기억의 우물로부터 쏟아내게 했다. 오랜만에 나는 혼자 꺼이꺼이 울었다. 사람들이 불쌍하다. 빌어먹을 세상, 화가 난다. 동시에 이런 이야기에 대고 “아, 그 사람들 정말 힘들었겠구나, 그래도 앞으로는 달라질거야, 나아지겠지.”하고 희망을 찾지 못하는 나의 찢어진 의식이 밉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재앙 같던 순간들을 어느 틈에 잊고 있었다는 데 대한 기이한 죄책감과, 왜 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까짓 기억 때문에 눈물을 쏟아야해 하는 억울함이 겹쳐 친다. 안락한 일상은 날 마비시켰던가, 치유했던가.
유년기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나 역시 할 말이 많다. 장선생 앞에 침을 맞으러 간 우일이가 더러운 발을 미안해하고 숨기려 하듯, 감추고 싶었던 옛날이야기가, 저 깊은 곳에서 바르르 떨며 쓸데없는 몸단장에 집중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우미네 집에 숨어 있던 마지막 방은 바로 내 방이었다.
외할머니를 직접 본 기억은 없다. 그 얼굴은 내가 겨우 걸음마를 배웠을 무렵 성묘 가서 찍은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지금의 내 나이를 얼마 넘기지 않은 젊은 엄마 옆에서 눈이 부신 듯 눈썹을 찡그리며 웃고 있던 마르고 까만 여자. 그녀는 어느 날 빠르게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뛰어 내렸다고 한다. 왜였지? 이유가 뭐였더라? 병원에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진단을 받으셨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도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유일하게 정확한 사실은, 하필이면 엄마가 보는 앞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그 때까지는 가난하긴 했을지언정 별 탈 없이 살아갔을 우리 가족의 생활도, 외할머니가 철길 위로 떨어지시던 그 순간 추락하고 말았다. 거꾸로 떨어져 머리가 깨져버린 외할머니는 얼마 못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급기야 정신을 놓쳐 버리셨나 보았다. 그 뒤 엄마는 과거와 현재, 사실과 환상을 혼동하기 시작했고, 그걸 전부 부서진 마음 안에서 입 밖으로 끝없이 풀어놓았다, 혼자이든 주위에 누가 있든 상관없이. 그리고 집에 굴러다니는 종이란 종이에는 죄다, 심지어 벽지에 이르기까지 암호 같은 글자들이 구불구불 새겨졌다.
그 때 오빠와 나는 몇 살이나 되었더라? 오빠가 초등학생이었던가? 과거는 관처럼 깊이 묻어 버리는 우리 집의 습관 탓으로, 정확한 연도 따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아, 유치원에 다닐 때였구나.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갔고, 바로 초등학교 1학년이 됐었으니까.
우리가 몇 살이었다는 것, 그리고 정상이든 아니든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변해버린 엄마를 아빠와 친척들이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역시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어느 날 큰어머니는 엄마에게 드라이브를 가자고 말했고, 엄마는 팬티 3장을 가지고 집을 떠나 그대로 몇 년간 돌아오지 못했다. 기나긴 드라이브의 목적지는 사람들이 가끔 ‘미쳤다’는 표현을 에둘러 얘기할 때 등장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 정신병원이었다. (세상에, 팬티 3장 들고 드라이브 가는 게 어딨어, 화가 치밀면 발작처럼 시작되던 엄마의 레파토리에는, 큰어머니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이 말이 자주 등장했다)
나쁜 기억력 탓인지, 잊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난 유년기의 나를 온전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아주 단편적인 영상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대부분은 우울하거나 무섭기 일쑤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손을 베이는 사금파리들. 그 때 - 엄마의 거대한 부재를 감당하며 아빠와 오빠와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단칸방.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 안의 유령 같던 사람들, 침대 위에서 희미하게 웃던 낯선 엄마를 보고 겁을 먹고 뒷걸음 쳤던 일 그리고 그리고 등등등.
