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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민 시인의 시세계는 삶의 여러 양태를 진솔한 마음으로 살피고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자연을 관조하며 시인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 드러난 또 다른 시적 경향은 생명을 갖고 있는 사물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이 사물의 본질을 잘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생명성에 대한 앙양을 시인은 생태학적 상상력을 통해 깊이 사색하고 있다.

|작품론|

삶의 방식 탐구와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상상력
- 김해민 시집 『나리꽃과 해바라기』


강 경 호
(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1.
오늘날 우리 지구촌은 갈등과 불화, 분노가 가득찬 세계이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로 인한 폐해로 수많은 자연의 종이 멸종되어가고 있어 탈근대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근대에 이르지 못한 시대에 김해민 시인은 참된 인간의 모습과 아름다운 자연의 진실을 노래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서정시가 씌어졌지만 인간은 여전히 미개와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시인들의 넋두리여서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서정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리워하며 삶의 본질을 묘파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김해민 시인의 첫시집 『나리꽃과 해바라기』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왜곡되고 모순된 인간의 그늘을 상쇄하는 정화기제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2.
인간이 뭇 생명체와 다른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다. 특히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물이 지닌 내면에 깃든 어떤 진실을 발견하는 예지를 지녔다. 특히 김해민 시인의 시에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시적 경향은 인간의 삶에서 파생되는 여러 실존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고 그것들을 통해 조성되는 정서를 시인의 개성으로 노래하고 있는 점이다.

인생을 이어가는
삶의 고리
수없이 펼쳐지는 영화 속 장면
제안되는 새로운 길
갑자기 마주친 선택의 순간
상상해 오던 방향과 크게 달라
깊어지는 고뇌

이 고리로 엮을까
저 고리로 엮을까
어떤 모습으로 이어갈까
그 고리를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결정을 해야 할 시간
어떤 고리로 연결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은
생애 최고의 선택
- 「내가 가는 길」 전문

인간의 삶은 매번 선택의 과정이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들이 이어져 어떠한 형태든 삶을 완성한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시적 화자는 “수없이 펼쳐지는 영화 속 장면” 같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제안되는 새로운 길”도 있지만 “갑자기 마주친” 길도 있다. 선택의 결과가 “상상해 오던 방향과 크게 달라” 고뇌가 깊어지기 마련이다. 삶의 연속성의 과정을 ‘선택’이라고 인식하는 화자는 삶을 ‘고리’라고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이 고리로 엮을까/저 고리로 엮을까” 하고 끊임없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갈”지 “그 고리를 선택하면 어떻게 될”지 고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올 수밖에 없다. ‘선택’이라는 결정을 하게 되면 후회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화자는 “내가 가는 길” 즉 결정한 것을, “생애 최고의 선택”이라고 한다.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다음의 「나리꽃과 해바라기」는 ‘나리꽃’과 ‘해바라기’라는 시적 대상에 시적 화자와 시적 화자에게 희망을 건네주는 또 다른 대상으로 이입시켜 결과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예쁜 얼굴에 회색 음영 넣고
고운 눈망울에 잿빛 물 담고
단정한 자세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너의 이름은 나리꽃

