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교수의 <내 머리로 이해하는 E=mc²>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E=mc²라는 수식이 도출되는 과정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지 5년 정도 되었다. 하지만 내 이해(理解)가 제대로 된 것인지 자신하기 어렵다. 이는 <이분법을 넘어서>란 책을 읽은 이래 더 짙게 하게 된 생각이다. 저자인 장회익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우리가 어떻게 해서 사물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지 그 내적 과정을 당사자 스스로도 잘 알기 어려워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89 페이지)

 

E=mc²에 대해 책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에너지를 함유한 모든 대상은 이 등식으로 표시된 만큼의 질량을 가진다는 이야기”라는 말을 하고 있다. 예컨대 ‘물을 담은 주전자를 가열하여 100J에 해당하는 열에너지를 가하면 그 주전자의 질량은 100J/c²에 해당하는 만큼 증가하지만 c의 값이 너무 커서 그 질량 증가분은 실제로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거운 원자핵이 붕괴하면서 그 안에 갇혀 있던 막대한 핵에너지가 방출될 경우 붕괴한 핵부스러기들의 질량을 모두 합한 값이 처음 원자핵의 질량보다 작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차이가 바로 방출된 에너지의 질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명은 그리 쉽지도 않고 만족스럽지도 못하다. 다만 태양의 핵융합 반응과 비교할 때 수소 원자핵 네 개의 질량보다 헬륨 원자핵 질량이 약간 작기에 빛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이런 이유로 그것이 에너지 질량 등가이론이라 불리는 것과 배경이 같음을 알 수 있다.

 

오래 전 <진공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다가 처음으로(?)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차이를 실감했었는데 그런 낭패감은 장회익교수가 설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구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이분법을 넘어서>가 내 독서에 획기적 전환이 될 수 있지만 그간 내가 이해한 것이 어설프거나 피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가슴 아프다...

 

하이젠베르크는 '위치를 잴 때 위치를 재는 장치가 대상에 영향을 줘서 운동량을 정확히 잴 수 없고, 운동량을 정확하게 재려고 하면, 그것이 또 대상에 영향을 줘서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언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118 페이지) 그런데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양자역학을 모르고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 말’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하이젠베르크가 동양의 <주역> 정도에 해당하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다가 데미우르고스 - 파라데이그마 - 코라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불확정성 이론을 고안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거나 그것을 전하는 것에 별 의미가 있을까 싶다. 아는 것이란 무엇인가, 회의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마간산격이지만 그래도 <이분법을 넘어서>를 다 읽어낸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분법을 넘어서>는 물리학자 장회익선생과, 물리학자 출신의 철학자 최종덕선생이 나눈 대화를 실은 통합적 사유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그런 류의 책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어 골랐지만 예상과 달리 결코 쉽지 않았다. 인상적인 대목도 많았고 낯설고 어려운 대목도 많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장회익선생 스스로 스피노자에 대한 앎 없이 공부한 내용이 스피노자와 궤를 같이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스피노자가 서로 독자적으로 생각을 했는데 결과가 거의 일치한다는 데서 희열을 느껴요.” (316 페이지) 위의 설명은 스피노자는 존재는 일원성을 지니지만 그 양태는 무한하다고 보았는데 그런 무한한 양태 중에서 인간에게 발현되는 것은 심신의 두 측면이라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한편 최종덕선생은 “물리학의 철학과 생물학의 철학은 탐구대상의 차이 뿐 아니라 느낌과 정서에서 많이 다른 것 같”(151 페이지)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론과 실천, 정신과 물질, 내적 성찰과 외적 참여, 관념과 실재는 물론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에서도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는 진자추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했다.(318 페이지) 내 경우 여러 자연과학 가운데에서 생물학과 물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 최종덕선생의 고백을 들으니 내 선택이 마치 무슨 깊은 존재론적 고뇌에 따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지난 번 이한음씨의 <호모 엑스페르투스>를 읽으며 “나는 여전히 생물학 책보다 물리학이나 천문학 책을 읽을 때 더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물학이 다루는 남녀간의 질투, 갈등, 외도, 번식 등의 주제와 파란만장의 인간사는 어김없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리학이 다루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차갑고 건조하고 색깔 없는 세계’에 많은 호의를 느낀다.

