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cutefel/40100442382

   .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직접 바다로 나가 기존의 단절되었던 세계를 하나로 이었던 15세기의 대항해시대와 정반대로, 13세기의 연결된 세계체제는 기존 체제들에 뒤늦게서야 중세의 혼란에서 벗어난 유럽세계가 끼어들면서 완성되었다. 이미 아랍상인들은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을 가볍게 넘어 중국은 물론이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까지 진입하고 있었으며, 남아프리카의 동쪽해안에 거주지를 만들고 서아프리카의 말리해안의 왕국들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당나라 멸망에서 호라즘 & 몽골이 등장하기 까지 혼란스러웠던 중앙아시아 내륙과 로마 멸망 후 500년이 넘게 이어지는 혼란기에서 간신히 봉건제의 싹을 틔우고 있던 서유럽을 제외하고, 기존의 체제들은 원활하고 생기있게 연결되어 있었다.

 

   .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서유럽이 공업과 상업에 눈을 뜨고, 호라즘과 몽골이 난립하던 각 부족들을 통합한 후 두 세력의 결전을 통해 몽골이 내륙의 패자가 되면서, 바다와 내륙 양 쪽에서 구대륙은 완벽하게 이어지게 된다. 굳이 마르코 폴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탈리아 상인들은 중앙아시아까지 나가 몽골제국과 직접 거래했고,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중개지로서 번성하고 있었으며,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호라즘 및 아바스 왕조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랍인들은 유럽과 몽골, 유럽과 인도를 중개하고 여기에 몽골에서 '색목인'이라고 따로 불릴 정도로 적극적으로 진출했고, 인도는 아랍과 손을 잡고 경제적, 군사적으로 교류를 해나갔고, 뒤늦게 세계체제에 참가한 서유럽 역시 초기엔 상파뉴, 후기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경제권을 발전시키면서 다른 세계체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13세기의 통합된 세계체제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국가나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통해 침입과 지배가 이루어졌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각자의 체제가 독자-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의존 및 '엇비슷하게나마 평등한 지위'에서의 교류를 이뤄냈다는 점이었다.

 