말투에 괴로움이 섞여 있고
표정에 외로움이 스며 있고
모습에 그리움이 묻어 있는
너의 이름은 나리꽃

부모님이 만든 고통 머리에 이고
세상 어려움 혼자 등에 업고
대화를 다리에 묶어 버린
너의 필명은 나리꽃

그런 너에게
희망의 빛으로 나타나
밝은 색으로 채워주는 나를
해바라기라 불렀지

보라색 펜을 더 좋아하고
편지 속에 시를 넣기 시작하고
필명, 은은한 매력으로 다가가는 나리꽃

밝고 맑게 변하는 너를 보면서
내 가슴 깊은 곳에 메아리치는 소리
나리꽃의 영원한 해바라기
- 「나리꽃과 해바라기」 전문

이 작품에서 ‘너’는 ‘나리꽃’을 말한다. “예쁜 얼굴에 회색 음영 넣고/고운 눈망울에 잿빛 물 담고/단정한 자세”의 너의 이름을 ‘나리꽃’이라고 하고 있다, 나리꽃의 모습을 그림그리듯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2연에 이르면 “말투에 괴로움” “표정에 외로움” “모습에 그리움”이 나리꽃에 묻어난다고 한다. 의인법을 통해 드러낸 나리꽃의 심상에 내재한 복합적인 감정을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2연에 나타난 ‘나리꽃’은 시인이 의인화법을 구사하였다 하여도 ‘나리꽃’이라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식물성만을 노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쯤에 이르면 ‘너’, 즉 ‘나리꽃’이라는 대상이 ‘사람’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을 3연에 이르면 더욱 명확해진다. “부모님이 만든 고통 머리에 이고/세상 어려움 혼자 등에 업고/대화를 다리에 묶어 버린/너의 필명은 나리꽃”은 화자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이다. “그런 너에게/희망의 빛으로 나타나/밝은 색으로 채워주는 나”인 것이다. 즉 ‘해바라기’이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향일성 식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해바라기라고 할 수 있다. 너를 바라보며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나리꽃’ 곁에 피어있는 ‘해바라기’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서정시는 기표基表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 이면의 진실인 ‘기의基意’를 함의할 때 시적 외연이 넓어지고 시적 깊이와 무게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의 배경에는 부모의 불화로 사춘기 시절을 방황한 소녀와 편지를 나눈 소년이 있다. 이 시집의 ‘시인의 말’에 의하면 편지를 나눈 소녀의 필명은 ‘나리꽃’이고 소년의 필명은 ‘해바라기’이다. 수십 년 전의 순수한 마음을 나눈 시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애틋함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참척慘慽」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을 말한다. 그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것도 둘이나 앞세웠으니 상심이 컸을 것이다. 이러한 아픔을 곁에서 바라보는 화자는 슬픔으로 세상을 살다가 떠난 어머니의 마음을 통한의 심정으로 토로한다. 「인생이란」 연작시에서는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인연」에서는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짓는 감정을 심도있게 살피고 있다. 「참회의 기도」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물질적 탐욕에 어두운 종교에 대해 질타하고 범죄자의 악행을 용서해주시라고 기도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3.
아리스토 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시는 자연을 모방한다’하였다. 이러한 명제는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효하다. 자연은 불변의 정신으로 정직하다. 그러므로 고래로부터 수많은 시인들이 자연을 노래해 왔다. 이는 자연의 특성을 배우고자 함이다. ‘사군자’는 물론 커다란 바위, 강물, 산 등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자연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메시지를 비유, 혹은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지은 것일지라도 명승지의 건축물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도 시적 대상으로 할용하였다.

계곡에 뻗어있는
구불구불한 공간을 품고
단아하고 기품있게 자리 잡은 소沼
쉽게 보이는 바위를 숨기고
아무것도 없다는 듯
담아둔 짙은 푸르름

삼백오십 리 영산강의 출발선
두려워하지 않는 긴 여정
담담하고 조용하게 내보내는 줄기
한때 이 골짜기에서 벌어진
민족상잔의 아픔을
깊숙이 간직하고
잔잔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평온

시작은 옹달샘이지만
마침내 거대한 강물이 되는
- 「가마골 용소」 전문

“삼백오십 리 영산강의 출발선”이라고 형상화 시킨 전남 담양군 용면 용연리의 가마골은 영산강의 시원이 되는 장소이다. 시원지始原地는 사물이 시작되는 지점을 말한다. 인류의 시원은 아득한 옛날 원숭이 등 영장류일 것이다. 이처럼 시원지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매우 의미있는 시작이다. 화자는 영산강의 시원지인 ‘가마골 용소’를 바라본다. 그리고 수많은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용소는 가마골이라는 계곡의 구불구불한 공간에 “단아하고 기품있게 자리 잡”고 있다. 영산강이라는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는 첫 시작은 “쉽게 보이는 바위를 숨기고/아무것도 없다는 듯/담아둔 짙은 푸르름”만 보이는 매우 보잘 것 없는 소沼이다. 그러나 삼백오십 리의 대장정을 출발하는 용소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긴 여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은 비록 “담담하고 조용하게 내보내는 줄기”이지만, “한때 이 골짜기에서 벌어진/민족상잔의 아픔을” 떠올리며 아픈 역사의 공간임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잔잔한 모습”을 지녔고, “평온”하여 언제 민족상잔의 아픔이 있었는가 싶게 말없이 흘러가는 물줄기를 “시작은 옹달샘이지만/마침내 거대한 강물이 되는” 이치를 생각한다.
이 작품은 ‘용소’라는 작은 옹달샘이 지닌 자연의 모습과 그 이면에 숨겨진 비극성을 통해 자연의 위대함과 더불어 인간의 이념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물염정」은 누정이라는 사물이 배태하고 있는 서사와 때묻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품과 평온함이 배어있는
김삿갓이 지키고 있는,