 

한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장회익선생은 자신의 주 이론인 온생명 이론에 대해 "저 역시 온생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란 말을 했다....이 부분은 앞에서 인용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사물을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지 그 내적 과정을 당사자 스스로도 잘 알기 어려워요.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란 말과 궤를 같이하는 글이다. 장회익선생의 <공부도둑>이란 책을 한번 더 읽고 <이분법을 넘어서>도 다시 한번 읽을 기회를 조만간 가져야 할텐데 밀린 책들 때문에 언제일지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1925 ~ 2006).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프랑스의 유명 작가인 로맹 가리, 알베르 카뮈 등과 교류했던 미국 작가이다. <보이는 어둠>은 바로 이 윌리엄 스타이런이 겪은 극심한 우울증에 대한 보고서이다. Wikipedia에 의하면 스타이런은 2006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990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우리 나라에 번역, 소개된 것은 2002년이다. 2002년은 작가가 살아 있던 때이니 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본에도 그의 사망에 대한 정보가 실릴 수 없었다. 스타이런이 66세 때인 1990년 출간된(<보이는 어둠>의 원서)은 정확하게는 1985년부터 몇 년 간 저자가 겪은 끔찍한 우울증을 리얼하게 그린 책이다.

 

스타이런은 우울증이 악화 일로를 치달을 때 우울증에 대한 일반적인 책은 물론 비중 있는 전문 서적들까지 닥치는 대로 읽어냈다.(본문 13, 18 페이지) 그런 그가 규정한 우울증은 ‘기분의 혼란 상태’(11 페이지)이며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운 심각한 질병’이다.(14 페이지) 그리고 정확한 묘사가 거의 불가능한 병(22 페이지)이며 원인과 증상과 치유가 너무 복잡다단한 병(42 페이지)이자 비정상적이고 불가사의한 화학작용과 행동, 유전적 요인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힌 병(47 페이지)이며 육체적 고통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다.(61 페이지)

 

저자에 따르면 우울증 치료 전문가들은 대체로 두 개의 파벌로 나뉜다. 심리 치료를 신봉하는 세력들과 약물 치료를 고수하려는 세력들이다.(15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이 바로 우울증의 설명 불가능한 성격과 치료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한다.(16 페이지) 우울증은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병이다.(21, 22 페이지) 우울증 치료 그룹이 두 부분으로 나뉜 것은 전문가들에 해당하는 사항이고, 우울증이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병이라는 규정은 일반인들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리얼한 우울증 경험을 책으로 낸 저자 역시 병을 앓기 전 카뮈와 로맹 가리 등의 우울증을 추상적이고 낯설게 느꼈을 뿐이라고 한다.(32 페이지) 이것이 우울증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한계일 것이다. 미국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울증을 약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재발률이 높은 반면 약과 심리요법을 병행한 사람은 재발률이 낮다고 한다. 이는 일본의 임상 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가 <불교가 좋다>에서 밝힌 바이다.(<불교가 좋다> 245 페이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기이다. 우울증 치료 그룹이 심리 치료 신봉자들과 약물 치료 고수파로 나뉜 것은 우울증의 설명 불가능한 성격과 치료의 난해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두 세력간의 다툼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와 교류했던 로맹 가리와 알베르 카뮈 역시 우울증을 앓았다. 차이가 있다면 로맹 가리는 권총 자살을 했고 알베르 카뮈는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카뮈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로맹 가리나 화학자 프리모 레비(<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등을 쓴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겸 화학자)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까, 하는 불경한 생각이 든다. 69세의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삶은 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고통도 이겨낸 그가 예순 아홉에 자살로 삶을 마감(40 페이지)한 것은 그대로 삶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만년(晩年)의 레비 역시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다. <보이는 어둠>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레비가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실족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죽음의 형태가 실족사가 아니라 자살이라면 과연 그를 자살로 내몬 정서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의 죽음이 허무주의 때문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저자의 주장 가운데 결코 잊을 수 없는 부분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람들을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말이다.(41 페이지)

 