   . 그렇게 세계체제가 하나로 원활하게 작동될 것 같은 시점에서, 그 흐름은 갑자기 끊기고 만다. 몇몇 작은 연결고리는 살아남았지만 체제들을 이었던 거대한 연결고리는 단절되었고, 각각의 체제는 자신들의 틀 속에 틀어박히거나 쇠퇴하거나 기껏해야 불평등한 관계속에서 삐걱거리며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200여년이 지나고나서야 간신히 '대항해시대의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인 연결이 되살아났고, 그마저도 그들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지역들에 국한된 불완전한 체제였다. 유럽체제가 넘볼 수 없는 힘을 가진 동아시아는 문을 걸어잠그거나 극히 소규모의 교류만 허용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몽골의 멸망과 그 후 티무르가 휩쓸고 지나가고, 투르크 제국이 직접 연결되는 통로를 봉쇄한 내륙 루트는 '길'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흔히 얘기되는 '신대륙'의 발견은 아메리카 대륙을 세계체제에 편입시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기존의 체제를 말살하고 유럽체제의 수탈 배후지가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또 다시 200년 혹은 300년이 지나고나서야, 이번에야말로 세계는 증기선과 화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서양'의 압도적인 힘 아래 통합되었고, 그 불평등한 결과물은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 저자는 독자성을 가진 체제들이 상호 공존하던 연결고리가 붕괴되고, 몇 세기가 지나서야 그것도 일방적이고 위계적이며 불완전한 연결이 이뤄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탐구하고 있다. 21세기가 된 지금에 와서도 요원해 보이는 세계체제가 이미 13세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보였는데도 다시 단절되고, 결국 일방적인 세계체제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일단 서유럽, 지중해, 중동, 인도,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 각 체제의 발전과 쇠퇴를 각각 이야기한다. 쇠퇴의 과정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체제를 연결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몽골제국으로 인해 페스트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각 체제가 연결을 지탱할 힘을 잃어버린 것이지만(어찌보면 바벨탑을 연상시키기까지 하는), 그 외에도 각 체제가 가진 경제 체제가 빠른 발전의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퇴보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 그렇게 책은 각각의 요인들이 누적되고 연쇄반응을 일으켜 세계체제를 재편성하고, 살아남은 - 진출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여력을 남겨놓은 - 체제가 다른 체제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유산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끝을 맺는다. 즉, 13세기에 한 번 성립되었다가 단절된 연결고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항해시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흑사병과 세계체제의 단절을 버텨내고 이를 넘어 단절의 위기속에서 끊어진 고리를 대체하는 다른 고리를 찾아나서기로 결정한 유럽세력이 이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강한 체제는 우회하고 쇠퇴한 체제에 대해선 우월한 위치를 고수해가면서 유럽이 중심이 된 일방주의적 체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http://blog.naver.com/cutefel/40098772827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내용보다도 문체였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화려한 수식과 특유의 운율, 그리고 "-었다, -어요, ’-한담?’ 같은 문장의 독특한 끝맺음이나 갑자기 ’독자들이여!’ ’이를 보라!’ 처럼 독자를 직접 부르는 작가의 말 같은 부분들. 대사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감정을 절제해 딱딱하고 서늘하게 서술하는 현대의 소설들과 달리, 당시 소설들은 대사든 상황설명이든 묘사든 하나같이 감정이 충만해있어서, 눈으로 읽으면 살짝 낯뜨겁기도 하지만 입으로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어서 소설인데도 마치 희곡을 읽는 것 같다. 마치 등장인물 이외에 한 명의 인물이 더 있어서, 그 사람이 감정을 실어 대사를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 소설은 상식적인 추리소설의 틀 안에서 잘 쓰여져있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모든 있을 수 없는 일을 제외하면, 최후에 남는 것이 사실’ 이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분명한 원칙을 바탕으로 여러 사건을 잘 연결시켜 간단하지만 얄팍하지 않고 공정하게 트릭을 잘 구성하고 있다. 다만 맨 뒷부분에서 아무 복선도 없이 뜬금없는 바꿔치기가 등장한다는 점이 옥에 티지만, 그 전에 중심사건은 이미 해결되고 남은 뒤니까.

 

   . 추리와 활극, 신파가 얽힌 소설답게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뚜렷한 인상을 준다. 아직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던 1930년대 후반, 상류층의 화려한 문화 역시 전쟁으로 인해 꺾이기 직전이었던 시대답게(비록 국민총동원령이 내려진 시대였다고 하지만, 1937년에는 화신백화점이, 1939년에는 조지아 백화점이 들어서는 등 아직 상류층에게까지 전쟁의 그늘이 드리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대한 가장무도회 장면을 시작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작(孔雀)’부인 주은몽과 그리스 조각 미남같은 외모에 냉철하고 차디찬 인상의 오상억 변호사, 주홍빛 망토를 뒤집어 쓴 신출귀몰한 중 해월, 뤼팽처럼 외알안경에 실크햇을 쓴 정체불명의 이선배, 그리고 혈기넘치는 탐정소설가인 백남수, 오히려 탐정 유불란이 주인공이자 사건을 해결하는 히어로 역할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인물들에 비한다면 그닥 매력이 없다. 사건 내내 사랑에 빠져 고민하며 마지막 장면에선 그런 자신을 자책하고 ’탐정의 피에는 강철이 흘러야 한다!’고 일갈하지만 막상 캐릭터의 매력은 주은몽에 대한 사랑과 추리를 놓고 유불란과 경쟁하는 오상억이 앞서고, 탐정으로서도, 히어로로서도 다른 탐정들에 비해 그닥 뚜렷한 부분이 없다. 주변인물이나 악역들은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서 훨씬 인상이 강하고 개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 위에서 말했던 독특한 문체도 문체지만, 그 시대에 쓰였던 말투나 단어의 차이가 정말 재미있었다. 주은몽이 백남수의 앞에서 "한 달 후에는 남수씨의 젊은 어머니!"라고 말하거나, 유불란에게 "유선생님의 말씀은 정신병자!"라고 외치거나, 오상억이 은몽에게 "유불란씨가 이 광경을 엿본다면 적이 걱정하리라, 분개하리라."고 의기양양해하는 장면,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의 표제가 ’조선의 자랑인 무희 공작부인을 한시바삐 복수귀의 손으로부터 구하라!’, ’공명심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법주임 임 경부여!’ 처럼 되어있는 부분은 버스 안에서 소리내서 읽고싶은 마음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마인, 김내성, 첫소설, 유불란, 주은몽

