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르크 드루앵(Jean - Marc Drouin)의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은 식물학자의 철학 관련 언급과 철학자의 식물학 관련 언급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스웨덴의 박물학자인 린네(Carl von Linne: 1707 - 1778)의 ‘식물철학’에 나온다는 식물철학자와 식물학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저자에 의하면 식물철학자는 식물학자에 비해 이론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린네는 식물학을 법칙과 규칙에 기초한 학문으로 보았으며 이 법칙과 규칙을 이끌어내는 것을 식물철학자의 임무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린네는 동식물을 속명과 종명의 두 개의 명칭으로 고정하는 이명법을 확립시킨 사람으로 식물학에 많은 관심을 보인 의사이다. 박물학(博物學)은 넓은 의미로는 동물, 식물, 광물 등 자연물의 종류, 성질, 분포, 생태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좁게는 동물학, 식물학, 광물학, 지질학을 총칭한다.

 

식물이란 세포벽이 있고 독립 영양 생활을 하며 광합성을 할 수 있는 생물이다. (저자는 다른 과학 분야와는 대조적으로 식물은 문외한도 선명하게 지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버섯은 식물에 속했다가 최근에 제외되었다. 식물의 기준을 광합성 여부로 본다면 과거에 버섯이 식물로 분류된 것은 어떤 기준에서일까 궁금하다. 식물의 분류가 학문적 체계를 갖춘 것은 린네에 의해서이다.(린네의 분류법은 꽃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생식기관 즉 수술과 암술의 수와 배치에 근거한 것이다: 72 페이지) 저자는 철학과 과학이라는 용어가 시대마다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엄격히 구분하기란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36 페이지) 분류의 어려움 또는 영역의 겹침을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저자는 식물학과 철학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도 한 덩어리로 합쳐져 있지도 않은 것이라 말한다.(50 페이지)

 

식물학사의 윤곽이라는 章에서는 식물학의 출발점이 논의되었다. 식물도감(Herbarium)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루카 기니(Luca Ghini:1490 -1556)라는 이탈리아의 의사겸 식물학자이다. 한편 계몽주의(Age of Enlightenment: 18세기) 시대는 탐험 여행이나 학술 탐사의 시대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이라는 책 제목으로부터 독자들은 정원(庭園), 꽃, 꽃말, 초록, 광합성 등의 단어를 연상하겠지만 이 책은 식물학의 역사와 철학자들의 식물관(植物觀), 분류, 연구, 명명(命名) 등에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은 흥미 위주의 책은 아니지만 부겐빌리아(Bougainvillea)라는 꽃 이름이 프랑스의 해군 제독이었던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Louis Antoine de Bougainville: 1729 - 1811)과 관계있다는 사실, 루돌프 야코프 카메라리우스라는 사람이 꽃의 성(性)을 실험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물론 세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로버트 훅, 세포핵을 발견한 로버트 브라운(브라운 운동으로 유명한), 삼투현상을 밝혀낸 앙리 뒤트로셰, 니코틴이라는 성분의 기원이 된 장 니코 등이 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다. 지방명(地方名) 우선을 주창(主唱)했던 아당송(Michel Adanson: 1727 - 1806)의 이름이 바오밥나무의 린네식 명칭(Adansonia)으로 남겨진 것도 흥미롭다. 아당송은 프랑스의 식물학자로 아프리카 생물 연구의 선구자이며 바오밥나무의 보고자(報告者)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에서부터 호메오 유전자(Homeogene)에 대한 규명에 이르기까지 분자생물학의 역사와 함께 한 주요 주제들은 동물학자만큼이나 식물학자와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95 페이지) 저자는 분자생물학이 반드시 개체주의적 철학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생태학이 개체주의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다.(9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식물학은 변함 없이 철학자들의 사유의 대상이다.(101 페이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는 식물학에 상당한 조예(造詣)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그는 명명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린네는 제2의 아담에 비유되었는데 이는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었다는 성경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린네의 제2의 아담 명명은 린네가 선조들이 붙인 명칭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쓰인 반어적 표현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는 명명법에 숨은 대립을 드러내주는 단서이다: 137 페이지)