단아한 자세로 앉아
물 건너
소나무 숲 속 깊은 계곡에서 들려올 것 같은
방랑시인 시 읊조리는 소리

물염적벽의 기암절벽
절애의 경치를 바라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의 스쳐가는 실루엣

살랑대는 봄바람에
시 한 구절 두 구절 떠올리며
탁주 한 사발 들이켜니
별거 아닌 신선놀음

방랑시인에게 잔 권하며
주거니 받거니 벌게지는 시 구절
속세의 부귀영화 부질없으니
세속에 물들지 않으리라
- 「물염정勿染亭」 전문

‘물염정’은 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에 있는 정자이다. 담양 출신 송순이 16세기에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혹하지 않고 물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자를 짓고 은일한 삶을 살았던 건축물이다. 시인은 물염정에서 옛사람들을 만나고 물염정이 함의하는 정신성에 동화되고자 한다. 물염정엔 김삿갓 김병연의 상像이 있고 시비가 있다. 150여 년전 이곳에서 가까운 동복 둔동마을에서 살다가 목숨을 다했다. 그의 불우한 생과 뛰어난 문학성을 기억하는 화자는 “소나무 숲 속 깊은 계곡에서” “방랑시인 시 읊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고 김병연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물염적벽의 풍광을 바라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의 스쳐가는 실루엣”이 느껴지고 봄날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탁주 한 사발 들이켜니” 이것이 신선놀음이라며 인간의 삶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생生의 본질을 묘파하는 이 작품은 “방랑시인에게 잔 권하며/주거니 받거니”하며 벌게지니, 속세의 부귀영화 부질없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물염정이라는 사물과 그 사물에 얽힌 이야기를 되새기며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사색이 묻어나고 있다.

「싸목싸목길」에서는 길을 가며 만나는 자연 풍광과 누정, 저수지, 나무들, 포의사 등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형상화시켰다. 「원림 찬가」 연작 또한 자연과 사물을 통해 배태되는 인간애와 인정, 그리고 역사성을 그리고 있다. 「환벽당 꽃무릇」, 「죽녹원」 등 시인이 살고 있는 주변에 있는 자연과 사물들에서 그것들이 지닌 생태적 특징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4.
김해민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과학문명으로 성취된 사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로등’, ‘공중전화부스’, ‘자전거’, ‘진공청소기’, ‘폐타이어’, ‘신호등’, ‘안경’ 등이 그것들이다. 자본문명 시대의 산물들이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시인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노래한 모더니즘적인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김해민 시인은 이러한 사물들이 지닌 본질을 탐구하고 있어 기존의 우리 문학사에 출현하는 모더니스트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목된다.

백주에
아스팔트 도로 위
검은 그림자가
마른 장승처럼 나타난다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거의 움직임 없이 서 있다
듬성듬성 구름 낀 날
숨바꼭질하다가
일란성 다둥이들이
잘 생겼다고 타시락거린다
아무리 보아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지만
햇빛 반대 방향으로 맞서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무료하고 뻘쭘하게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모두에게
더 멋있다고 속삭였다
- 「가로등」 전문

한낮에 아스발트 도로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로등이 서 있는데 마치 마른 장승처럼 그림자가 보여지는 모습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렸다. 본래 가로등은 밤에 빛을 내어 거리를 밝히는 바, 화자는 빛에 의해 생긴 가로등의 그림자를 주목하고 있다. 일종의 인상파 화가들처럼 빛의 유희를 포착한 것이다. “듬성듬성 구름 낀 날”, 즉 날씨가 흐려 햇빛이 없는 날은 “숨바꼭질” 하다가 햇빛이 비추면 가로등들은 길가에 그림자를 드리운 똑같은 모습들이 “일란성 다둥이” 같다. “아무리 보아도/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풍경은 단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가로등과 그것들을 닮은 그림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일 뿐이다. 가로등은 “햇빛 반대 방향으로 맞서면서/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가로등 그 이면에 깃든 본질을 드러낸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행위는 어둠이 내리면 비로소 가로등의 가치가 빛나는 것을 화자는 이 작품의 메시지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함으로써 연민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공중전화부스」는 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난 문명의 이기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감정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한때 사람들이
무한한 애정으로 드나들던 곳
문명의 피해를 비켜가지 못해
젊은 세대는 관심 없고
드나들던 사람들도 무관심한
존재 자체가 궁금한 구조물

