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cutefel/40108264897
 

   .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선 첫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온갖 복선과 트릭을 한껏 선보이던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번에는 힘을 좍 빼고 최대한 가볍고 발랄하게, '젊은 모험가들'을 등장시켜서 분위기 반전에 나섰다. 말 그대로 '알콩달콩 달달'한(;;) 모험가 커플과 미국에서 건너온 혈기왕성한 백만장자 청년, 뛰어난 두뇌와 카리스마를 갖춘 왕실변호사, 한창때를 지난 나이에도 다크포스를 한껏 내뿜는 악녀 스파이에 영국을 위기에 빠뜨릴 서류와 그 서류를 들고 사라진 정체불명의 여인까지 - 정말 전형적이고 이제와서 보면 살짝 낯뜨겁기까지 한 조합. ^^;

 

   . 애거서 크리스티 하면 역시 포와로고, 여기에 미스 마플이 자주 나오는 편이지만, 캐릭터의 매력이라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토미-터펜스 커플도 빼놓을 수 없다. 약간 덤벙대긴하지만 믿음직한 토미와 작고 깜찍한 외모에 똑부러진 성격의 터펜스는 크리스티가 본격적으로 추리작가 일을 시작하고나서 처음으로 쓴 소설인 비밀결사에서부터 등장해 1차대전 이후의 혼란기, 2차대전, 그리고 종전을 넘어 노부부가 되어서도 여전히 예전 '젊은 모험가들' 시절의 모습처럼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크리스티의 마지막 소설인 운명의 문에서 다시 한 번 주인공을 맡고 있으니, 비록 많은 작품에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작가로부터 꽤 귀여움을 받고 있는 셈이다.

 

   . 즐겁게 읽으면 되는 모험소설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골머리 썩일 일도, 절묘한 트릭도 그다지 없다. 물론 스파이물이니 최후의 보스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야겠지만, 생각할 필요없이 그저 책을 대충대충 넘기지만 않았다면 도저히 틀릴 수가 없다. 이미 처음 부분에 보스가 직접 등장하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이야 그저 주인공들에게 닥쳐오는 위기와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즐겁게 읽어주면 끝.

 

    http://blog.naver.com/cutefel/40108210322



  . "(전략) 사소하지만 순리에 어긋나는 사실, 어쩌면 전체적인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하찮고도 시시한 사실을 그 부분에 놓아 보는 걸세!" 그는 커다랗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것이 의미있는 거야!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그 - 래 - 요 - ?"

    "조심하라고! '그건 너무 조그만 일이야 -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 그것은 다른 사실과 어울리지 않아. 그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하고 말하는 탐정에게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라네. 혼란은 바로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건 해결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어!"

 

   . 회색 뇌세포, 안락의자 탐정이 애거서 크리스티(이하 여사님이라고 칭한다)가 창조한 탐정들의 특징이라면, 포와로가 처음 등장해서 하는 저 일장연설은 여사님의 추리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특징이다. 등장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야 어느 소설에서든 파악하는 거지만, 여기저기 온갖 복선과 암시가 널려있어서 한 줄이라도 빼먹고 대충 읽었다가는 나중에 사건 해결 설명을 들어도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자칫 오타로 착각할만할 일(이름을 살짝 잘못 불렀다거나 - 그것도 모음 하나만 살짝 틀리는 식으로)도 그냥 넘겼다가는 뒤통수를 맞기 일쑤다(그런데 책에는 또 오타가 있다!!!! -_-;;;;)

 

   . 뒤에 나온 트릭 작가들이 여사님 덕에 더 이상 쓸만한 트릭이나 암시가 없다라고 투덜거릴 정도로 여사님께선 트릭과 복선에 능한데, 이런 특징이 초기작인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에는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왜 피해자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은 일이 중요한 걸까?', '왜 난로에 불을 켠 거지?' '왜 그는 뜬금없이 새벽에 돌아다닌 거지?' 이런 류의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나오고, 이 질문들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함정이기도 하다. 여기에 추리소설이면서 로맨스는 또 로맨스대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으니(여사님께서는 나름 유명한 연애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코난 도일이나 체스터튼, 푸트렐이나 오르치 같은 간결한 소설에 익숙해져 있던 편집자들이 계속 퇴짜를 놨던 것도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홈즈-왓슨을 연상시키는 이인조 구성에 탐정은 괴상하게 생긴 외국인이기까지! (덕분에 포와로나 올리버 부인의 입을 통해 영국인들이 외국인을 꺼려한다는 얘기 역시 잊을만하면 나온다) 그저 여사님께서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덕에 50년이 넘게 이어지는 여사님 월드;; 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게 다행일 뿐이다. ^^;

 