금전 사정 또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신체장애를 지닌 아빠가 안정된 직장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빤 어릴 때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셨는데, 충격으로 근육이 오그라들면서 다른 쪽 다리보다 한 뼘 정도가 짧아져 버렸고, 평생을 절름발이로 사셔야 했다. 어쨌거나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 우리는 생활보호대상자로 근근이 살았다 한다. 하지만 사정을 알 길 없었던 나와 오빠는 새 신발이며 로봇 따위에 자꾸 욕심을 냈고, 그 때마다 아빠는 한숨을 쉬거나 화를 내셨다.
그러다가 오빠가 발작을 일으켰다. 초저녁? 밤? 밖은 어두웠고, 좁은 천장에 형광등이 매달려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때문이었을까. 오빠는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뒤집혀 흰자가 보이는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허공을 향한 채 비뚜름한 입으로 헤실헤실 웃어댔다. 나는 겁에 질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놀란 아빠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옆방 아줌마를 불렀고, 아주머니는 달려와서 오빠의 몸을 주무르더니 얘야, 주기도문을 외워 봐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 하나는 좋았던 오빠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띄엄띄엄 주기도문을 외웠다. 하늘에. 계신. 힉. 우리. 아버지. 히익.
잠시 후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오빠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빠는 그 길로 집을 나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이상해진 오빠와 단 둘이 방에 있는 것이 무서워서였는지 나는 문 밖에 나가 아빠를 기다렸다. 한참 후, 집 앞 언덕길 경사를 따라 가로등이 헤쳐 놓은 어둠 속으로 아빠가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한 다리로 우뚝 섰다가 다른 다리가 휘청 땅으로 떨어지는, 절뚝거리는 그 걸음새와 엇박자의 발소리를 단 한 번도 헷갈린 적이 없다. 아빠의 한 쪽 손에는 작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노랗고 빨갛고 하얀 플라스틱으로 중무장한,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우리들의 믿음직한 메칸더 V’. 오빠가 갖고 싶다고 그렇게 떼를 썼던, 종이 포장도 안 된 싸구려 로봇이었다. 잠이 깬 오빠가 그걸 보고 신나했었나? 우리가 함께 주제가를 따라 불렀던가?
앞에서 나는 우미가 비정한 현실에 지지 말고 힘을 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되, 자기 연민에 빠져 비탄 속에 혼자 움츠리지 말기를 바랐다. 사실 그건 내가 나에게 줄창 해 온 말이었다. 물론 고통에도 경중이 있고, 게다가 나는 씩씩하게 잘 살고 있으니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주제넘은 오만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말 속에 거짓은 없다.
그런데 요즘 나는 정반대로, 내가 ‘내 고통’을 습관처럼 사람들의 눈앞에 들이 밀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고통의 우위’는 나를 자기 위안에 머물게 하는 무거운 추다. 사실 고통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자꾸 긁어 생채기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자학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때로 고통이 가져다주는 우울이나 슬픔이 몸에 잘 맞는 낡은 옷처럼 편안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힘들고 아프지 않으면 허전하기까지 하다. 생각해보면, 옷 속에 가시가 박혀 있어도 그 가시가 항상 들어가던 상처의 구멍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지 않겠는가. 자기가 그걸 깊이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꽉 찬 느낌조차 들겠지. 심지어 다른 좋은 옷을 눈앞에 흔들어도 고개를 젓고 그 옷만, 그 아픔만 움켜쥘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가시’라는 것의 방향은 신중히 볼 필요가 있다. 상처뿐이었다고, 내 삶은 신도 고개를 돌린 불행 투성이였다고 자기의 고통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럴수록 자기 하나 돌보기에도 벅차기 십상이다. 그 순간 자기에게 박혀 있다고 생각한 날카로운 가시 끝은 사실 밖을 향하고 있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겨냥하는 것이다. 내 눈에는 우미가 그렇게 보였다. 어째서 충분히 힘들었던 한 사람이, 안기 위해 서로를 찔러야 한다는 고슴도치마저 되어야 하는가.
