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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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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쓸 수 없는 것까지 쓸 수 있다면”
    허무의 심연 속에서 방황하는 기억을 붙드는 빛나는 시편


    올해로 등단 40년이 되는 고형렬 시인의 열한번째 시집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이 창비시선 444번으로 출간되었다. 제2회 형평문학상 수상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창비 2015)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담백하면서도 진중한 시적 성찰과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한대의 상상력이 빛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2018년 유심작품상 수상작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를 비롯하여 삶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가득 찬 98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실었으며, 말미의 산문 「플랫폼에 내리는 시, 다시 떠나는 열차」는 ‘시란 무엇인가’를 탐구해온 고뇌의 흔적이 담긴 시인의 시론으로 곱씹어 읽을 만하다. 등단 이후 끊임없이 시적 갱신을 도모해온 시인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에 놀라서 세번 탄식”(진은영, 추천사)하게 되는 묵직한 시집이다.

    시와 삶을 고뇌하는 예민한 투시력
    아름다운 절망을 그려내는 농밀한 언어


    전통 서정에서 한발 비켜나 독특한 시세계를 개척해온 고형렬의 시는 늘 새롭다.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한편 한편 공들이는 치열한 시정신을 엿볼 수 있다. 관습을 깨뜨리는 시적 발상과 특유의 개성적인 어법은 우리의 시적 감각과 정서를 일깨우고자 줄기차게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시인의 전략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대가 저물어도 새로운 작품은 오지 않는다”(「그는 작은 사진 속에서」)는 시인의 말이 더욱 가슴 깊이 와닿는다. 삶의 비의를 탐색하며 생의 근원을 찾아가는 고형렬의 시는 언제나 상상의 폭을 넓혀가며 예민한 투시력과 농밀한 언어로 새롭게 쓰인다.
    언어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시인은 거대한 혼돈의 세계에서 획일화되고 훼손된 채 “불안의 마스크와 우울의 가면을 쓴”(「서울의 겨울을 지나가면」) 긴장과 불안의 언어를 생명력 넘치는 활력의 언어로 회복하고자 한다. 다만 “죽어 있는 것처럼 살아 있을 뿐”(「오늘 망각의 강가에」)인 생의 덧없음 속에서도 시인은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 찬 부조리한 현실을 넘어서는 이상의 세계를 꿈꾼다. 역설적으로 절망과 허무의 힘을 통해 “저 미래의 끝을 향해 노래하며 죽고 살며”(「물고기의 신화」) 시를 쓴다. 그렇다면 “모든 삶의 뒤끝은 쓰라린 후회만 남는 법”(「나여, 오늘 촉석루나 갈까요」)일지라도 “아름다운 것이 맨 나중에 온다면/가장 아름다운 시는 모든 것의 맨 끝에/서 있어도 괜찮”(「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을 것이다.
    말미에 해설 대신 붙인 산문에서 시인은 “현실 속에 갇힌 영혼의 기억에게 마음의 기척들이 언어로 나타나길 바란다”고 썼다. 시인의 바람대로 “시는 죽음 속에서 흙을 밀어올리고 피어날 것”(「시의 옷을 입다」)이다. 그리하여 “계속이란 말이 가장 시적인 언어”(「노크」)임을 알기에 시인은 계속 잊고 기억하며, “불가능한 생각들을 불러 모”아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고 “쓸 수 없는 것까지”(「거미막을 밟다」) 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황량하고 폭력적인 문법 사회”에서 순정한 마음의 ‘시적인 인간’이길 꿈꾸며 살아온 시인으로서의 운명적 삶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이 되는 것보다 시가 되고 싶다”는 시인은 그렇게 생의 의미를 찾아 “우리의 절망과 늙음을 정화”(「서 있는 불」)하는 촛불로 일어나 혼돈의 세상을 밝히는 ‘시’가 된다.

    --------------------------------------------------------------------------------
    고형렬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질의: 편집자)

    -40년 동안 시작활동을 하고 계시고, 이번에는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게 되셨어요.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인의 영혼 속에 갇혀 있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느날의 망각이고 스침과 입김이고 희생과 기억인 오래된 것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시는 그것들을 감각하고 기억하면서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오래된 마음과 감정을 간직하려 하지요.
    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기 속에서 기침이나 고열로 반응하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늘 떠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오래된 것 사이에 있으면서도 한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퍼소나(persona)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화자와 대상과 청자가 있습니다. 그 외 침묵, 소란, 어둠 등등 우리가 다가가지 못한 대상들은 많습니다. 시인은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어하지요.