   . 작은 키, 달걀 같은 대머리, 멋진 콧수염, 벨기에인, 회색 뇌세포의 탐정이지만 허영심과 장난기가 다분한 포와로는 이렇게 여사님의 첫 작품부터 등장한다. 단짝인 헤이스팅즈도 훤칠하고 모범적인 영국인이지만 성급한데다 푼수끼가 있고 쉽사리 사랑에 빠지는데다 영국인치고는 살짝 피가 끓어오르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둘의 캐릭터는 2년 뒤에 나오는 단편집인 '포와로 수사집'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니 이쪽도 꼭 추천. ^^

 

    http://blog.naver.com/cutefel/40107180326


   . 이 책. 묵직하다. 크기는 작지만 600페이지가 넘어가 손을 꽉 채우는 두께, 온통 까만 배경 아래 한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그림. 정자체로 음각된 은색 글씨. 안을 들여다보면 역시 페이지를 빽빽하게 메우는 작은 글씨와 중간중간 깨알만한 각주들. 마치 내용의 분위기를 겉에서부터 한껏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혹은 자신없으면 일찌감치 물러나라고 하는 듯한 느낌의 표지다. 불친절하다면 불친절하다고 해야할 지. 그리고 내용도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 예전에 움베르트 에코가 장미의 이름 앞부분이 너무 길고 어렵다는 주변의 말에 그것은 자신의 책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부분이며, 이 정도는 통과할 수 있어야만 자신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독자인 것이다 - 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작가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우부메의 여름도 그런 느낌이 든다. 첫머리의 알 수 없는 독백을 어찌어찌 넘기고 나면 살짝 우울증이 있는 소설가가 나와 퉁명스럽고 잡학다식(박학다식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한 헌책방 주인과 뇌니 기억이니 문화니 심리학이니 헌책에 나오는 과거 일본요괴의 유래니 하는 알 수 없는 얘기를 50페이지 정도 잔뜩 늘어놓는다. 어쩌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고, 좀 낫다면 이게 대체 뭔 소린지 하며 대충 넘어가겠지만 - 이 부분을 대충 넘기게 되면 이 책의 내용 전체는 무너져버리고 결말에 다다라서도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냐며 불만을 터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 요괴와 유령, 고대종교와 풍속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빛바랜 것만 같은 이야기에 색깔을 더해주는 것이 교고쿠도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들이다. 수려한 외모와 방만한 태도에 타인의 기억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추리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탐정' 에노키즈 레이지로, 항상 자신은 탐정이 아니라면서도 결국 모든 추리와 해결을 혼자 떠안아버리는 잡학다식하고 퉁명스러운 기도사 추젠지 아키히코, 처음 나왔을때는 약간 울증이 있고 시원찮다면서도 나름 밥은 벌어먹고 사는 그냥그런 소설가였을 뿐이었지만 사건을 접하면 접할수록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세키구치 다츠미, 이들을 유일하게 맞상대할 수 있다지만 언제나 말리는 것만 같은 우락부락한 기바 슈타로 형사 등등 하나같이 어디 만화에서나 나오는 것 같은 인물들이 자칫 고리타분한 괴담쪽으로 빠질것만 같은 이야기에 차고 넘쳐서 과하다싶을 정도의 생동감을 주면서 이야기를 멋대로(-_-) 주무르고 있는데, 그나마 시리즈의 가장 첫 소설인 우부메의 여름에서는 덜한 편이니 대체 앞으로는 어디까지 폭주하게 될런지. ;;

 

   . 교고쿠도 시리즈 중에서 망량의 상자가 가장 끔찍하고, 광골의 꿈이 가장 괴상하다면, 우부메의 여름은 가장 '서글프다.' 단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인물과 직접 관련되어서 그 심정이 녹아들어가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소설과 달리 우부메의 여름에서는 책임을 물을 사람도, 손을 써 볼 도리도 여지도 없이, 그저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채로 힘없이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 믿을 수 없을만큼 괴이하고 이상한 사건과 이를 둘러싼 오래된 괴담, 그리고 사건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책은 이런 도구들을 통해 마음 속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20개월 동안 아이를 배고 있는 임산부, 개구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갓난아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 낸 생생한 모습의 시체, 동기도 범인도 보이지 않는 밀실살인까지 이렇게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는 일들이 모두 하나의 어둠에 연결되어 있고, 그 어둠은 일련의 수수께끼들보다 더욱 깊고 겉으로 나타난 괴기한 사건들보다도 더욱 끔찍하고 서글프다. 낡고 뜬금없는 얘기인 것만 같았던 몇백년, 혹은 천년도 넘은 괴담들까지도 이 어둠 속에서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고. 작가는 이런 어둠을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무지막지하게 밟아 부숴서 몰아내고, 모든 불가사의한 일들의 정체를 밝혀내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네, 세키구치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