 

네 번째 章인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사이는 자웅분류법과 자연분류법의 대립을 보여준 章이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에는 철학자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 중에는 ‘말과 사물’의 저자인 미셸 푸코도 있다.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린네의 분류법을 언급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꽃과 열매는 공존할 수 없어 서로 배척하는 형태를 띠지만 시간상으로는 유기적 조화를 이룬다는 저자의 분석 역시 흥미롭다. 부자연스럽게 재배한 식물(관상 목적으로 인위적 조작을 가한 식물)을 변질된 것이라 보고 배척한 루소의 사상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리라.

 

다윈은 꽃이 아름다운 것은 초록색의 잎과 대조를 이룸으로써 곤충이 쉽게 알아볼 수 있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그의 열렬한 지지자인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다윈의 이론은 목적론이 아니라고 말했다. 제 6章 진화에 사로잡힌 식물학에 의하면 획득형질의 유전은 동물에 대해서는 인정되지 않으며 식물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만 인정된다. 이 章은 진화론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은 식물에 대한 지식 뿐 아니라 식물 연구에 대한 철학적 배경, 식물 연구의 역사, 관련 지식인들 사이의 계보 내지 관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식물지리학의 시간은 환경의 물리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생리학적 리듬을 가진 짧은 시간도 그렇지만 인간 사회의 역사가 지속된 시간과 대홍수 같은 재난이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변화로 채워진 오랜 지질학적 시간과도 관계있”(268 페이지)다는 저자의 말은 식물과 진화 등에 관한 진실을 드러낸 간결하고 시적인 표현이다. 생명을 엔트로피의 사선(斜線)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으로 본 베르그송의 정의(定議)를 물질이 타고 내려온 경사(傾斜)를 다시 타고 올라 가려는 노력이라고 본 저자의 시각은 다소 의아하다. 한편 철학자 루소는 식물학 공부를 통해 정신의 위기를 극복했다고 전해진다.(285 페이지)

 

식물에 대해 적용되는 개체라는 개념은 사람이나 동물에 적용될 때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한다.(298 페이지) 동물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개체를 죽이는 것이지만 식물을 나누는 것은 식물의 수를 늘리는 것이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식물이 면역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은 특이하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식물이 자타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299 페이지) 저자 장 마르크 드루앵은 철학 및 과학사 교수로 식물학과 생태학의 역사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 종(種)과 유(類) 등을 다룬 흑고니와 늘 푸른 나무라는 章은 그의 이력이 여실히 드러난 章이다.

 

저자는 맺는 글에서 루소가 표본을 두고 식물채집의 기억 외에 식물학 책에서 읽은 내용도 떠올렸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앙드레 말로(Andre Marlaux: 1901 - 1976)의 상상의 박물관(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류가 남긴 방대한 예술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사유할 수 있는 상상 속의 박물관)을 본보기 삼아 상상의 식물도감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애기장대, 인도 보리수, 산쪽풀, 미모사, 앵초, 난초, 데이지, 유칼립투스, 금영화, 벚나무, 물미나리아재비, 겹꽃 장미,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 - 1898)의 “그 어떤 꽃다발에도 없는 꽃”까지...인도 보리수는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된 것이고 앵초는 다윈과 관련되었고 물미나리아재비는 라마르크가 서식 장소의 수심에 따라 잎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 것 때문이고 등등의 이유로 인해서이다. 말라르메의 “그 어떤 꽃다발에도 없는 꽃”은 언어의 창조적 기능을 지칭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나는 저자의 말을 듣고 시인 염명순님이 카페 아르뷔스뜨라는 시에서 말한 달개비꽃(늪지의 달개비꽃처럼 줄기를 누르면 진한 보라색 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은 저녁에 비가 잦은 지중해성 기후의 이끼낀 기억은 금세 웅덩이에 고이고...)을 생각했다. ‘철학자들의 식물도감’은 학문적이면서도 낭만성을 함께 지닌 멋진 책이다. 특히 장정이 멋스럽고 기품있다. 내용면에서도 장정(裝幀)면에서도 서재를 빛낼 좋은 책을 읽게 해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서순의‘유럽 문화사 4’는 우울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강화된 국가의 도덕, 정치적 검열과 탄압 등이 그것이다. 서순은 검열은 전통적인 권위주의 체제의 잔존물이 아니라 20세기 문화산업의 엄청난 팽창에 대한 국가의 대응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22 페이지) 그리고 현대시장의 승리는 쾌감 원리를 끌어안고 욕망의 만족을 편드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상의 능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장은 프로이트의 이드에 영합하고 국가는 슈퍼에고에 영합하는데 이드가 자주 승리를 거두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검열의 주 대상은 문학 작품이었는데 라디오와 영화는 인기 때문에 노골적인 국가 통제의 초점이 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소설의 정치화이다. 저자에 의하면 정치 소설 가운데 성공한 예는 조지 오웰의‘동물 농장’, 아서 쾨슬러의‘한낮의 어둠’, 빅토로 크라프첸코의‘나는 자유를 선택했다’등이다.

