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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후남 『시간의 켜』는 크게 6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김열규(문학평론가, 부경대 석좌교수)
한후남 님은 신변기를 그녀 자신의 주체성이 실린 일인칭으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수필의 대도를 걷고 있다. 그 뻔한 것들이 주목의 대상, 관찰의 대상으로 홀연 부상하고 있다. 탐색하고 발굴하는가 하면 수탐해서는 천착하고 있다. 그 시각은 여간 꼼꼼하고 깐깐한 게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의미가 되고 환골탈태하게 된다. 한후남 님은 인간사회에서 겪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망라해서 여성의 한과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 통한의 씨앗들에서 무슨 꽃이 피어났는가를 면밀히 살펴내고 있다. 상흔과 회한이 승화하여 간 역정을 그 자취를 추적하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꽃들이 피어날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래서 한후남 님은 여성들의 텃밭을 위한 정원사요. 원예사(園藝師)구실을 이 수필집에서 해내고 있다.

1부 시간의 켜
시간의 켜 16
남편의 눈물 20
소나무 25
공작선인장 29
못다 운 울음 33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36
꼬맹이 음악회 43
할머니 47
세상구경 51
5월 단상(斷想) 55
엄마의 방 58
2부 5월의 데이트
자기공명의 터널을 지나며 64
직업 68
5월의 데이트 72
온돌방에 대한 향수 75
꿈에도 그리던 국민학교 78
거목, 문신(文信) 80
첫걸음 85
새벽을 여는 사람들 88
정식이의 노래 91
합창이 절실할 때 95
독서의 생활화를 97
3부 선사의 땅을 밟다
선사의 땅을 밟다 100
유월의 교정 104
유자차 만들기 106
들꽃소묘 110
이사 가는 사람 113
풀꽃과 큰 정성 117
집안일 119
세상에서 가장 절통한 이별 123
그 아리고 빛나던 시절 128
딸에게 쓰는 편지 132
꽃비가 내리던 날 135
4부 불꽃 삭이기
들꽃 부케 138
몸 141
죽비 세례를 받고 싶다 145
석곡(石斛) 149
죽음 2제(題) 152
특별한 결혼식 156
빈자리 158
셜리 발렌타인 161
음악회와 휴대폰 164
당고모 166
불꽃 삭이기 171
5부 그리운 단오절
버지니아와 만리장성 176
눈보라 181
그리운 단오절 184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186
봄앓이 190
꿈과 환상, 달리(Dali)전 194
회귀본능 196
사랑 빚기 201
화왕산, 불의 제전 205
섬 209
청소 잘하는 아이 213
6부 상생의 땅, 인도
상생(相生)의 땅, 인도 218
일본, 아직은 두려움이 앞서는 땅 236
앙코르 와트에도 해가 지고, 해가 뜨고 240
서평 김열규 - 傷痕과 悔恨과 그리고 昇華 243

남편의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주말 부부로 살고 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옷을 입은 채로 배설하는 시아버지 시중을 오로지 혼자 들고 있었다.
나의 친정어머니도 그랬었다. 아버님은 지방 근무를 하셨고 겨우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집에 오셨다. 집안에 할아버지 시중드는 열댓 살 먹은 처녀애가 있었으나 막상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배설물 뒤처리는 어머니 차지였다. 똥칠한 시아버지의 사타구니를 씻겨드리며 맏며느리는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었다. 중풍으로 쓰러지신 시아버지를 5년 넘게 간병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일이었다. 차라리 치매라도 걸려 의식이 혼미하다면 모를까, 할아버지는 또렷한 정신으로,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괴로워하셨다. 높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으로 평생을 꼿꼿하게 살아오신 어른이었다. 목욕을 시켜드리며 어머니는 간곡하게 기도 드렸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온 자존심을 더 이상 실추시키지 않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시는 일이라고….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2년 넘게 자리보존을 하다 돌아가셨다. 임종 때까지도 맑은 정신으로 머리맡의 손때 묻은 한시집(漢詩集)들을 두루 다 어루만져 보고 모여 앉은 자식들 손을 고루 잡아보며 눈을 감으셨다. 49재 내내 어머니는 속죄의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병구완에 꾀가 나서 그 어른의 자존심을 빌미 삼아 자신조차도 속였다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건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어머니의 참회의 눈물은 끝없이 흘러 내렸다. 그때의 어머니 연세가 지금의 내 나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시집(詩集) 속에 끈끈하게 배어있는 올곧은 여인의 몸부림이 어느덧 나의 발길을 낙동강 가로 이끌었다.
간밤에 뿌린 비에 흙이 촉촉해져 걸음마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다. 부곡 쪽으로 새로 놓인 다리가 낯설게 떠있다. 섬뜩한 푸른 칠이 잿빛으로 물든 들녘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강의 상류를 바라다본다. 저녁노을을 품은 겹겹의 능선이 내가 건너온 무수한 시간의 켜처럼 느껴졌다. 나직나직한 능선은 무난하게 넘어 왔을 평화로운 시간일 테고, 가파른 봉우리에서는 힘에 겨워 더러는 포기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참담했던 고비 고비의 기억으로 가슴속이 알알해져 온다. 남편과의 첫 만남, 헤어질 뻔했던 위기의 순간, 첫딸의 산고, 득남의 기쁨, 집 장만, 수필 등단, 남편의 승진과 이직 등등.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과 슬프고 아리던 시간이 씨줄 날줄로 짜여 오늘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물결이 헤집어놓은 무늬가 발밑에 현란하게 번져있다. 센 물굽이에서는 큰 굴곡을 남기고 잔 물살은 촘촘한 빗살무늬를 빚어놓았다.
나는 어떤 물살에 실려 이곳에 당도했을까. 과연 순간순간에 충실 했는가 뼈저린 자문을 해본다. 게으르고 소심하고 부정적인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내 체면치레를 한답시고 아이들 여린 마음에 상흔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타고난 내 옹졸함 때문에 정이 넘치는 남편을 혹여 허전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이 순간에도 내가 남긴 발자국들이 고스란히 쌓여 시간의 나이테를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