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그대 인생의 절차 기억』은 저자 최승희의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오경자(국제PEN한국본부 부 이사장·평론가)
깊은 주제를 경쾌한 문장에 담아낸 수필
최승희의 수필은 발랄하고 당당한 것이 특징이다. 문장이 경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이도 저도 아닌 고민보다는 명쾌한 접근으로 사물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주제를 잘 담아내어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글쓰기의 기쁨과 슬픔 12

그대 인생의 ‘절차 기억’ 17

위대한 유산 22

무기여 잘 있거라 27

10월 31일, 별이 빛나는 밤에 32

나의 아들의 아들 38

어른의 과일 43

슈붕과 팥붕 사이 47



아줌마의 판타지 54

계란밥을 위한 변명 59

너의 생일에 63

그대 눈동자에 건배! 68

‘인싸’가 되는 법 74

그에게 담배 한 대를 허(許)하라 79

부엌데기 전성시대 84



아홉수 예찬 90

정신과 의사의 아내로 사는 법 95

생존과 굴복, 그 사이의 고통 101

여섯 살 인생 106

어느 ‘품속 아주머니’의 다짐 111

커피 미학 116

X세대의 올림픽 연대기 122


백작약 필 무렵 130

부부의 세계 135

인간에 대한 예의 140

어느 국민차를 위한 송사 145

내향인의 운동일지 150

극장 앞 단상(斷想) 157

어떤 감자칩에 대한 고찰 163

그대 인생의 ‘절차 기억’


무심히 틀어놓은 TV에서 흥미로운 뉴스가 흘러나온다. ‘절차 기억’이라는 생소한 용어와 그 효과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였다. 수영이나 운전처럼 한번 배워두면 평생 기억되면서 마치 몸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듯한 현상을 ‘절차 기억’이라 하며, 이를 잘 활용하면 좋은 습관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실험생리학 용어인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은 걷기, 계단 오르기, 골프 스윙, 스케이트 타기처럼 특정한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이 기억이 담당하는 작업은 굳이 생각하지 않고도 끄집어내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가까운 공원으로 자전거를 타고 갈 때, 공원으로 가는 길은 구체적으로 되살려 내야 한다. 그러나 자전거 타는 방법은 한 번이라도 익혔다면 절차 기억에 의해 수년이 흘렀다 해도 별다른 노력 없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절차 기억은 언어를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 ‘비서술 기억’이라고도 불린다. 길을 알려주는 것은 간단하지만, 자전거 타기를 말로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이유다. “부부 사이엔 절대 서로 운전 연수를 해주지 말라”는 말이 불문율처럼 전해져오는 것 역시, 운전은 말로 설명하기도, 말로 들은 내용을 직접 실행해내기도 힘든 ‘비서술 기억’이니 서로 답답해하다 싸우지 말라는 조언을 돌려 말한 것일 테다.

태어난 지 백일 즈음 처음 ‘뒤집기’에 성공한 이래, 기기-걷기-달리기-말하기를 거쳐 젓가락질과 수영이라는 절차기억까지 습득한 아들이 ‘자전거 타기’라는 새로운 과업에 첫 도전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 자전거 타기 정도는 마스터해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발자전거에 붙어 있던 보조바퀴를 떼어내고 호기롭게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한 것이다.

부자간의 자전거 타는 법 가르치기는 부부간의 운전 연수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자전거 타는 법 가르치라고 아빠와 아이를 내보내면, 신나서 의욕적으로 집을 나섰다가 보통 두 가지로 결론이 난다고 한다. 균형감각을 타고난 아이가 순식간에 요령을 터득하든지, 아니면 둘이 고군분투하다 아빠는 열 받고 애는 울면서 들어오든지. 내 아이의 천부적인 균형감각을 기대하며 역사적인 장면을 담겠다고 휴대폰은 내내 동영상 모드로 켜 놓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집 사정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뒤에서 잡아주던 아빠가 손을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혼자서 앞으로 쭉 전진해 나가는 ‘영화 같은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에나 일어나는 일이었고 우리의 현실은 냉혹했다. 2월의 늦겨울 추위가 한창이었지만 아이의 이마에선 구슬땀이 흘렀다. 어느새 겉옷의 지퍼를 내리고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기우뚱거리며 야속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보고 있는 우리 부부 역시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며, 속으로 도를 닦는 중이다. 균형 잡는 요령만 익히면 그다음부터는 수월할 텐데, 그 요령을 아직 터득하지 못한 아이는 어스름 해가 질 때까지 눈물겨운 헛발질만 계속할 뿐이었다. 기적 같은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고, 춥고 고된 기억만 남긴 채 시무룩하게 자전거를 끌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가족 모두에게 아픈 상처만 남긴 두발자전거는 그 후로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일 년여를 베란다에 방치되었다. 오다가다 눈에 밟히긴 했지만, 누구도 차마 자전거 타러 나가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새 학년으로 올라간 지 한 달쯤 지나, 한창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가 말끔히 걷힌 어느 화창한 주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남편이 “간만에 자전거나 타러 갈까?” 하고 제안해 왔다. 아들 녀석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의외로 별다른 구시렁거림 없이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나 역시 큰 기대 없이, ‘집에서 노느니 나간다’는 심정으로 두 부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이는 이날 처음으로 혼자 두발자전거를 타는 데 성공했다. 균형 감각도 나이가 차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 일 년 전의 도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한발은 페달에 올리고, 한발로 땅을 구르는 움직임은 신중하고 조심스럽다. 조마조마한 몇 번의 흔들림 끝에 어느새 아이는 그길로 쭉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어떤 예고도 없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그 순간을 촬영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고 온 아이의 그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표정은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 혼자 타는 거 봤지? 봤지?” 재차 확인하고는 본인의 모습을 촬영해달라며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한번 타기 시작하니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가속은 물론이요, 유려한 커브와 부드러운 제동까지 한 바퀴 한 바퀴 돌아올 때마다 자전거 타는 폼은 눈에 띄게 능숙해져 간다.

걸치고 있던 재킷은 벗어 던진 지 오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으며, 태어나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두 시간째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은 봄볕에 발갛게 달아올랐고, 온몸에서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자신감으로 빛나는 아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 역시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고 흡족하다.

오늘 아이가 몸으로 체득한 것은 비단 ‘자전거 타기’만이 아니리. 좌절, 집념, 끈기, 도전 그리고 성취와 환희. 오늘 경험한 이 모든 것들이 세월이 지나도 온몸으로 기억되는, 그대 인생의 값진 ‘절차 기억’으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