 

정치 소설은 결코 탐정 소설, 모험 소설, 서부 소설, 공포 소설, 연애 소설 등을 따르지 못했다. 특기할 것은 정부 권력과 음악의 관계이다. 저자도 말했듯 대부분의 음악에는 공공연한 정치적 의미가 전혀 없지만 작곡가가 자기 작품에 붙일 수 있는 제목은 예외였다.(64 페이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음악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표현하는 힘이 전혀 없다.”공산주의 체제마다 그들 나름의 국가 건설에 필요한 민족주의의 다양한 형태를 채택하는 바람에 방정식의 변수가 더욱 복잡해졌다.(72 페이지) 일반적으로 재즈는 혁신적이고 신나는 리듬, 미국의 인종주의에 대항한 흑인 민중의 투쟁의 표현으로 여겨질 수 있었지만 기성 음악계의 다수에게 경멸받았다. 나치는 재즈가 방송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없었는데 동독의 경우 미국 문화에 대한 쿼터제를 도입했다.

 

소련의 경우 책을 소중히 여기는 대중적 풍토는,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장차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 신분의 사다리를 올라가기를 비는 마음에서 책 위에서 탯줄을 자르는 풍습을 낳았는데 이는 물론 공산주의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생겨난 것이었다. 현실에서 문화 생산은 늘 해오던 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장보다 너무 앞서가지도 않고 너무 뒤처지지도 않게 속도를 조절하면서 나아가야 했는데 이는 바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문화와 공산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문화에 두루 해당하는 바였다.(78 페이지) 20세기에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같은 다민족 제국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함에 따라 민족주의 꾸러미에 보호무역주의가 추가되었다.(79 페이지) 저자는 100 퍼센트 정치적으로 올바른 책을 만들기가 아주 어렵다는 말을 한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은 대부분 둘 이상의 해석에 열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0 페이지)

 

‘‘유럽문화사’라는 제목의 책에 그간 문화사라는 단어는 별로 나오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문화사는 아이러니와 뜻하지 않은 결과로 가득하다.”는 말을 한다.(106 페이지) 많은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이 원래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일부는 미국에서 성공했고 그들 특유의 뚜렷한 현대적인 선은 미국에서 기업자본주의의 겉모습을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설립되어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존속한 예술 교육기관이다.‘유럽문화사 4’의 장점 중 하나는 전작들(1권 ~· 3권)과 마찬가지로 상식의 오류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치가 무엇을 억압하고 무엇을 선호했는지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지만 저자에 의하면 나치 정권은 제대로 가동하는 문화정책을 발전시킬 만큼 권력을 오래 잡지 못했다.(122 페이지) 나치즘 치하의 주류 문화는 다른 나라의 주류 문화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히틀러조차도 의식(儀式)이나 행진이 끝나면 조금은 인습적인 자신의 예술 취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은 사정이 달랐다. 나치는 구스타프 말러의 유대 혈통을 묵과하지 않았다. 루터교도였던 멘델스존도 마찬가지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협력했고 브루크너는 나치에 의해 브람스보다 더 선호되었지만 인기는 브람스가 항상 높았다. 베토벤은 거무스름한 피부로 인해 인종 혼합의 혐의를 받았고 바흐는 무사했으며 슈베르트는 나약하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 글을 읽으니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까지 고난을 겪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치는 모더니즘을 유대인과, 체제전복을 노리는 좌파들이 장려한 예술이라고 생각했다.(129 페이지) 나치는 영화의 주 목적이 현실도피라고 보고 그런 영화들을 장려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이 육아법을 개척한 사람이 이탈리아인인 마리아 몬테소리였다면 육아에 관한 텍스트라는 관념의 진정한 세계화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벤저민 스폭 박사의‘육아 상식’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미국인들은 사회과학 연구의 대중화를 선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을 겨냥한 시장을 만들어냈다.(151 페이지)

