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 화려하다. 집어들자마자 눈을 사로잡아버리는 책표지부터, 청순하고 아름다운 자매에, 처음부터 확실하게 사건성을 띠고 드러나는 사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상적인 사각건물과 그 안에서 등장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천재과학자. 그리고 소실과 토막살인이라는 확실한 시각적 효과.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이 음울한 분위기를 피워내면서 발밑을 스물스물 감싸돌고 있었다면, 망량의 상자는 처음부터 읽는 사람에게 충격적인 장면들을 쏟아낸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전개가 빠르고 가독성이 높고, 종교, 영능력, 점술, 초능력을 넘나들면서 사이비 영능력자의 예지를 파해치는 교고쿠도의 장광설조차도 여느때와는 달리 그닥 발목을 잡는 부분이 없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여느때보다도 많이 등장하고, 전작에서 에노키즈 홀로 고군분투하던 유머러스한 부분은 도리구치가 가세하면서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 거기에 우락부락한 형사의 적당한 로맨스까지. 안 팔릴만한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매력적인 요소를 최대한 채워넣는다. 이미 작가도 쓰면서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이 책은 된다, 당연하지 - 라고.

 

   . 교고쿠도 시리즈가 늘 그렇듯, 트릭은 간명하다. 책 속에서 교고쿠도가 말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관계없는 사건이 중복되어 있고 별개의 사건을 하나로 연결해서 보려는 시각 때문에 헷갈리기는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여느때처럼 작가가 대놓고 주는 힌트에 집중한다면 몇몇 사건은 극히 단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우부메가 그렇고 광골이 그렇듯, 사건의 전말 뒤에는 말도 안되는 함정이 숨어있고, 그 중에서도 망량의 상자에서의 함정은 좋게 말해서 판타지 수준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다. 사기. ^^;;;;

 

   . 철저하게 세키구치 1인 시점에서 쓰여졌던 우부메의 여름과 달리, 망량의 상자에서부터 교고쿠도는 여러 사람의 시점을 선택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그 시점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서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고, 작가는 그것을 때로는 복선으로, 때로는 함정으로, 또는 평면적이었던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첫 사건의 목격자였던 요리코는 소녀 특유의 목소리로 사건을 서술해나가고, 단순한 열혈근육 형사로 여겨졌던 기바 슈타로는 튼튼한 상자속에 닫혀있던 내면을 살짝 풀죽은 투로, 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에노키즈에 이르러서는... 의외로 상식인이라는 교고쿠도 시리즈 최대의 반전이. :)

 

   . 망량의 상자 내내 기바가 독백하는 것처럼, 교고쿠도 시리즈의 범인들은 선악이 불분명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엉켜있어 법으로 처벌하기에도, 소설속에서 비난하기에도 뒷맛이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독 망량의 상자만큼은 법적으로 처벌을 할 수 없는 경우일지는 몰라도, 비난하고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 흔히 하는 얘기로 악의 최종보스라고 할만한;;;; - 뒷맛이 깔끔한 상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게 특이하고, 심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다. 서글프고 아련했던 우부메의 여름이나, 어리석은 집념이 되려 우스꽝스럽고 안타깝게 보이던 광골의 꿈과 달리, 상대의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끝까지 쫓아가 숨통을 끊어버리는 이런 확실한 구도는, 망량의 상자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결말이 - 나에게는 오히려 뒷맛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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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상한다.

   아득하고 황량한 대지를 혼자서 걷는 남자.

   남자가 짊어지고 있는 상자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들어있다.

   남자는 만족한 얼굴로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걸어간다.

   그래도

   나는 왠지 몹시 -

   남자가 부러워지고 말았다.

 

                                                                                                 - 망량의 상자 마지막 부분 -

    . 정말 말 그대로 '마음가는대로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의 지도를 달랑 하나 그려놓고, 여기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채워넣어 이야기거리를 잔뜩 흩뿌려놓고, 그걸 하나하나씩 주워들고. 툭 튀어나오는 부분은 낑낑거리면서 집어넣고, 푹 파여서 공간이 남는 부분은 꼭꼭(혹은 대강대강) 채우고. 그렇게 소설의 틀 안에 어찌저찌 넣어서 만든 이야기. 제목이 '어제의 세계'니까 '오늘의 세계'가 있어야 할 거 같고, 어제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가 있으면 세계가 두 개인거니 왠지 판타지가 되어야 할 거 같은데, 그렇다고 추리를 빼버리자니 뭔가 아쉽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엉켜 돌면서 만들어진 알 수 없는 이야기. 그게 '어제의 세계'가 아닐까.