3. 절망의 역설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고 있다. 예전 같았다면 내가 수십 갈래로 뻗은 길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어서, 온갖 가능성을 점치는 중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내게 단 하나 잡풀 가득한 철길만 있다는 것을 안다. 원래부터 별다른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죽은 동생의 시끄러운 소리를 피해 나온 우미가 걷던 길, 클라리넷을 잘 불던 김씨 아저씨가 직장을 잃고 방황하다 사라진 그 길. “이 철길을 따라가면 세상 어느 곳으로라도 갈 수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었다”(153) 하지만 TV를 끄고 환상을 걷어내면, 지난한 삶의 길만이 남는다.
새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 아래로만 잡아끄는 부담스러운 중력에서 벗어나 다 비우고 날아가면 될 테니까. 그런데 나는 문득 내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날기 위해 몸과 머리를 비우면 더는 나로 남아 있기 힘들어질 것이고, 그렇게 해서라도 무모한 희망에 부풀어 올라간다면 몸과 맞지 않는 기압에 팽창해 터져 버릴 지도 모른다. 애증의 대상인 이 땅 위에서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무거워야 한다. 다만 바닥으로 꺼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무거웠으면 좋겠네.
사는 장소에 절망 밖에 남지 않아도 우리에게 ‘견딜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깟 인생에서 해방 어쩌고 구원 저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순진하게 다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릴 때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죽지 않고 살아간다. 정씨는 도망자로 살면서 단칸방을 ‘무덤’처럼 만들었지만, 그것 또한 ‘무덤 속의’ 삶이었다. 우매한 편견에 곧잘 빠지곤 하는 홀아비 ‘이씨아저씨’는 혼자가 되면 외로워 할 새를 위해 새장에 검은 천을 덮어 주면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새를 볼 수 있도록 벽돌을 받쳐 주면서 살았다. 가난 때문에 ‘여자를 때리고 아이들을 내던진’ 우미의 아버지도 한 여자에게 3년을 모은 돈과 눈 먼 순정을 바쳐 보며 살기 위해 애썼다. 방법이 잘못되고 결과가 실패했다고 해서, 그냥 무시해도 좋을 서러운 시도가 있었겠는가. 자기의 역사를 비틀거리며 짊어진 채 그들이 기울인 모든 시도가 절망의 토양으로부터 해바라기 싹처럼 고개를 내밀면, 삶이 지닌 절망의 역설이 고요히 입을 연다. 사는 건 힘들고, 희망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감내하며 살아내는 것이 결국 삶이고, 그 시도에서 작든 크든 의미가, 다시 희망이 태어난다. 허, 이거 웃음이 난다. 희망이 커서 이루지 못하면 절망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절망이 희망을 틔우기도 한다니. 뭐, 인생은 어차피 코믹하고 잔혹한 역설 아니겠어. 떼죽음이 있어야 꽃장수가 돈을 벌듯, 절망이 있기에, ‘죽음이 있기에’ 또 사는 힘을 얻는 것이 삶 아니겠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새는 날아가고 우일이는 죽었지만, “이 세상에 한 번 생겨난 것은 없어지는 법이 아니라고, 먼 옛날의 별빛을 이제사 우리가 보는 것처럼 모든 있었던 것, 지나간 자취는 아주 훗날에라도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연숙아줌마는 말했었다.”(153) 우미와 우일이의 슬픈 자취는, 우리 아이들에게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나의 모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사람을 때리고, 가두려고 했던 우미 아버지의 잘못은, 내가 배려와 미소와 해방으로 사랑할 때 고쳐질까. 그렇게, 모든 있었던 것과 지나간 자취가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내리라.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2004년 2학기. 여성과 문학 수업)
엉엉 울면서 책을 다 읽고, 역시 울면서 글을 썼다.
그런 글들은 여전히 '고요하게 피냄새를 흘리면서' 나를 위로한다.
나는 이제 절망하지 않아. 참 잘됐다.
모든 있었던 것과 지나간 자취가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