저자가 자신의 내밀한 우울증 경험을 책으로 낸 것은 우울증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와 자살자들에 대한 비난을 두고 볼 수 없어서이다.(42 페이지) 외적 자극이 책 저술의 계기가 된 것이지만 이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은 현상이다. 스타이런의 책이 우울증에 대한 인식 지평을 넓힌 것은 사실이다. 지난 해 “~~씨 나 우울증 걸렸나봐.”란 이야기를 듣고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밝히기 난감한 우울증을 밝히는 것 역시 공감에 관한 문제이며 비밀을 다루는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놀라운 사실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一群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그랬듯 창작의 영감을 가져다 주는 원천으로 술을 애용했다.(50 페이지)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몸이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자 그에게 우울감이 엄습(51 페이지)했고 불안, 혼란, 조바심, 무력감, 공포 등과 함께 극심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그리고 리비도(性慾)가 사라졌고 목소리가 변질(58 페이지)되었으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면장애였다고 한다. 딜레마는 불면을 치료하는 약이 우울증을 초래한다는 점이다.(59 페이지) 이 악순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자는 이를 사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대목으로 꼽았다.) 윌리엄 스타이런이 원한 것은 (진부한) 상담 치료가 아니라 약물 치료였다.(64 페이지)

 

사실 극심한 육체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우울증을 심리 상담으로 치료하는 것은 결코 적절한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스타이런은 악화과정을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특이한 소수의 환자에 해당했다. 약물 치료나 심리 치료 모두 심연으로 추락하는 그를 붙잡아주지 못했다.) 저자로 하여금 숱한 정신적 장애의 근원이 유아 시절의 상실감이라고 긍정하게 한 것은 이른바 프로이트적 정신분석 시스템으로 보인다. 정신분석 역시 다양한 치료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저자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게슈탈트 심리학이나 로고테라피 등 정신분석과는 다른 방법이 적용된 치유 사례를 충분히 보고 싶다.)

 

“고통을 기록하는 기계: 뇌”(70 페이지), “절망을 넘어선 절망”(77 페이지) 등은 문인이 아니라면 쓸 수 없을 표현 같다. 그러나 자신을 “자기 살해자인 동시에 희생자. 고독한 배우인 동시에 외로운 관객”(78 페이지)이라 규정한 것만큼 의미심장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우울증의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한 것은 창작의 영감을 위해 애용하던 술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50 페이지) 그런데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예순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 창작 과정의 불만족 등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저자가 밝혔듯 어떤 사람에게 만병통치약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88 페이지)은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자살을 생각하며 입원을 거부하던 저자는 한 영화에서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는 일상의 가치들이야말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값진 것임을 깨닫고는 입원을 결심한다. 거기서 그는 7주의 시간을 보낸다. 저자는 어린 아이 시절 특정 종류의 상실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지 못할 경우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말을 한다.(97 페이지)

 

잘 알다시피 프로이트는 떠나버린 사랑을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그 대상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것을 애도라 규정했고, 떠나간 사랑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그를 자신의 안에서 합체함과 더불어 그 대상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 것을 우울증이라 했다. 즉 우울증이란 자아의 한가운데에 완전히 애도하지 못한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는 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어둠>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종교적이기까지 한 헌신이 필요하며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주위의 헌신은 결국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93 페이지) 그리고 우울증은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다.(102 페이지)

 

얇은 책이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 독후감 분량이 길어졌다. 브람스의 ‘알토 랩소디 부분’을 듣고 자살 생각을 접고 입원을 결심한 대목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을 공개한 것은 바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앞에서 나는 저자의 저술 동기를 우울증에 대한 일반의 몰이해와 자살자들에 대한 비난을 두고 볼 수 없어서라고 말했다. 둘 다 맞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과 희망을 느꼈다.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정우 교수의 최근 저작인‘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을 읽을 때 핵심적으로 참고해야 할 책은 푸코의‘말과 사물’과 ‘광기의 역사’이다.‘말과 사물’은 푸코의 저작들 가운데“푸코 철학의 이론적인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작”(이정우 번역‘담론의 질서’100 페이지)이다. 이정우 교수는 미셀 푸코 연구라는 부제가 달린 자신의 첫 저작인‘담론의 공간’에서‘말과 사물’을 서구 담론사들 중 인간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세 담론 즉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다루는 생물학, 노동하는 인간을 다루는 정치경제학, 말하는 인간을 다루는 언어학을 분석함으로써 주체의 문제를 분석한 책으로 규정했다.(90 페이지) 생명, 노동, 주체는 저자가 진리라 부른“실재의 귀환“(‘진보의 새로운 조건들’97 페이지)의 내용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저자에 의하면 실재(實在)는 기존 계열화의 그 어딘가에서 솟아오름으로써 그 계열화의 거짓됨을 단번에 폭로시키는 사건을 통해 귀환한다.(27 페이지)

