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의 소설 <토지> 20권을 완독했습니다.
긴 호흡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으니 감정을 놓쳐서 집중도가 흔들리는 아쉬움이 있네요
워낙 좋은 작품이라서 제가 평가하는 것이 건방질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중심인물들의 이야기를 미시적인 시점을 이용해서 거시적인 흐름을 만들어가는 부분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상황에 대한 묘사와 감정전달에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중심에서 벗어난 인물들의 설득력이 아주 높지 않았고
호흡이 빨라지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등장인물이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서희와 양현의 관계를 위해서 윤국, 영광 등이 캐릭터들이 버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워낙 좋은 작품인데 청개구리 심보로 몇마디한 거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대단하고 거대한 작품 리뷰를 어떻게 쓸까 참 고민이 됐는데
감정에 따라 쓰는 게 좋겠다 생각이 들어서 5부마다 하나의 시로 정리를 해 봤습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표현부분과 감정적으로 끌린 구절들을 옮겨 적어보겠습니다.
(구절 적을 때 책 - 페이지로 표시합니다.)
1부 - 자(者)
나라를 버린 자는 금을 얻고
나라를 안은 자는 피를 잃다.
사람을 잃은 자는 죽여지고
사람을 지킨 자는 죽어간다.
사랑을 아는 자는 방황하고
사랑을 모른 자는 집착한다.
허무를 느낀 자는 멈춰서고
의무를 느낀 자는 나아간다.
2부 - 사랑
진달래 꽃잎이 사랑을 남기지만
지는 꽃은 침묵을 끝내는데
빛이 세상을 밝히지만
그림자 속에서만 사랑은 피어난다.
죽음이 이별을 표시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죽음마저 사랑한다.
서로 다른 길을 떠나는 남녀
가슴속에 그린 진달래 눈물에 번져가네
3부 - 변(變)
북녘 추위 속에 진 진달래꽃
잃어버린 땅 가득 향기를 남기고
잃은 땅을 찾았지만
잊은 땅에 붙잡혀 울먹이네
변화가 두려워 벗지 못하는 관습
변해진 것들의 어색함에 뒤돌기만 바쁘다.
상처를 가진 이들은 서로를 위로하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기에 더 급급한데
과거는 미래에게 숙제를 전달하고
미래는 과거에게 미련을 새기려 한다.
4부 - 사이
잊어버린 꿈과 잊혀진 꿈의 사이에서
가슴은 희망과 절망의 온도를 춤춘다
날아가고 싶은 열망은
부러진 날개를 망각하게 하고
이루진 못한 꿈과 소망은
다음 세대에게 소리없이 전해진다.
자유의 날개는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느껴지는 것을 모르는 수는 없다.
버려진 땅에도 봄은 온다면
기억된 땅에는 봄이 올 것이다.
겨울이 도망간 자리에는 봄은 이끌려 오지만
겨울의 온도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5부 - 향로(香路)
땅 위에 서사라는 이름으로 꽃이 피고 지는데
꽃이 만개하는 순간을 바라며 세상을 기다리지만
피는 순간 바로 지는 꽃을 막지 못한다.
지는 꽃이 미워 꽃을 꺾을 수 있지만
그 꽃이 땅 속에 스며는 드는 향기를 막을 수 없다
처연하고 은은한 향은 새로운 꽃의 햇살이 되어
꽃내음이 들리는 길을 채운다.
생명이 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2-201
낙화의 처절한 자태는 한결 아름다운 법이니라
2-330
이리떼 속에 스스로 몸을 살라버리느나,
그것은 물론 모든 사태가 비판적이라는데 대한 절망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3-271
눈이 있어도 코를 베가는 세상이야
3-277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늙음과 젊음의 차별없이
슬픔도 하나, 바람도 하나다.
망자의 극락왕생은 바람이요,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연의 슬픔이다.
4-103
아픔이나 원한이나 그리움이나
인간사에서 그 모든 생각보다 더 깊고 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허무 아니옵니까?
4-283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끝이 없고 가이 없는 것이라면 없을 것이다.
근원의 생명도 항구불멸이라면 근원의 생명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영원한 것이 어둠 속, 잠든 이 시각에도 쉬지 않고 숨을 쉬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저 하늘의 별도 숨을 쉬고 있고
거적으로 둘러진 움막 속에 잠든 사람들도 숨을 쉬고
날개를 접은 가냘픈 벌레들도 숨을 쉬고
한 뿌리 풀잎, 한 줌의 흙까지 영겁의 위대하고
묵중한 시간을 호흡하며 더불어 가고 있을 뿐이란 말인가.
영겁으로 흘러가버린, 아니 지금도 흐르고 있을 그 숱한 사람들,
세월과 팔짱을 끼고 가던 사람들,
마음 바닥을 구르며 지신을 밟던 사람들,
그들은 과연 죽은 사람들일까?
5-68
'저 노을빛으로 적탱을 그렸음 좋겠지?'
'스님, 저것은 빛깔이 아니옵니다.'
'빛깔이 아니다?'
'예, 구름이요 하늘이요. 강물, 어찌 빛깔이겠습니까.'
'하하핫....... 하하하핫...... 너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네 말이 옳구나.
그렇지 어찌 저 빛깔이 인간의 것이겠느냐.'
5-69
어릴 적에는 나는 그것을 크나큰 은혜로 알았지요.
그러나 그건 정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정 말입니다.
상전이 하인에게 베푸는 은혜,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 어른은 웃으신 일이 없었지만 웃음보다 더 정을 느끼게 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 어른 눈에는 자기 자신을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빛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슬퍼할 줄 모르고 불쌍하게 생각는 마음이 없이 어찌 남을 위해 슬퍼하겠습니까.