 

미국의 근대성은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개인을 위한 무한한 기회라는 관념을 공표했고 한편으로는 개인이 운명으로 정해진 궤도에 묶여 있다는 견해를 조장했기 때문이다.(153 페이지) 아도르노, 마르쿠제,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등의 몇몇 좌파 지식인들은 대중문화를 극단적으로 비난했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계몽의 변증법’에서 영화와 라디오는 예술인 척 행세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을 했다. 루이 아라공이 아도르노를 비롯해 재즈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모든 지식인에 맞섰다. 아도르노는 재즈로부터 강한 사도 - 매저키즘적 요소를 발견했다.(유진 런 지음‘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304 페이지) 영화는 폭발적인 영향력 때문에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언급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화들은 표현주의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은 실제로 그리 타당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195 페이지)

 

표현주의 영화란 은막에 묘사된 현실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주체에게 보이는 세계를 가리킨다는 뜻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치가 독일 영화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주목할 만한 영화계 인사들을 대거 몰아냄으로써 미국 영화 산업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사실이다.(208 페이지) 소리의 도입은 영화에서 일어난 모든 기술혁신 가운데 가장 현저한 혁신이었다.‘재즈 싱어’는 최초의 유성영화였다. 유성영화의 등장과 맞물려 민족주의와 보호주의의 시기가 찾아와 미국 영화의 수출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215 페이지) 프랑스의 경우 모든 자국 영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마르셀 카르네의‘천국의 아이들’은 파리가 해방되고 난 뒤 한참이 지나 1945년 3월에야 개봉되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점령기 파리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는 뚜렷한 정치적 메시지가 없는 영화로 정치 스펙트럼의 어느 색깔에 서 있는 이들에게나 찬사를 받았다. 영화를 나치에 맞서는 프랑스 문화의 독특함에 대한 찬양으로도, 그냥 단순한 프랑스 문화에 대한 찬양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32 페이지)

 

이탈리아 영화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무방비 도시’는‘천국의 아이들’과 달리 명백히 정치적인 영화였음에도 그 주제가 나치의 점령에 대한 저항이었기에 공동의 적인 나치에 맞서는, 공산주의자와 카톨릭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인의 국민적 합의를 대표하고자 했다. 미국인들은 굵직한 예술영화의 제작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손 웰스가 감독하고 혁신적인 위대한 촬영기사인 그레그 톨런드가 촬영한‘시민 케인’은 줄곧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 목록의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같은 감독의‘위대한 앰버슨가’도 마찬가지이다.(260 페이지) 소설과 신문의 최다판매 기록이 영화 관객이 가장 많은 축에 드는 나라들에서 달성되었다.(267 페이지) 영화가 책을, 책이 영화를 먹여살린 것이다. 1930년대에 현대적 의미의 최초의 페이퍼백이 나왔다. 영국의 앨런 레인의 펭귄 출판사가 이미 성공을 거둔 소설과 전기를 다시 찍은 최초의 페이퍼백 책들을 들고 나왔는데 가격이 6펜스였다는 사실이 상징적(?)이다. 서머셋 몸의‘달과 6펜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상이나 사건에 관해 알찬 정보가 필요했지만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공중(公衆)과 학생들은 사르트르의 방대한 책이나 마르크스의‘자본’등을 읽지 않고도 그 관련 내용들을 알려 했던 사람들이다. 앙리 르페브르의‘마르크스주의’는 5만부가 팔렸고 폴 풀키에의‘실존주의’는 11만부가 팔렸다. 책의 장르를 규정하는 일은 흔히 학문적인 작업으로 여겨지지만 독자와 판매자에게는 명료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효과적인 분류법이었다. 판매 목적이 그것이다. 하나의 장르를 규정하는 일은 분명치 않다. 여담(餘談)이지만 푸코의‘광기의 역사’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을 때 이성(理性)이 저지른 소름끼치는 폭력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인해 서점의 SF 코너에 꽂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이정우 지음‘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참조) 과학 소설의 한 장르인 SF 소설 작가들의 압도적 다수는 H. G(Herbert George) 웰스(1866 - 1946)가 선구적으로 보여준 침략 편집증 양식 안에서 글을 썼고 여기에 옛 탐험소설의 느낌을 덧붙여 인류, 특히 백인종, 그중에서도 미국 백인종의 우월성을 찬양했다.(304, 305 페이지)