 

계열화는 개별적인 듯 보이는 사건들로부터 관련성이나 유사성을 이끌어내 그것들을 의미있는 사건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저자에 의하면 계열은 현대 사상이 발굴해낸 가장 핵심적인 개념들 중 하나이다.(이정우 지음‘시뮬라크르의 시대’110 페이지) 계열화는 문학적 글쓰기와 연관된 개념이다. 문학적 글쓰기는 ”주체를 대상화하기보다 주체와 공감하고자”하며“역사의 사건들을 늘어놓기보다 그 사건들의 의미 연관성을 찾아내고자”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이다.(이정우 지음‘가로지르기’167 페이지) 저자는 진보는 ”실재의 귀환“으로 실재는 ”소수자들의 존재 = 생성“으로 정의(定義)한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29 페이지) 귀환은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귀환을 연상시키지만 실상은 생성(生成)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 아닌 차이를 동반한 반복이라는 들뢰즈적 의미를 지닌, 진보의 선험적 조건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29 페이지)

 

그럼 생명, 노동, 주체는 각각 어떻게 귀환하는가. 생명은 산업자본주의가 본격화한 이래 악덕 기업들, 전쟁에 광분한 정치가들과 군인들, 숱한 형태의 반(反) 환경적 행위들 및 장치들에 의해 침식되는 것으로부터 귀환한다. 노동은 관리사회가 화폐를 관리함으로써 길들이려 하는 것을 뚫고 귀환한다. 주체는 술어적 주체(”나는 ~ 이다.“)의 술어들에 의해 덮이는 위기를 딛고 결코 소진되지 않는 실재로서 귀환한다. 주체가 자기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방식은 술어들을 통한 확인이다. 하지만 주체는“나는 ~이다.”를 통해서가 아니라“나는 ~이/가 되고 있다.”를 통해서 성립한다. 이‘~’이 그물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그물코가 아니라 그 자체 생성해 가는 어떤 것일 때 주체란‘·되기’를 통해 살아가는 것이다.(이정우 지음‘주체란 무엇인가’33, 3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무수한 같은 - 것들로 이루어진다. 이때 시간의 의미가 이 같은 - 것들 사이사이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시간의 분절은 사건들을 통해 나타나기에 무수한 같은 - 것들은 반복되는 사건들인데 이 사건들 사이사이에 새로움이 끼어들 때 차이를 동반하는 반복이 성립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건들은 차이를 동반하는 사건들이다. 그런데 차이의 파열은 강도(强度)를 함축한다. 그렇기에 주체에게 차이는 강도로서 다가온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03 페이지) 차이를 말하는 저자는 물리적 반복과 역사적 반복을 대비시킨다. 물리적 반복이 빈약한 반복이라면 역사적 반복은 항상 어떤 차이를 동반하는 풍요롭고 복잡한 반복이라는 것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11 페이지) 하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 이상한 말인지 모르지만 저자의 표현들 가운데 층위(層位), 지위(地位) 등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층위는 어떤 유(類)의 언어 요소가 전체 언어 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하고 지위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에 따르는 위치나 자리, 어떤 사물이 차지하는 자리나 위치 등을 말한다. 층위나 지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자의 글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층위라는 말을 보자. 가령“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의 꿈이 이루어져 우주 방정식이 완성되었다 해도 지금 창 밖에 내리는 빗방울의 움직임 하나 포착하지 못한다. 인식론적 층위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이정우 지음‘인간의 얼굴’257 페이지)란 글은 진리에 값하는 참 아름다운 표현이다. 창 밖에 내리는 빗방울의 움직임이란 표현이 그 유명한 쇼팽의 Preludes in D♭Major Op.28-15(일명 빗방울 전주곡)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문장을 보며 나는 특정 작곡가의 곡을 한 연주자의 음반으로 반복해서 듣는 것은 물리적 반복에 가까울 것(물리적 반복은 아니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에게 빗방울 전주곡은 어떤 때는 처량함을 어떤 때는 간결함을 또 어떤 때는 설렘을 느끼게 한다. 굳이 이 곡만 이렇지는 않겠고(저자 역시‘님을 위한 행진곡’을 몇 년만에 그것도 뜻밖의 장소에서 듣고 새로운 감동을 느꼈음을 말했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04 페이지) 물리적 반복도 상황이나 마음, 그리고 관련된 추억 등에 따라 충분히 다채롭게 체험될 것이다. 반면 역사적 반복은 풍요롭지만 그 안에는 풍요로움을 무화시키는 고통이 들어있기 십상이다. 물론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건은 저자의 표현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게 하는 (권력의) 억압일 것이고 이는 역사에서 가장 높은 반복의 강도를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저자에게 구원은 아니 저자가 정의(定義)하는 구원은 역사적 사건을 반복할 때마다 차생(差生)을 동반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기다렸던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16 페이지)