배고파본 사람만이 배고픈 것을 알듯이 말입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알듯이 말입니다.
5-398
음성은 진달래 꽃잎이 되고 꽃송이가 되고 - 그 꽃을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을 드리고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 밤길 가는 노새의 요령같이 멀어져간다.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핏빛같은 붉은 비가 내린다.
칠흑같은 검은 비가 내린다. 주걱주걱 내린다.
6-377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하고 묻더군. 허허헛.....
악의에 차서 한 말이었지. 나는 백성이라 하기는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고
굳이 말하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말했을까? 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니 군왕이면 군왕 백성이면 백성이지 산천은 무슨 놈의 산천인지,
결국 땅덩어리 얘기겠는데 사람 없는 땅에 무슨 뜻이 있을까?..
7-337
나무 위에 실린 눈이 바람따라 날아내리고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빛과 그늘을 부각하듯.....
사방은 태곳적 같은 침묵이 쌓여진다.
8-236
생과 사 그 틈바구니의 빛깔이란 참으로 미묘하다.
시신은 아직 방에 있고 땅속에 묻히는 그동안 숨막히는 그 시간을
사람들은 고인과 그리고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얘기로 하여 숨구멍을 트고 있는 것이다.
슬픔이 덜한 사람은 그것으로 보충하는 마음, 슬픔이 깊은 사람은 그것으로 위로받고.
8-249
걸레같이 낡은 잿빛 판자 울타리며 무너진 돌담에도 황혼은 아름답다.
그러나 거짓이다. 홍이는 피뚝 그런 생각을 한다.
죽음의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도랑의 물이 황혼에 물들어 보이는 것은 시간이며,
시간은 머물러주지 않는 거짓말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송두리째, 모든 것은 거짓이요. 진실 아닌 것만 같다.
죽음도 삶도 비참한 건데, 비참하고 말고
(... 중략 ...)
그것들도 진실과 망각 사이를 방황하는 것,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여전히 비참하고 추악하고 치욕스럽다.
9-290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저 창공을 나는 외로운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란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13-43
현실은 언제나 강자였고 이상은 패배자이지 않았습니까.
현실은 숫자이지만 이상은 항상 연기였습니다.
(... 중략...)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질수록 추악해지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나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 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다.
13-459
아까 너는 절룩거리며 모이를 찾아 헤매는 비둘기 얘기를 했다.
그 외로운 비둘기와는 달리 개미나 벌은 집단으로 살아가면서 그들 나름의 엄한 규율을 지킨다.
사람의 경우 그 모든 생명들이 있는 모양을 다 수용하고도 그 이상 천태만변이다.
해서 끊임없이 강들하며 공존하다. 모순이기 때문에 갈등하고 상용할 수 없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금수나 미물과 달리 생존이나 종족보존 아닌 것으로도 죽음을 걸고 싸운다.
감정으로 달려들려 하지 말아라.
어리석은 짓이며 결국엔 자기 자신조차 책임질 수 없는 그런 지겨엥 빠지게 된다.
생각은 끝이 없는게야.
14-181
언어란 생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사물과 생각은 끝이 없는 거니까.
언어란 늘 빈곤하게 마련이에요.
14-375
꿈은 달콤하고 소망은 치열하다.
꿈은 구름이고 소망은 바위이다.
꿈은 잊어버리는 것, 소망은 가슴속에 맺혀 있는 것.
14-423
달콤한 꿈이 없어서 인정 안 하려는 자네와
달콤한 꿈을 꾸지는 않으나 목숨을 거는 사람.
그 차이점 때문이다.
16 - 69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 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17-23
당신은 저에게 처음이며 마지막 사람이었어요.
당신을 잊은 것은 의지였지 감정은 아니지 않아요.
17-182
"당신네들 심장은 무쇠로 만들어진 거요?
그러고도 어찌 나라를 잃었는가 이해할 수 없소!"
"나라를 잃었기 때문에 그리 됐겠지요."
17-185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과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하는 사람,
어느 쪽이 고통이 컸을까?
17-186
망각이란 이와 같이 비정한 것이었던가
그러면 나는 형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자신을 살리기 위한 이기적 동물에 불과한 것인가
17-194
불구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했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물(物)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20-116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라고 한다. 어찌 인간만이겠는가.
무릇 모든 생명에는 모두 습성이 있게 마련이다. 제각기 독특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는 선악으로 구분 짓고 도덕이라는 균형을 정하는 이성이 있으며 영성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있다.
그것이 다른 생명들과 다른 점이다.
그러니 선악의 기준이 없는 다른 생명들은 본성을 감출 필요도, 본성을 간파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허위가 없는 것이다.
20-143
살기로는 모두가 각각이지만 성공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그것은 덧없는 소망일 뿐입니다.
20-210
동천(冬天), 구름 한 점이 없다. 가슴이 쓰라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보다 강하게 그리고 서글프게 느낀다.
이 정도나마 그 젊은 날의 아픔이 엷어졌다는데 대한 서글픔이었다.
20-215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 수도 없을 것고,
불행이다 행복이다 하는 그 말도 실상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우리들 운명,
행복 불행이 검정 과자 빨간 과자처럼 틀에다 찍어내는 것도 아니겠고,
운명 앞에 무력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러나 운명을 정복한 사람은 없어.
자신이라는 말같이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노인을 보아. 그 경력이 화려한 노인일수록,
살아 있다는 것이 무언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결국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거야.
삶이란 덫에 걸린 짐승 같은 것,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께 같은 것
20-349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20-416 (마지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