 

  . 예전에 자주 가던 사이트에서 사건의 진상을 "꾸며내는" 퀴즈를 본 적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멈춰서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것을 확인하는 한 남자. 그리고 그는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는 높은 빌딩에서 투신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과연 무슨 일이었을까?

 

   . 어제의 세계를 읽고나서 예전에 봤던 이 퀴즈가 떠올랐다. 최소한의 상황을 던져주고 나서, 논리에만 맞으면 어떤 전개이든 답으로 인정되던 문제. 아니, 애초에 답이라는 게 있을수가 없으니, 최소한의 조건만 가지고 얼마나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 - 답을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던 문제. 마치 보드게임 중에서 단어카드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임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한 장의 지도와 '어제의 세계'라는 제목, 그리고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온다 리쿠는 그녀의 상상력과 기억의 창고를 끝없이 뒤져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스스로 '내 문학의 집대성' 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지금까지 쓴 모든 얘기를 하나하나씩 끌어올려서. 그래서인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와 어린 손녀, 자유롭게 사는 또 다른 자신을 마음 속에 품고 사는 남자, 초자연적인 혼자만의 비밀을 가진 어른스러운 고등학생, 누군가의 뒤를 쫓으면서도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젊은 '당신', 엇갈린 시점과 잘 조성된 역 앞의 마을이라는 배경까지. 모두가 어째서인지 어딘가 낯익은 모습들이다. 물론 더 낯익은 걸로 치자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인 양 시치미를 뚝 떼고 여느때처럼 미스테리적 요소를 잔뜩 집어넣어 상세한 묘사를 해나가는 온다 리쿠의 솜씨부터가 제일 낯익지만.

 

 

   . 작가로서 한 번 해보고는 싶지만 두 번은 절대 못하고, 사실 한 번 하기에도 엄청나게 겁나는 이야기. 이 책은 작가의 그런 모험담이다.

 

   . 이 소설, 뭔가 석연치않다. 단편들이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라고 생각했더니 막상 본 얘기를 위해 왠만한 책 한 권 분량이 넘어갈만한 장편이 끼어있질 않나,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듯이 그냥 흘러 넘어가질 않나. 모두들 사실을 알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면서 노력했지만 그 사실은 결국 힘있는 자의 도락 앞에 묻혀버리고, 그렇게 모두는 또다시 여느때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다고 하드보일드나 사회파처럼 그 사실에 화를 내거나 절망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인지. 미야베 미유키의 생각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 미야베 미유키가 그려내는 에도시대에는 생동감이 있다. 당시 막 개발되었던 스미다강 건너편의 혼조와 후카가와를 배경으로 그곳에 흘러들어온 하급관리와 장사꾼들, 흔히 '나가야'라고 불리던 다세대주택의 서민들이 말 그대로 위아래 이런저런 것에 딱히 구애받지 않고 한데 엉켜모여서 살아가는 이야기여서인지, 그 시대를 둘러싸고 있던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특징적인 캐릭터들도 나름 적절하고.

 

   .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에도시대의 서민의 자유로움에 대해서 쓰고 있자니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된다. 힘있는 자들이 자신의 기치와 고집을 세우기 위해 몇년, 십몇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원한을 풀고 복수를 하겠다고 교묘하게 계략을 꾸미고 마음을 얽매는 사이에, 공동주택의 서민들은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젊은 관리인과 창녀 출신의 여자를 받아서 이웃이 되고, 젊은 관리인은 거리에서 발견한 고아를 기르며 가정을 꾸린다. 사건 조사에 앞장섰던 하급관리는 아무와도 관계없는 진실따위는 묻어둔 채 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구치소의 죄수를 구명하고 같이 조사에 나섰던 귀여운 아이를 양자로 들이게 되고.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미야베 미유키가 말하고 싶던 것이었을까.

 

 

   p.s. 마지막에 자신이 유령이라며 분위기를 잡던 여자에게 오토쿠가 엿탕을 쏟아붓던 장면은, 나처럼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한 - 조금은 애들같지만, 작가 나름의 작은 서비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