이제는 추억의 장소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속삭이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던
혼자만의 공간
현금 지갑 소중한 물건
전화기 위에 올려놓았다가
잃어버려 마음이 서운했던

공중전화부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형
- 「공중전화부스」 전문

공중전화가 소통의 도구로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시대가 있었다. 길가 이곳저곳에 그 공중전화기를 품고 있는 부스가 소통의 공간으로써 뿐만 아니라 낭만적인 풍경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제 철지난 벽보처럼 낡고 버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화자는 “한때 사람들이/무한한 애정으로 드나들던 곳/문명의 피해를 비켜가지 못”했다고 한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출현한 휴대전화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한때 공중전화부스를 “드나들던 사람들도 무관심한/존재 자체가 궁금한 구조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장소”일 뿐이다. 오래된 사물, 그것도 한때 사람들이 애용하던 사물에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속삭이거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통화하다가 전화기 위에 지갑이나 소지품을 놓고 그냥 나왔다가 잃어버리기도 했던 이야기가 깃든 공간이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형’의 공간임을 화자는 애잔하게 바라보며 추억하는 것이다.

「자전거」에서는 두 개의 바퀴로 쉽게 길을 갈 수 없지만 자전거가 “좁은 골목 울퉁불퉁한 산길/트인 들판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이/우리네 인생을 닮았다”고 함으로써 사물에 인간의 삶을 대비시키고 있다. 「진공청소기」는 비교적 최첨단의 도구로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진공청소기의 속성을 인간의 욕망으로 비유하고 있다. 「폐타이어」는 수많은 길을 질주하다가 낡아서는 “안전보호용”품이 된 폐타이어의 처지를 생로병사를 겪는 인간의 모습에 견줌으로써 그것이 지닌 기호의 의미를 묘파하고 있다.

5.
김해민 시인의 시집에서 매우 가치있는 일련의 시편은 생태학적 상상력이다. 오늘날 전지구적인 위기의 하나인 기후온난화현상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아닌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 때문에 생긴 생태계 파괴가 주된 이유이다. 이러한 시점에 자연이 지닌 진실을 묘파해냄으로써 자연환경을 보전함과 더불어 자연이 지닌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때로는 자연을 그대로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의미를 담아내기도 한다. 한편 우리의 선조들이 자연을 마음에 품고 자연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읽어냈듯이 자연을 마치 수양하는 수도자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이는 자연을 실존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기제로 삼고 싶은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들이
화사함을 뽐내는 봄날
눈 밖에 벗어나 메롱스럽게 있다가
작렬하는 폭염에
무더위를 머리로 뿌리치며
바람만 출입시키는 그늘 제작 전문가

땅에서만 놀아도 될텐데
수직으로 성장해도 될텐데
길 없는 공중에 길을 내며
몸 뒤트는 고통을 참는 일생

겨울의 추위에
거죽만 남은 모습이지만
눈송이 살포시 내려앉으면
맑고 깨끗한 한 폭의 수채화
- 「등나무」 전문

등나무의 생태적 특징을 그대로 포착해내며, 등나무가 겪는 고통과 노력이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를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꽃과 나무들이/화사함을 뽐내는 봄날” 사람들의 시선은 꽃과 나무에 간다. 등나무는 사람들 눈 밖에 벗어나 관심 밖이다. “작렬하는 폭염”이 쏟아지는 한 여름엔 “무더위를 머리로 뿌리치며/바람만 출입시”킨다. 이러한 등나무를 화자는 “그늘 제작 전문가”라고 한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식물이지만 무더운 날 바람이 스쳐지나가게 하고 그늘을 만들어 휴식공간을 내주는 등나무의 헌신을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땅에서만 놀아도 될텐데/수직으로 성장해도 될텐데/길 없는 공중에 길을 내며/몸 뒤트는 고통을 참는” 등나무의 일생은 희생을 통해 뭇 생명체들에게 유익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겨울의 추위에/거죽만 남은 모습”이 되어 “눈송이 살포시 내려앉”는데, 이렇듯 추운 겨울을 인내하는 벌거숭이의 모습이 “맑고 깨끗한 한 폭의 수채화”라고 하며 화자는 등나무의 사계四季에 긍정적이고 헌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끈질긴 생명력과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자연의 진실을 묘파해내고 있다.
「코스모스」도 앞의 「등나무」처럼 의인화법을 구사하여 ‘코스모스’에 새로운 생명성을 부여하고 있다.