    -시인께서는 일상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매일 저하고 지냅니다. 나는 내가 심심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작은 길이 있습니다. 중심에는 없는 빗방울이 마음속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중심에서 멀어지면서 망가진 언어들이 살아났으며 그것은 곧 아픔을 되찾게 했습니다. 아로니아를 가꾸면서 혼자 풀을 뽑고 있을 때도 시가 저를 찾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복잡해졌고 한쪽에서 저는 비사회적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 친구가 생각나면 혼자 술 한잔으로 달래고 비를 보내듯 보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것만큼 비사회적 존재인 것 같습니다. 시는 그런 것들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심각한 적도 있었지만 좀 멍한 상태로 15년 간 [에세이 장자]를 쓰면서 지냈습니다.
    저는 항상 제 안에 있는 몇몇 자아와 다툽니다. 한번 왔다가 가버리고 다시 안 오는 자아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합니다. 그래서 시의 나뭇가지는 한쪽으로만 뻗어가지 않고 전방대상피질의 직감처럼 항상 주변에 원형(圓形)을 그리려고 합니다. 반성을 잘해낸다면 작은 초월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초월이 가능하다면 훌쩍훌쩍 건너뛰고 생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다 하나하나 살아내고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내면의 감시 역시 사회적인 것입니다. 시에는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것에서 출발한 언어의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은영 시인이 추천사에서도 말했듯 이번 시집은 “깊이와 길이”에 놀랄 정도로 시의 폭도 넓고 편수도 많습니다.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이나 특징은 무엇인가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2015년, 창비)를 출간하고 5년 동안 발표한 150여편의 시 중에서 3분의 2를 실었습니다. 오히려 좀 못한 시, 틀어진 시, 미완에 머문 시에 애착이 갑니다. 자신을 완전히 아는 시란 없습니다.
    더러 밖과 안에서 일어나는 떠돎과 소란함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저의 의식과 언어가 약간의 혼돈과 어둠 속에 있길 바랍니다. 그것이 언어를 다시 손잡게 하는 감각의 회복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소란과 혼돈, 어둠 하나하나가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그것들로 에워싸이지 않는다면 저도 저의 시도 어떤 의미에선 죽은 것이 될 것입니다.
    문학은 공적인 도구지만 매우 사적인 장르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공적인 것에 그토록 매달리진 않을 것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와 이유를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오히려 실패작에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약(弱)」 이나 「헤어지다, 그 겨울 혜화역에서」 「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 「천장을 쳐다보다」 「밤의 땅속으로」 같은 시들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치열하게 싸운 자에게만이 몇개의 이빨과 손톱이 남을 것인데 저의 손톱과 이빨 자국은 자신에게 남아 있을지 의문입니다.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나 삶의 계획 등이 궁금합니다.
    허무란 말이 등을 비춰주는 불빛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은영 시인이 “그는 계속 잊고 계속 기억하며 끊임없이 이어 쓸 것이다”라고 한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세월을 따라가고 또 역류하고 흘러가지만 언어의 초월에 의지합니다. 그러려고 시를 썼던 것이니까 그 이상의 삶과 처지는 시와 저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 땅의 수많은 시림(詩林) 한쪽에 서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리고 떠나온 속초 쪽으로 내려가게 되길 바랍니다. 그곳에 산과 바다와 오래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산문 중에서]

    시는 믿을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존재한다. 경황없는 세월 속에서 한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멈추어본다는 포즈이며, 한편의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또 부단한 떠남의 결의이다. 시는 플랫폼에 내리고 열차는 다시 떠난다. 방황은 시 앞에서 머뭇거린다. 언제나 그는 비정치적이면서 정치적이었고 본질적이면서 초월적이었다.
    땅에 떨어지는 빠른 빗방울처럼 재촉해서 남은 길을 시여, 어서 뛰어가자. 바람이 뿔을 뚫고 가듯이 말이다. 그가 도착하지 않아도 시는 이미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2020년 코비드19의 봄, 양평에서
    고형렬

