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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마을 작가 김희자 세번째 수필집[바람의 지문].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저자의 에세이다. 삶 속에서 건져올린 이야기가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며 공감과 생각을 공유한다.

책문을 열며

1부
바람의 지문
동침
헛꽃
인人과 인人
탄주彈奏
카르페 디엠
권태
무지개 재
느린 풍경 속으로

2부
육탁
한파
소리 없는 소리
폐옥
혼잣말
감동 잘 먹는 남자
표정 없는 남자
분노의 반점
마지막 인사

3부
뿌리의 길
황금열쇠
태양의 남자를 품다
바오바브나무의 꿈
스물다섯 살의 가을
풍경이 말을 걸다
첫눈 탓이다
염불암 가는 길
아직은 모른다

4부
귀향
나의 바다
빈집
만추
지금 여기에서
밥 무덤
별을 품다
외출
제비가 왔다

5부
동거
순수
세 여자
고향의 봄
꽃등
포란
풍경소리
군자희락
장마

[작가의 발간사]
붉은 아침
새벽빛이 열리는 여명의 시간, 희끄무레 먼동이 터 온다. 동쪽 바 다 끝 하늘이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게 물든다. 동살이 퍼지며 붉은 아침이 밝아 온다. 고향에 돌아와 사계절을 보내고 맞는 아침이다.
밤이 길고 어둠이 깊을수록 아침은 붉다. 수도승처럼 밤을 지새우 고 나니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아침이 나타난다.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이지만 나를 위한 또 다른 시간이다.
세 번째 작품집 원고를 마무리하다 밤을 꼬박 새웠다. ‘꽃문이 열릴 때까지’를 출간 후 사 년 만이다. 삼 년마다 작품집을 내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한해를 넘겼다. 사물 하 나를 두고도 몽상가가 되어야 했고, 생각의 깊이를 더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하나 발표하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밤은 스승이다'라는 문장을 좋아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 어 밤은 극복해야 할 운명적 시각. 홀로 있어 나를 찾는 시간이며 책장을 넘기는 시간이다. 그 고요한 순간, 시간은 가르침이 되고 깨달음 이 된다. 하여, 밤은 스승이나 다름없다.
흐느낌이 많은 세월을 건너다보니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단절 의 시간은 내적 고요의 시간이 되었고 고요함 속에서 나를 찾고 붉은 아침을 맞는 것은 위로였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시각에 새벽 창을 열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쏟는 뜨거움을 만났다. 삭풍이 내 삶을 흔들 고 지나가도 고립된 시간이 오히려 나를 깨어있게 했다.
지나간 것은 모두 추억이고 그리움이 되는 것일까. 돌아보면 순풍 에 돛 단 듯 흘러오지 않았다. 차고 매운 세월 앞에서 기다림을 배우기도 했고 골방에 처박혀 나만 죽자 살자 파먹었던 때도 있었다. 마음은 늘 가랑잎 하나 바람에 흔들리듯 소리 없이 요동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붉은 아침이었다. 세 번째 작품집 제목은 ‘바람의 지문’이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날은 모두 바람이 만든 지문이었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던 소녀시대로 부터 자유로운 영혼이길 갈구하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집은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산물이다. 두 번째 작품집 발표 이후 수년 동안 치열하게 써온 글이며 올여름 육체적 노동을 하여 얻은 대가로 묶게 되었다.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다.
밤새 원고를 묶고 보니 또 다른 길이 보인다. 바다 끝에서부터 붉은 아침이 밝아오듯, 다시 올 계절의 문턱에다 등불 환히 밝혀두고 내 가슴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 꽃 같은 언어가 세인들의 가슴에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며 고향에서 또 한 권의 책을 엮는다.

2019년 시월에 남해 다랭이마을 생가에서 연당蓮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