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죄가 있고, 범인의 트릭이 있고, 그것을 밝혀내는 탐정이 있다. 어중간한 로맨스나 눈길을 끌만한 화려한 소재도 없고,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장치도 없는 기본적인 트릭과 트릭간의 연계를 통한 수수께기 풀이. 이 책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동안 국내에 선보였던 대부분의 작품군과는 전혀 다른 지극히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단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오직 트릭만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인지, 책은 극히 건조하고 인물들에 대해서도 수수께기 만들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한다. 범인은 그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고, 탐정은 그 범죄를 풀어내는 사람일 뿐이다. 다른 곳에 눈돌리지 말고, 수수께끼 풀이에만 집중해달라고. 그렇게 잘 던지던 변화구를 모두 봉인한 채, 직구만으로 승부를 걸어대는 느낌이다.

   . 사실 그동안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떻게 보자면 '잘 만들어진 주말드라마를 쓰는 작가'였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재미있게 읽힐만할 글을 쓰는 능력도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기사거리들을 민첩하게 잡아내서 작품화시키는 분야에서만큼은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떤 추리소설가보다도 독보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능력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키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10여년 가까이 일본장르문학을 이끌어가고 한국에서까지 대박을 터뜨리는 작가로 만들어줬지만, 으례 잘 팔리는 작가가 그렇듯 매니아층 사이에서는 석연치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 최대의 걸작이기도 한 용의자 X의 헌신을 제외한다면 그동안 국내에서 출판되었던 그의 소설은 대부분 정통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로맨스, 복수, 판타지, 냉소섞인 괴담 등등 다양한 장르에 기반한 소설이었기에 그런 야박한(?) 평가에 한 몫 거들었었고. 다행히도, 국내에서는 뒤늦게서야 번역된 가가형사 시리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훌륭한 추리소설 작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해주었지만

   . 이 책은 그런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들과는 정반대방향에서, 트릭을 제외한다면 거의 습작이라고 봐도 될 만큼 무미건조하고 투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마치 조금 설명이 긴 추리퀴즈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각각의 단편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상황파악, 범인찾기, 알리바이 깨기, 장치 등 각각의 트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덫의 내부' 같은 단편은 중심이 되는 트릭은 그럭저럭이지만 그 외의 부분이 어색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깨알같은 인정 - '의뢰인의 딸'에서 전작까지는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탐정들이 의뢰인의 딸을 위해 가짜 진실을 얘기하는 부분에서는 이 아저씨. 천성은 못버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 어떤 작가들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뒤늦게 알려지는 경우엔 당연히 시간상의 순서보다는 잘 읽힐 것 같은 작품들 위주로 발행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고, 그래서 탐정클럽도 이제서야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히 이 소설은 작가의 다른 책들에 비해선 재미가 덜하고,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데뷔 초에 어떤 식으로 트릭을 만들어야 할 지 고민하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발전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품 뿐만 아니라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괜찮은 작품일 성 싶다. 이렇게 고민하던 서툰 시기가 없었다면, 분명 가가형사 시리즈 후편들이나 용의자 X의 헌신도 없었을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