    추천사

    이 시집을 읽으며 세번 탄식한다. 시인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에 놀라서.
    시인은 새다. ‘세상의 모든 먼지를 자기 몸으로 끌어 모아서 하늘로 올라가는 구름’ 같은 새. 그와 함께 높이 올라가면 세상의 많은 구멍이 보인다. 하나의 구멍에 눈을 대고 보느라 우리가 잊은 아흔아홉개의 은빛 구멍이 반짝, 그의 시 속에서 빛난다.
    시는 소음이다. “존재의 표시 같은 진공청소기의 소음을 나는/기다리고 있었다”(「천장을 쳐다보다」)고 시인은 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먼지를 빨아들이며 내는 소음 같은 것이 시란 말인가. 사물들은 먼지처럼 부서지고 흰 구름처럼 흩어지고…… 허무의 심연에 대한 그의 증언을 읽고 있노라면 가지와 잎, 꽃, 열매가 모두 칼이 된 채 거꾸로 자라는 날카로운 나무에 내려앉은 새처럼 떨린다.
    그런데 허무를 노래하는 이토록 긴 시집이라니! 시인은 어쩌자고 또 환상의 ‘나무구름’을 만든 것일까? 그가 “계속이란 말이 가장 시적인 언어”(「노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잊고 계속 기억하며 끊임없이 이어 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맨 나중에 온다면/가장 아름다운 시는 모든 것의 맨 끝에/서 있어도 괜찮”(「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은 것이니까. 시는 모든 것의 시작과 함께하며 모든 것이 소멸하고 구원받은 뒤, 맨 마지막으로 소멸하고 구원받으리라.
    - 진은영 / 시인

    목차

    제1부 가까운 그 빛의 추억 같은
    물고기의 신화
    풀편(篇)
    파도의 시
    사북(舍北)에 나갔다 오다
    흰 구름과 풀
    돌의 여름, 플라타너스
    약(弱)
    건너갈 수 없는 그 빛을 잡다
    나뭇가지와 별을 쳐다보며 1
    나뭇가지와 별을 쳐다보며 2
    과학의 날
    감자
    전철 인생

    용문산엔 노숙자가 없다
    UFO
    이미 나는 그때 죽었다
    멸치 1
    두마리 고양이
    종로 5가에서 사가지고 온 달리아 뿌리
    새들의 죽음
    다시 오지 않는 길에 서서
    오늘 저녁 오리들은 뭘 먹지
    그 집 아이

    제2부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부지방에서 살고 있다
    흰 비둘기 아파트
    203호 우편함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에 대한 신청
    그는 작은 사진 속에서
    비선대(飛仙臺)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1
    헤어지다, 그 겨울 혜화역에서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서울의 겨울을 지나가면
    써지지 않는 시 한편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외설악
    나여, 오늘 촉석루나 갈까요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2
    하나의 구멍과 소외된 아흔아홉의 구멍
    선풍기 나라
    거미막을 밟다
    천장을 쳐다보다
    롤러코스터, 어디까지 보이니?
    밤하늘의 별들이 좀더 밝았으면
    흰 구름의 학이 되어
    벌써 2020년대가 왔어요

    제3부 먼지 사람들
    사람 비스킷
    저녁의 상공(上空)
    죽은 시인의 옷
    멸치 2
    먼지의 패러독스
    스티코푸스과의 해삼
    노크
    아버지 게놈 지도 한장
    흰 구름과 북경인(北京人)
    물방울, 물방울, 오직 물방울만
    너의 나라 다도해에서
    고층 지붕 위의 남자
    또 공항으로 갈 때가 되었나
    가족의 심장 속에서
    아로니아의 엄마가 될 수 있나
    이층을 쳐다보는 논개구리
    시인별을 마주 보는 밤
    오늘 망각의 강가에
    표선(表善)에 간 적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달
    사서함의 가벼운 눈발
    서울, 어느 평론가와 시인과 함께
    서울 사는 K시인에게
    보청기 사회

    제4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연한 주황색
    도무지 슬프지 않은 어떤 시간 속에서
    둥그런 사과
    밤의 밤을 지나가다
    밤의 땅속으로
    수저통
    날뛰는 시간의 치마(馳馬)
    그 여자 기억상실 속에서
    지네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착각
    영혼과 싸움
    둥근 열매를 쳐다보다
    엉뚱하게 태양에게
    죽은 어느 청춘의 도서관에서
    서 있는 불
    공포의 시집이 도착한다
    인형괴뢰사
    총알오징어
    꽃씨
    폐렴의 시대
    내부의 나뭇가지
    어느 빌딩의 일조권에 대해
    부패의 세계 속에서는
    그 도시, 백층 기념 축시
    슬픈 거실(居室)
    시의 옷을 입다