곁에 두고 싶어도
길가에 있어야 아름답기에
멀리서 바라만 보는 사랑

분홍 드레스 입은 소녀
빨간 원피스 입은 소녀
하얀 저고리 입은 소녀

한들한들거리는 수줍은 순정
간들거리면서도 말못하는 순애보

가을 햇살이 되어
너의 볼 만지고 싶다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가냘픈 너와 춤추고 싶다
- 「코스모스」 전문

모스모스를 바라보는 화자의 심상은 전통적인, 순애보적인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곁에 두고 싶”은 욕망을 지녔지만 “길가에 있어야 아름답기에/멀리서 바라만 보는 사랑”이다. 코스모스를 “분홍 드레스 입은 소녀/빨간 원피스 입은 소녀/하얀 저고리 입은 소녀”라고 함으로써 색채감각적으로 코스모스를 이미지화하는 화자의 감정은 대상을 정숙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할 수 없는 감정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시적 대상인 코스모스가 지닌 정숙한 소녀의 상을 그려낸다. 그런 까닭에 “한들한들거리는 수줍은 순정/간들거리면서도 말못하는 순애보”가 화자가 바라보는 저만치 거리에 있는 코스모스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화자 내면에 깃든 욕망은 “가을 햇살이 되어” 코스모스의 볼을 만지고 싶다.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가냘픈 너와 춤추고 싶다”며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감정이 지금까지 보아온 코스모스에 대한 관념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이어서 참신하게 다가온다.

「구절초」에서는 가을 언덕에 핀 구절초가 바람에 춤을 춘다. 애잔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여름을 견딘 힘으로 상큼한 향기를 풍긴다고 한다. 「산수유」에서는 봄날 노랗게 꽃을 피우는 여름날 강렬한 태양으로 붉은 열매를 맺은 산수유의 생명력을 형상화시켰다. 「메타세콰이어」 연작들은 봄·여름·가을·겨울을 노래한 각각의 작품들에서 계절별로 변신하며 생명력과 활기를 보여주는 메타세콰이어가 지닌 힘의 원천을 형상화시키며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다.

6.
서정시는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형상화시킨 예술장르이다. 인간은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수많은 감정을 표출한다. 이러한 감정들을 절제할 줄 아는 것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감정의 조화를 잘 이루려하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시인의 언술행위는 감정의 조화를 잘 조절하는 언어마술이다. 절제를 통해 감정을 잘 조절하는 시인의 시와 삶은 일치를 이루기가 쉽다. 궁극적으로 시는 실천덕목이어서 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한다.
김해민 시인의 시적 경향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것들이 지닌 생명성에 관한 모색이며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편들에서는 참된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늘 스스로 삶을 결정해야 하고 인생이 무엇인지, 누군가와의 관계유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 등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편들에서도 바위, 강물, 산 등 자연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과학문명으로 성취된 가로등, 공중전화부스, 자전거, 진공청소기, 폐타이어, 신호등, 안경 등의 사물에 대해 모더니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물이 지닌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생태학적 상상력을 노래한 시편들은 매우 귀한 것들이다. 오늘날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온난화현상으로 지구촌에 여러 가지 재앙이 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 자연이 지닌 진실을 묘파해냄으로써 자연환경보전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김해민 시인의 시는 독자친화적이어서 시 읽기가 어려워진 시대에 그의 시는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일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강경호(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김해민 시인의 시적 경향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그것들이 지닌 생명성에 관한 모색이며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편들에서는 참된 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늘 스스로 삶을 결정해야 하고 인생이 무엇인지, 누군가와의 관계유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 등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자연을 노래한 시편들에서도 바위, 강물, 산 등 자연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 과학문명으로 성취된 가로등, 공중전화부스, 자전거, 진공청소기, 폐타이어, 신호등, 안경 등의 사물에 대해 모더니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물이 지닌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생태학적 상상력을 노래한 시편들은 매우 귀한 것들이다. 오늘날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온난화현상으로 지구촌에 여러 가지 재앙이 닥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 자연이 지닌 진실을 묘파해냄으로써 자연환경보전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꿈꾸고 있다.