 

물론 SF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작가 웰스는 현대소설, 역사, 정치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생물학을 전공한 웰스는 다윈 진화론의 영향 안에서 사유했다. SF는 저가용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표지도 요란스러웠지만 전형적인 독자들은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과학과 기술에 진짜로 관심이 많은 학생이나 청년이었다.(307 페이지) 한편 나도 읽은‘스타메이커’의 저자인 올라프 스테이플던은 리버풀 대학의 철학 강사였다. S. F 작가 중 하나인 C. S 루이스는 기독교 신학 책들을 많이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RCA 빅터社의 상표로 쓰인‘주인의 목소리’는 원래 영국 화가인 프랜시스 바로의 그림으로, 화가의 죽은 형 마크의 개 니퍼가 주인의 목소리가 녹음된 음반에 유독 관심을 보인 데에 착안한 것이다.(415 페이지) 본문에 실린 사진들 중 인상적인 것은‘주인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듀크 앨링턴의 사진이 그것인데 그는 세련된 작곡과 편곡으로 재즈를 백인에게도 호소력을 지닌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423 페이지)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사진도 그렇다. 물론 사진만이 아니라 그가 열세 살 때인 바르셀로나의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필사본 악보를 구입해 12년간 날마다 연습과 연구를 거듭했고 그 후로도 일과(officium?)처럼 이 곡을 연습한 뒤 예순 살이 되어서야 녹음을 시작했다는 내용도 그렇다.(435 페이지) 방송은 처음 등장했을 때 국가간의 경계를 허물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미래학자들이 국민국가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는 가운데 방송은 오히려 20세기의 형태로 도서 출판이나 영화보다도 훨씬 더 국민국가를 강화했다.(471 페이지)“통제가 가장 심한 사회에서도 외국 책을 사고 외국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었지만, 이제 국민 대다수는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국가가 통제하는 수신장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는 저자의 문장(‘유럽 문화사 4’의 마지막 문장)은 왠지 SETI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외계에서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천문학자들을 연상시킨다.‘유럽 문화사 4’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은 아동 상담 전문가인 김성은님이 제시한 솔루션 북이다. 요즘은 아이들도 부모들도 해야 할 것, 신경 쓸 것, 지켜야 할 것들이 참 많다. 아이와 부모가 쓴 일기에 드러난 문제점들을 찾아내 그에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상담 심리학자인 저자의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의 구성은 일반적인 책들과는 구별된다. 아이와 부모가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공부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요즘의 특성인데 책을 읽거나 전문가들의 상담을 받는 것 등이 그런 점을 말해준다 하겠다.(115, 259 페이지를 보라.)