 

역사적 반복과 물리적 반복을 대비시킨 저자의 글은 실재의 다채로움과 인식의 빈약함(과학이 제시하는 이론들은 체험되는 세계로부터 추상된 세계이다)을 말한 메를로 퐁티와, 모호한 현실과 심층적인 실재를 말한 바슐라르에 대한 대비로 이어진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20 페이지) 나는 물론 바슐라르의 입장에만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바슐라르의 입장에 더 공감한다. 이 더라는 표현은 각각 사물들에 대한 직접적 인식과 합리적 인식 중 후자의 우위를 인정한 스피노자의 사유를 잇는 것으로 평가받는 메를로 퐁티와 바슐라르 중 후자의 입장이 스피노자의 그것에 더 정확히 일치한다는 문장에 나오는 더와 맥락이 같다. 사건이 위와 같다면 진리와 장소는 어떤가. 저자에 의하면 공간은 사건들의 장(場)이 됨으로써 장소가 되며, 역사적 의미를 가질 때 장소로서 완성된다. 그리고 장소는 반복의 장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49 페이지)

 

그런데 사건은 장소와 맞물려 있는 것 못지않게 시간과 맞물려 있다. 사건 개념에는 행위 개념이 깃들며 이로써 주체, 윤리, 정치, 역사 등의 문제가 맞물려 들어가게 된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51 페이지) 중요한 것은 늘 기억/역사와 더불어 발생하는 형태사건이기에 우리의 주제인 장소에 형태학적 탐구를 연관시키는 것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53 페이지) 문제는 장소에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이라는 문제가 예민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66 페이지)“오늘날의 철학에는 타자라는 문제의식이 그 심장부에서 작동하고 있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82 페이지) 이는 우리가 낯섦/타자성이 시대를 감싸는 세상에서 살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자와 시간의 관계는 윤리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생성이란 기본적으로 타자 - 되기이기 때문이다.(저자에 의하면 한 시간 전의 나나 한 시간 후의 나는 모두 타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나를 타자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런 타자성들을 시간의 종합을 통해 극복하기 때문이다. 이때 생명은 기묘한 위상을 부여받는다.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도 차이생성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또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85 페이지) 놓칠 수 없는 것은 인간 - 전체에 대한 타자성과의 투쟁은 인간 - 내의 타자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때 차이 자체는 일종의 실체, 동일성을 갖춘 사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때 차이는 기존의 고착화한 동일성을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킬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차이는 두 동일성 사이에서 고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들의 내부에서, 각 존재 자체 내에서 시발(始發)되어야 하며 각 존재들 자체가 타자화되어 나갈 때에 진정한 차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스스로가 차이 - 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自)의 견고한 성(城)을 깨고 타(他)로 움직여 갈 때에만 변화도 창조도 가능하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89 페이지) 저자는 타자에 대한 배려는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즉 진정으로 윤리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내가 타자가 되려는 노력이 내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90 페이지) 이런 사례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은 동정(同情)은 측은지심의 발로로서 고래(古來)의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인정주의(人情主義)의 한계를 가지며 주관적으로는 상대방의 문제해결보다는 자기의 양심의 가책을 위무(慰撫)하려는 도피주의의 한계를 갖는다는 말을 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156 페이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는 선생의 글은 화룡점정으로 읽힌다. 저자는 타자가 되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타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철학적으로 이는 동일성을 전제하고 그 동일성이 서로 뒤바뀐다는 생각을 함축하기에 잘못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190 페이지) 물론 타자 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차이 개념의 또 하나의 맥락은 1968년 5월 혁명을 전후해 배태된 신좌파라는 새로운 정치사상의 맥락이다. 오늘날 현대의 고전으로 읽히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사상가들이 이 5월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 나는‘전복의 정치학’을 읽으며 저자인 네그리 역시 5월 혁명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네그리는 다중의 진원지이다.

