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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적 언어와 리듬감으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영역 구축’
선안영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선안영 시인이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문학들)을 펴냈다. 전체 4부에 66편이 실린 이번 시집은 삶에서 체득된 구체적인 언어와 탁월한 리듬감으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쥘부채처럼 접혀진 햇살이 펼쳐지고 세상 모든 관절들이 우두둑 기지개 켜고/강아지 봄 마중 나가 꼬리 한 뼘 길어지고//새끼 밴 돼지 등을 득득득 빗어 주면 뻣뻣한 검은 털 사이 허옇게 인 살비듬/짐승의 젖은 구유에도 봄빛이 차오르고//주머니 속 조약돌을 꽃밭에 놓아주고 봄볕 적신 마음은 또 어디를 건너는가/꽃비 속 말간 발굽들이 천진하게 지나가고”(「춘분春分」 전문)

봄이 오는 풍경을 노래한 시다. 쥘부채처럼 펼쳐진 봄햇살에 강아지 꼬리가 한 뼘 길어지고, 새낀 밴 돼지의 젖은 구유에도 봄빛이 차오르고, 주머니 속 조약돌을 꽃밭에 놓아주고 시 속 화자는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봄날.
풍경의 세목을 간파해 내는 시인의 시선이 구체적이고, 그 발걸음이 경쾌하다. 삶과 다소 괴리된 듯한 관념성과 구태의연한 관습적 경향에 익숙한 독자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하다. 자유시와 달리 정형시인 시조의 특장은 무엇보다도 절제된 언어와 리듬에 있다. 삶의 이면을 꿰뚫는 언어를 3·4조 음보에 실어 밀고 당기는 능력은 그야말로 기나긴 숙련의 시간을 견뎌야 얻을 수 있다.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물 빠진 저수지 같은 물금 낮아 흐린 날들/구릉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좋은 날」 전문)

이 시는 봄날의 하루를 바람과 술과 꽃을 매개로 그리고 있다. 반복해 읽다 보면 춥고 칙칙했던 지난겨울의 고통이 봄바람에 하늘하늘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루하루를 상춘객처럼 살자고 속삭인다. 가는 길이 험해도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앞지르며” 말이다.
전남 보성 출신인 선안영 시인은 첫 시집 『초록몽유』를 펴낸 이후 『목이 긴 꽃병』, 『말랑말랑한 방』, 『거듭 나, 당신께 살러갑니다』를 펴냈다. 언어나 의미를 해체하기보다는 전통 서정시의 기조를 지키면서도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과 경쾌한 어조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영역을 탐색해 왔다. 2008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2018년 발견작품상을 수상했고, 2011년 서울문화재단과 2016년,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았다.

선안영 시인은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현실 세계로부터 끝없이 멀어지려 한다. 이곳은 (당)신이 만든 세계이므로 (당)신이 아니면 이 세계를 이해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당)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현실의 눈을 버려야 한다. (당)신을 닮아 가는 시를 위하여.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하며, 시인은 이 현실에서 고통을 겪는 몸조차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당)신과 함께한 시공간이 있다. 시인은 견딘다. 받아 적는다. (당)신과 함께한 그곳은 이곳과 달라서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초월적 아름다움과 시-언어의 근원이 침묵의 형식으로 존재한다. 하여, 선안영 시인은 초월 너머에 있는 근원, 외재성을 향한다. 물론 여기서 외재성은 시인 자신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외재성을 통해 시인 자신의 유한함을 알고, 그래서 무한과 영원성을 꿈꾼다. 그곳에 시의 세계가, 시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이곳에 없다. 현실과 최대한 멀어지며 초월적 아름다움을 향하는 에로티코스(er?tikos), 그래서 시의 세계에 끝없이 다가가려는 인간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른다.

5 시인의 말

제1부 강아지 봄 마중 나가 꼬리 한 뼘 길어지고
13 춘분春分
14 해답은 맨 뒤에 있다
15 그러니까 해피엔딩
16 독창獨唱
18 좋은 날
19 동백과 나무 십자가
20 북향의 방 2
21 검은 고양이
22 굴려라! 바퀴
24 섬 - 페로제도에서
26 섬 2 - 페로제도에서
27 11월, 고요히 별똥별처럼
28 복숭아꽃
29 당신을 지나갔다
30 초록 구유 - 몽골 테를지
31 백도선 선인장
32 위로 3

제2부 까맣게, 신도 백수건달도 날 잊어버렸군요
35 입춘
36 그믐달, 문밖에서
37 흐르는 돌
38 오른손 옆에서 왼손은 슬프다
40 마침표
42 탐라 산수국
45 서쪽으로 걷는 안식일
46 칼라
47 맴도는 것은 다시 맴돌고
48 일곱 날의 정오와 아홉 날의 자정
50 거꾸로 타는 불
51 병가의 계절 2
52 북향의 방
53 무연無煙
54 돌개구멍
56 검은색 속으로 숨은 사람
57 가장 먼 한 정거장

제3부 한 잎씩 연두를 물어와 적벽을 가리는 중
61 벌교 참꼬막
62 벌교 참꼬막 2
63 갈잎의 노래
64 호랑이똥을 삽니다
66 며칠만 말미를 주세요
68 모녀의 모월 모일
69 모녀의 모월 모일 2
70 모녀의 모월 모일 3
71 모녀의 모월 모일 4
72 모녀의 모월 모일 5
73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몰라도
74 얼룩무늬 하루
76 백목련 꽃그늘
77 백목련 꽃그늘 2
78 미신들
80 모란꽃 피는

제4부 웃음이 티끌 하나 없이 펄럭이며 나부끼면
85 못물에 비친 산벚나무
86 벽에 그려진 귀에게
87 절색絶色
88 그리운 세화
89 유리의 감정
90 나의 헤시시
91 미사포를 쓴 여인
92 공
93 가장 작은 교회
94 흰 레이스 커튼이 쳐진 방
95 등 굽은 저녁
96 나는 좌회전이 좋아요
97 스노우볼 오르골
98 연둣빛에 기대어
99 연착延着
100 시, 하얀 암흑
101 해설 초월적 아름다움을 향하는 시, (당)신을 닮아 가는 시 _ 김남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