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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수채화』는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아흔다랭이〉, 〈솥뚜껑 보고 놀라다〉, 〈생각을 바꾸면〉, 〈노을을 채색하다〉, 〈노래자랑대회〉, 〈집주인표 커피〉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김기람의 수필은 우리에게 운명에 대한 순응을 가르친다. 그의 순응은 체념이나 좌절이 아니다. ‘아직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습니다’라는 감사이다. 아직 남아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오히려 순응은 곧 의지이며, 결단이며, 자존심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의 수필은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그의 수필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아니기에 감동적이다. 무엇인들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는 포용의 온기가 있기에 설득의 힘이 크다. ?
김기람이 지리산 아래 유가의 집에 태어난 것은 운명이다. 어머니에 이어 경주 문가의 종부가 된 것도 운명이다. 고해를 건너와 여기에 서서 남은 것에 감사하는 것도 운명이다. 그가 글쟁이가 되어야 하는 것도 예정된 운명이다. 너른 품의 수필가가 되어 온기의 문장으로 감동의 눈물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것은 순응에 대한 보답이다.

제 1 부 바랑에 물든 감물

어미 비나리가 되려 하다 15바랑에 물든 감물 20박수남 여사 24아버지의 명언 29남편의 애창곡 34옥룡암 북면바위 39아흔다랭이 44훈습 49솥뚜껑 보고 놀라다 53속정情 58두벌새끼 63

제 2 부 흔적을 지우며

어떤 실루엣 71넝쿨장미 75흔적을 지우며 80생각을 바꾸면 85기억과 화해의 시비 90씁쓸한 선물 96사회적 거리두기 100묵은 인연과 새 인연 사이에서 103비사리구시 109고령 운전자 113

제 3 부 날지 못하는 새

복병을 만나다 119날지 못하는 새 124노을을 채색하다 129오월엔 135도가 틔다 140노래자랑대회 145혹의 생일 152도루묵 158어떤 배려 163태풍마중 165징검다리 170

제 4 부 기억 속의 수채화

과객비 179버팀목 185기억 속의 수채화 191집주인표 커피 195빚 202시금장 207동부콩 213특별한 삶 219망투 226밀주 231벌초, 등짐이 되다 236

[작가의 발간문]
기억 속의 수채화’를 엮으며

늙은 산모의 목숨 줄을 담보로 세상 빛을 보았다. 노산을 한 어머니는 젖이 모자랐다. 암죽이 싫어 고개를 비틀고 있는 나를 열다섯 살 언니가 업고 가서 숙모와 올케들에게 동냥젖을 먹였다. 그것이 고마웠던 언니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 늘 말했다.

아버지는 유발을 하고 한복을 입었다. 버선과 코가 있는 흰 고무신을 신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군수가 부임해 오면 아버지께 인사를 왔다. 사랑채에 나갈 술상을 차리는 올케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오느냐”고. 올케는 아버지 상투 때문이라고 답했다. 친구 아버지의 단정한 머리를 부러워했던 나는 그때부터 일제 단발령을 꿋꿋하게 넘긴 아버지의 상투를 자랑스러워했다.

삼 대 소가가 모여 살았다. 아버지 삼종형제간의 도타운 우애는 아랫대로 내림했다. 천리도 지척이 되어 서로 정을 나누고 산다.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들과 늦게 글을 쓰게 된 나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며 응원해주는 질아姪兒가 있어 행복하다.

어린 시절, 글 쓰는 아버지를 위해 자주 연적에 물을 채우고 먹을 갈았다. 사랑채에는 근동 청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고, 글을 받으러 오는 타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같이 시조를 짓고 읊었다. 그 모습을 자주 보고 자랐기에 글을 쓰려는 마음을 오랫동안 품게 되었으리라.

토지개혁과 한국전쟁, 부모님의 오랜 병고로 집안이 평탄치 못했다. 푼푼했던 살림이 다 나가고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와도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게 되었다. 내 생에서 가장 시린 시절이었다.

결혼은 일신이 편한 집의 아들과 했으면 하고 바랐으나 정서가 친정과 같은 집의 종손과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이십 년 세월, 중병으로 자리보전을 하시다 가셨다. 일과 가사를 병행하느라 좀 더 살뜰히 돌봐드리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가슴 한편이 묵직하다. 두 시동생 내외에게도 항상 빚진 마음인데 정성을 다해 가꾼 먹거리를 우리 집까지 나르는 동서가 미쁘기 그지없다.


이제 터널을 다 지내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으려는데 집안의 대들보였던 큰아들이 덜컥 출가를 했다. 종손이기도 했지만 생각이 깊고 해박해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살기를 어미는 소원했었다. 그러나 많은 번민을 거쳐 제가 선택한 길이어서 부모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보석을 빼앗긴 듯 마음이 많이 아렸지만 지금은 그저 성불하기만을 빈다.

지금 내 인생의 계절은 겨울이다. 나른한 봄날 낮잠 한숨 잔듯한데 어느새 잎을 떨구고 나목으로 오들 거리고 있다. 휘휘 둘러봐도 부모형제를 만날 수 없다. 앞서간 그들이 몹시도 그리운 날, 산책을 나섰다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하여 ‘기억 속의 수채화’를 빚진 사람들에게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엮었다.

수필은 젊어야하는데 내 글은 오래된 시간들의 배경이 많다. 더러는 기억조차 아슴한 이야기여서 가독성을 염려하지만, 옛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풍습을 알리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또한 아무리 세월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것이 고향에서 있었던 유년의 기억이다. 되돌아갈 수 없어서 더욱 그리운 시절을 반추하여 채색해 보았다. 아름다운 수채화가 되길 바라면서.

늦은 나이에 시작한 수필 쓰기라 젊은 날의 감성은 사그라지고 무딘 감정으로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뿐이다. 그리 자랑할 만한 삶이 되지 못해 감추려 했던 나를 훤히 드러나게 하여 민망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모여진 글이라서 시의성에 어긋나 독자들의 이해에 혼란을 주게 될까 봐 걱정된다. 무량한 마음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