    http://blog.naver.com/cutefel/40111777899

   .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야기는 참 씁쓸하다. 어줍잖게 화를 내거나 거창하게 부풀리지 않으면서도 이정도까지 쓰디쓴 맛을 내는 작가는 거의 드문데, 거의 얘기되어지지 않는 - 옆에서 보는 무심한 제3자가 '그건 뭐 그냥 그럴수도 있는거지' 하면서 넘어가버리는 - '일상' 속에서 악의와 뻔뻔스러움에 의해 일어나는 소소한 부조리와 상처가 어떤 것인지 알고, 그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도 안다. 그래서 분명 작품 내내 위트가 넘치고, 문장은 통통 튀는데도 다 읽고나면 혀 뒷뿌리에 씁쓸한 맛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와카타케 나나미에게 장편이란, 등장인물 개개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넓은 무대라는 생각이 든다. 단편일 때에 비해서 페이지가 늘어났으니 등장인물도 더 늘릴 수 있을거고,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부 할 수 있게 되어서 잘됐다는 느낌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은 그 동안 국내에 소개되었던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으로서는 보기 드문 장편인데도, 기존의 단편에 비해 그렇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맨 앞 장의 '등장인물 소개'에 나오는 사람만 스물 두 명이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나오는 집만 열 한 채인데도 마치 서너명이 등장하는 단편인 것처럼 이들 모두에게 이야기를 부여하고 있으니, 이야기꾼으로서의 와카타케 나나미의 능력이란. ^^ 

   . 다만 비어 있는 두 채의 집이라던가, 사체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지고 있는 서너명의 정체, 열 채의 빌라 매그놀리아의 주민간의 관계 같은 정황은 본격추리소재로서 정말 매력적인데, 트릭이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으로서의 반전은 확실하지만, 너무 예상하기 어렵다는 게 오히려 문제랄까. 전작의 '철창살의 여자', '의뢰인은 죽었다' 처럼 단편으로서는 정말 좋은 반전이 있는 작품도 몇 있는데, 이번 장편은 글 전체를 아우르는 점에서는 좀 아쉬운 느낌이다. 결말 직전까지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몰아가면서 사건을 끌어가는 전개는 정말 좋았는데.

   . 전작의 하무라 아키라도 그렇지만,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번 소설에서도 고집이 있고 멧집이 두둑한 여성들을 대거 등장시킨다. 그녀의 소설에서 남자들은 세파에 쩔고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했거나 너무 늦어버린 몇몇 아저씨들을 제외하면 소심하거나 허세를 부리는(혹은 둘 다인-_-;) 영 못미더운 캐릭터들이 대부분인데 - 잘생기면 외모만 빤지르르하다고 냉소의 대상이 되는 게 운명이고, 오히려 위에서 말한 '몇몇 아저씨'들이 의지가 되고는 한다 - 반대로 이 소설의 여성들은 부조리나 뻔뻔스러움, 남자는 둘째치고 오히려 같은 여자들의 입방아에까지 내둘리면서도 나이에 기죽거나 주변환경에 풀죽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고집을 가지고 싸워나가고 있다. 예전에 다른 리뷰에서 '사쿠라바 가즈키는 소녀에 대해 연민을 품고 있다'고 쓴 적이 있었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에게라면 '싸우는 여성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쓰면 되려나. 실제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난 페미니스트 따위가 아니라고.  그런 걸로는 30분짜리 반쪽 시급도 안나올 뿐이야.' 로 시작하는 특유의 독설에 뼈조각 하나도 못 거둘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

 

   p.s. 헌책방 '기토당'에서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 이름이 하무라라는 건, 작가의 작지만 고마운 팬서비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