시인의 말

1부 대나무의 속삭임

가로등
공중전화부스
교무수첩
구절초
군자란
대나무의 속삭임
등나무
메타세쿼이아
메타세쿼이아 - 봄
메타세쿼이아 - 여름
메타세쿼이아 - 가을
메타세쿼이아 - 겨울
물레방아
산수유
안경
우산
자전거
진공청소기
코스모스
폐타이어


2부 고하도 일몰

가마골 용소
고하도 일몰
관방제림 노거목老巨木
금성산 연동사
득량만得糧灣
물 위의 정원
물염정勿染亭
빛길
상월정上月亭 가는 길
싸목싸목길
여수 장도
오월 단오제
원림園林찬가 1
원림園林찬가 2
원림園林찬가 3
죽녹원竹綠園
천은사泉隱寺의 봄
화엄사 정오의 종소리
환벽당 꽃무릇
4월의 회산 백련지


3부 삼십의 비희

동그라미
버스킹
보름달
비
비오는 날
새 소리
30의 비희悲喜
술래잡기
술잔
시를 쓴다는 것
신호등
엄지발가락
완벽한 얼굴
잠 못 이루는 밤에
주차 공간
폭설
허수아비


4부 홍일점

내가 가는 길
그립습니다
그녀가 없다는 것
나리꽃과 해바라기
단식의 슬픔
리더의 자격
부부유별
사제師弟의 정
선녀 이야기
이별
아름다운 삶
인생이란 1
인생이란 2
인연因緣
종이 한 장 차이
작은 천사가 되고 싶은 아이
장날
참회의 기도
참척慘慽
한라산 연가戀歌
최고의 인연因緣
홍일점


| 작품론 |
삶의 방식 탐구와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상상력 | 강경호

가로등



백주에
아스팔트 도로 위
검은 그림자가
마른 장승처럼 나타난다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거의 움직임 없이 서 있다
듬성듬성 구름 낀 날
숨바꼭질하다가
일란성 다둥이들이
잘 생겼다고 타시락거린다
아무리 보아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지만
햇빛 반대 방향으로 맞서면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무료하고 뻘쭘하게
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모두에게
더 멋있다고 속삭였다





공중전화부스



한때 사람들이
무한한 애정으로 드나들던 곳
문명의 피해를 비켜가지 못해
젊은 세대는 관심 없고
드나들던 사람들도 무관심한
존재 자체가 궁금한 구조물

이제는 추억의 장소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속삭이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던
혼자만의 공간
현금 지갑 소중한 물건
전화기 위에 올려놓았다가
잃어버려 마음이 서운했던

공중전화부스는
현재가 아닌 과거형





교무수첩



삼십 년 넘긴 세월
삼십 권 넘는 수첩
담임한 학급의 수백 인물 사진

아무거나 추켜들고 펼치며
눈과 눈이 마주치는 반가움
저 멀리 펼쳐지는 기쁨의 파노라마
챠밍보이 외치며 환호하던 몸짓

어쩌다가 나타나는
가위표 되어 있는 사진
끝까지 책임있게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자책에 솟아나는 안타까움

수첩 뒤편에
꿈과 희망의 수많은 이름과
얼굴이 어른거리는 추억들
귀에 맴도는 인기투표 일위

교무수첩은
삶의 증인 나의 동반자




구절초



가을 언덕에
흰 국화가 가득하다

바람에
앙증맞은 구절초 군무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린다

여름을 견디고
마디 마디 아홉 마디에 이르러
상큼한 향을 피워낸다

한쪽 귀퉁이 연보라색 구절초
나를 보아주세요 말하는 듯
애잔하게 간들거린다





군자란



수선화이면서도
고귀하고 우아하여
난이라 이름 붙여진 꽃

먼 아프리카에서
동양의 이국땅까지 와
무한하게 받은 사랑

쭉쭉 뻗어있는
청초한 잎만 보아도
마음이 차분하고 여유로워지는데

긴 꽃대 끝에
여러 송이 피어나
나른한 봄날을 달래주는 화사한 꽃

스치기라도 하여
예쁜 꽃잎 다칠세라
조심스레 정성스레 다가서는 물줄기

군자란은
봄이 아닌 계절의 이름
꽃이 피어있는 봄날엔 황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