 

현시대는 다원화 사회, 윤리 - 정치적으로는 타자들의 시대, 소수자들의 시대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은 서론에서 본문을 거쳐 보론(補論)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질서를 갖춘 책이다. 보론으로 다룬 내용은 미셸 푸코의 사유의 변환으로 저자가 한 '광기의 역사’출간 50주년 기념 강연을 기록한 글이다.‘광기의 역사’의 핵심 주제들인 타자, 장소, 주체는‘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의 주제의식과 겹친다. 타자에는 배제라는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은 결국 분절(分節)의 문제로 수렴된다. 배제의 물리적 표현은 장소이고 물질적 표현은 감금이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분절 체계에 대한 의문 제기로 수렴된다. 푸코가 초점을 맞춘 타자성은 주체의 내부성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외부성을 가리키며 주체성이란 이 외부성과의 관계를 통해 이해된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232 페이지) 푸코는 인간의 주체성을 시간이라는 요인을 매개해서 일정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푸코에게 근대는 새로운 방식의 주체화 양태가 만들어진 시대로 포착되었다.

 

근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과 19세기에 본격화한 지식이 결탁해 밀어붙인 훈육(訓育)이 신체가 아닌 정신을 겨냥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진보의 새로운 조건들’235 페이지)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저자의 말은 글쓰기는 역사적 구체성과 철학적 깊이와 문학적 맛이 어우러진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현재‘소수자 정치학’을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클레어 콜브룩은 들뢰즈, 가타리는 소수자 - 다수자라는 용어를 수적 측면이 아닌 집단화의 본성에 따라 정의했다는 말을 했다.(‘들뢰즈 이해하기’157 페이지) 저자는 지난 2006년 초에 나온 '탐독(耽讀)’에서‘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천 하나의 고원’,‘소수자 정치학’등을 쓰고 있다는 말을 했다.(‘탐독’에필로그 참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과‘천 하나의 고원’이 이미 나왔고‘소수자 정치학’의 출간이 예정된 시점에서‘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은 예정에 없었던 선물로 여겨진다. 저자는“들뢰즈를 읽으면서 소은(素隱)에게서 배운 플라톤 - 베르그송, 그후 나 나름대로 읽었던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포괄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큰 힘을 얻었다.”는 말을 했다.(‘탐독’356 페이지) 앞서‘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을 읽을 때 핵심적으로 참고해야 할 책은 푸코의‘말과 사물’과‘광기의 역사’라는 말을 했지만‘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의 핵심어가 차이임을 감안하면 들뢰즈의‘차이와 반복’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차이와 반복’은“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가 아닌 순수 차이를 발견하며 그러한 발견의 토대로서 존재의 일의성을 확립한”책이다. (‘탐독’358 페이지)

 

‘탐독’에서 저자는 앞서 말한 네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읽고 있는 책들을 언급했다. 이 글에서 저자가 소개한 책들은 저자 개인의 독서 목록을 넘어 현대 사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목록이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저자의 글은 첨단의 현대 사상의 지형도 이상이다. 저자 개인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남다른 사유의 틀을 거친 지형도이기 때문이다.‘소수자 정치학’이 나오기까지 나 역시 저자가 네 권의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책들을 읽었듯 가능한 한 많은 관련서들을 읽어야 한다. 물론 출간이 기다려지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관련서들을 읽기 위해 유예를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역사적 구체성과 철학적 깊이, 문학적 맛의 어우러짐! 이것이 내가‘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에서 느낀 바이고‘소수자 정치학’에서서 유의미한 차이로 구체화되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