 

저자는 아이에게는 공부만이 아니라 부모와의 친밀한 관계, 행복, 사회적 관계, 인지 자극 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책에서 다루어진 전 항목(공부, 친구, 품성, 생활태도, 사춘기, 중독, 가족)들에 고루 적용될 말이다. 지난 4월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를 힘들게 하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와 교육 과정의 문제점들을 지적한 ‘교과서를 믿지 마라’를 읽고 문제의식에 공감했었는데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은 교육 뿐 아니라 초등학교 학생들의 전반적인 면모를 알게 해주는 종합 교과서여서 공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본문에 소개된 아이들의 일기는 대체로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마음을 잘 표현한 듯 싶다. 학부모들은 솔직함 속에 무책임함과 강경 일변도의 교육 방침 등 바람직스럽지 못한 모습들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기를 통해 아이들은 일과성으로 그칠 면도 보였지만 미래의 모습을 예상하게 하는 중요한 면도 보였다.(사례자 중에는 엄마가 계모일 것이라 쓴 아이도 있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그 어느 관계보다도 중요한데 이는 학습도 사람과의 관계 형성이 잘 되어야 효과가 있다는 저자의 말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아이에게 부모와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사람과의 관계란 곧 부모와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지 못한 아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외모에만 신경 쓰는 민희편에서는 부모의 관심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집착한다는 저자의 말이 나온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것들과 맥락이 같다.

 

나는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을 읽고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이나 책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에게는 의도가 좋아도 방법이 잘못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자세도 필요하고 아이 - 아이는 어른이 아닌 성장 중인 사람이다 - 를 수준에 맞게 대하되 보호해야 할 때와 지켜 보아야 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억압적인 부모도 그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에 의해 형성된 인격을 가진다는 점은 중요하다.)

 

긍정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것도, 아이를 의욕만 앞세워 잘 키우려만 하는 것도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어느 철학자는 고백(告白)이 말이 주는 결백한 인상과는 달리 지극히 기술적인 문제 -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안되고 효과적인 방법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 라고 했는데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을 읽고 아이 양육이야말로 지극히 기술적인 문제라 생각하게 되었다.(특히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라는 병진이의 사례를 보라: 136 - 151 페이지)

 

저자의 조언 중 인상적인 것은 물질이나 돈에 대한 통제력은 가르침이 아니라 채움이라는 말이다. 아이는 물건을 사거나 갖는 것을 통해서 엄마, 아빠와 친밀감이 부족하다는 신호를 보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이런 예리한 통찰은 아이의 우울과 어른의 우울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이의 우울은 어른의 눈으로 보면 게을러 보이고, 느리고, 멍하게 있고, 딴 짓을 하고 집중을 잘못해 불성실해 보인다고 한다.(189 페이지)

 

아이들이 많이 쓴 단어들 가운데 짜증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아이들의 일기에 냅다(96 페이지), 고깝게(211 페이지) 등 잘 쓸 법하지 않은 단어들이 보이는 것도 특이하다. 진수의 일기(213 페이지)에 나왔듯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그렇구나” 라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부모들을 보면 불치하문(不恥下聞)이라는 말을 만들어서라도 들려주고 싶다. 반드시 권위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대화에 서툰 어설픔이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모들이 사춘기 아이들이 내뱉은 말들 때문에 서운해 하고 가슴 앓이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저자는 이를 호르몬의 변화에 따른 감정반응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다. 저자의 시각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가 게임을 해서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분노가 게임을 통해 폭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진단(261 페이지)을 보라.

 

일곱 가지 항목들 중 가족 문제가 가장 나중에 배치된 것은 가족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일까? 새 엄마나 새 아빠로 인한 갈등과 관계 설정의 어려움, 형제간 갈등 등등 가족은 모든 갈등의 출발점이자 해결의 원점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공부, 친구, 품성, 생활태도, 사춘기, 중독 등 가족이라는 항목 이전의 여섯 항목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해결되거나 증폭되는 데에는 가족간 특히 부모와 아이, 아빠와 엄마의 대화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말을 듣고 인정하기, 내면의 결핍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야말로 순조롭고 평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부모 자신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327 페이지)는 저자의 말은 인상적이다. ‘엄마는 모르는 내 아이 속마음’은 특색 있는 좋은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부모에 대한 것만이 아닌 아이에 대한 쓴소리(솔루션)도 함께 다루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저자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