    시인의 산문

    본문중에서

    고성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북천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눈이 내려도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 살아간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바다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북천과 바다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더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나와 북천과 바다는 만날 수 없다
    오늘도
    그 만날 수 없음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며 길을 간다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중에서)

    시인들은 서로 다른 말로 나타났다가 사라져간다
    늘 아쉽지, 구름처럼, 시와 언어는
    먼저 간 것들보다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의 미완이다

    나는 나의 얼굴을 감싸는 나와 함께 살아간다
    죽음까진 같이 갈 것이다
    시는 늘 미안해서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쓸 수 없는 것까지 쓸 수 있다면
    불가능한 생각들을 불러 모을 뿐이다, 나는
    ( '거미막을 밟다' 중에서)

    죽은 시인들의 시는 얼음을 깨뜨리는 얼어붙은 먼 도시의
    눈보라 치는 아침에 도착한다

    죽어 있는 시인의 시는 시인이 죽어 있기 때문에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시인의 시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시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일 살아 있는 시인이 죽으면
    살아 있던 시인의 시는 죽은 시인의 강설로 돌아올 것이다
    시는 시인의 끝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들의 손에서 풀 냄새가 난다
    시인이 죽어서 자신의 시를 볼 수 없을 때 시는 옷을 입는다
    시는 혼자서 아름다워진다
    ( '죽은 시인의 옷' 중에서)

    먼지는 문명과 지혜의 문제일 뿐인가
    먼지는 먼지에게 아무런 문제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죽음의 죽음의 죽음의 옷을 껴입은
    고농도 초미세먼지의 시절이
    비로소 우리에게 도착했다, 도착했다
    하늘을 점령한 먼지의 세계, 소리 없는 폭력, 시위
    먼지의 일상, 먼지의 허무
    먼지의 권태
    (…)
    시 속에서 책 속에서 뇌 속에서
    비로소 먼지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는 먼지를 뒤집어썼다
    먼지의 시대 속에서 살게 된 이 먼 미래에 다다른
    오늘, 우리는 먼지의 지구에서 살아가는
    먼지 사람이 되었다
    ( '먼지의 패러독스' 중에서)

    타인의 삶에 노크한다 타인의 눈에 노크한다
    노크는 폭력일 수 있다

    (…)

    누군가 나의 어둠 속에 대고 외친다 목이 찢어지게
    계속, 귀찮은 노크
    계속이란 말이 가장 시적인 언어, 그곳은
    귀찮은 연민으로부터 가장 먼 곳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나의 가슴은 너의 등에
    나의 말은 너의 말귀에 나의 무감은 너의 직설에
    나의 등은 너의 얼굴에 대하여

    너의 배는 그 무엇에 대하여
    만질 수 없는 너의 손등은 또 이름도 없는 그
    무엇에 대하여
    서로 말하지 않는다 이런 유의 사태에 대해서
    ( '노크' 중에서)

    도시에서 시가 죽었다고 마음속에서도 시가 죽습니까

    저 문명 속에서 매일매일 죽은 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묻힐 것입니다
    시는 죽음 속에서 흙을 밀어올리고 피어날 것입니다
    시는 마지막 날을 자기 눈 속에 떠올릴 것입니다
    겨울나무 가지를 지나가는 삭풍의 기억으로
    먼 훗날 차라리 죽은 시들을 찾아 꺼내 읽을 것입니다
    그 시의 이름과 말들
    나의 검은 손을 들어 바라보듯이

    지난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건너가는 이 시간 속에서
    누가 시를 쓰고 있나요
    ( '시의 옷을 입다'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54.11.08
    출생지 강원도 속초
    출간도서 44종
    판매수 2,655권

    낯선 현실과 영토를 자기 신체의 일부로 동화시키면서 내재적 초월과 전이를 지속해가는 고형렬은 15년 동안 삶의 방황소요와 마음의 무위한 업을 찾아 이 책, 장자 에세이 12,000매를 완성했다.

    속초에서 태어나 자란 고형렬(高炯烈)은 「장자(莊子)」를 『현대문학』에 발표하고 문학을 시작했으며 창비 편집부장,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 을 출간한 뒤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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