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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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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서평

    “무시무시하다 그리움이여
    지워지지 않은 눈빛이여”
    세상의 모든 눈빛들과 일상의 먼지들조차 감싸 안는 손택수의 신작 시집


    *본 보도자료에는 시인과의 서면 인터뷰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등단 20여년 동안 네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 시인으로, 탄탄한 시세계를 펼쳐 보이는 손택수 시인의 신작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가 출간되었다. 농경사회적 상상력과 민중적 삶의 풍경을 담금질해냈던 손택수는 이번 시집에서 현실의 간난신고나 일상의 먼지 같은 순간들조차 빛나게 하는 따뜻하고 살뜰한 시선을 보내는데, 단순히 세월과 연륜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시적 경지에 이르렀다 평가할 만하다. 여백의 아름다움, 간결함의 미학, 풍성한 시적 리듬의 실험 등 다채로운 시적 향취를 선보이면서도 현실과 시인의 삶, 혹은 삶다운 삶에 대한 궁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시정신이 돋보이는 시집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다.

    세월과 일상, 여유와 넉살로 빛난
    손택수가 터득한 시적 경지


    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힘들겠지만, 시집을 펴낼 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즐거움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경우 앞선 네 시집을 소개하는 문구들을 살펴본바 ‘가족과 고향’([호랑이 발자국]) ‘민중적 시정과 대지의 삶’([목련 전차]) ‘도시적 삶의 애환’([나무의 수사학]) ‘삶의 안팎을 성찰하는 사유’([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였다. 강약의 변화와 시정의 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 여정을 거쳐, 다섯번째 시집에 이른 손택수는 한결 여유롭되 넉살이 늘었고, 힘은 빼되 간결함은 더한 시편을 써내려갔다.
    시인의 여유와 넉살을 두고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송종원은 ‘무구함’으로 읽어낸다.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냉이꽃」)가 나이 쉰이 되어서 깨달은 것은 비록 하잖을지라도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일 터이다.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시집의 쓸모」)하는데, 시인은 책을 슬쩍 밀어버려 ‘고소한 복수’를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지만 결국 뜨끈한 된장국처럼 ‘상한 속’을 달래주는 시집의 ‘쓸모’에 공감한다.
    송종원은 이번 손택수의 시집을 설명하는 몇가지 키워드 중에 ‘기쁨도 슬픔도 아닌, 아슴아슴 있는 일’이라는 표현을 택하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묵직하고 진지하게만 바라보던 시선이 한결 가벼워진 덕이라고 해석한다. “못물에 꽃을 뿌려/보조개를 파다//연못이 웃고/내가 웃다//연못가 바위들도 실실/물주름에 웃다”(「연못을 웃긴 일」)와 같은 시구들은 시각적인 단출함뿐 아니라 독자들조차 슬며시 웃게 만드는 상상력을 보이되 시로써 ‘삶의 풍요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미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시인이 터득한 경지에 은근슬쩍 독자들을 청하는 시인의 ‘너스레’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경지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과 끝을 알 수 없는 소재들은, 중견에 이르러 으레 도달한 ‘먼 곳’을 가리키는 수사학이 아니라 손택수 특유의 유순하지만 당당한 시선을 증언해준다.

    손택수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질의: 편집자)

    -이번 시집을 묶으면서 각별히 집중했던 주제나 이야기가 있으셨는지요?

    시는 그늘에서 와서 그늘로 가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명명되는 순간에 사물들을 소외시키기 쉽고, 존재는 누구나 이력서나 약력 따위로는 정리될 수 없는 저마다의 비밀들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세계도 그렇겠죠. 이미 노래했지만 정간보에 기록할 수 없는 울림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중 “개념 너머에 들판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제도와 질서 혹은 개념들이 망각한 들판의 말들을 받아쓰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시가 그런 그늘들을 오래 주시하면 뻔하게 나열된 질서들을 재구성하는 힘이 생깁니다. 자연스럽게 리듬과 분위기, 의미화의 욕망을 부추기면서도 거기에 저항하는 독특한 소리의 자장권이 형성되죠.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사전이나 지식 검색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감각적 사건에 시가 닿기도 하는 겁니다. 반복할 수도 없고 복제할 수도 없는 그런 집중, 어떤 무한의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혹은 함께 살아 있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나열적인 일상의 먼지들 속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이 어떤 주제나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를 쓰게 되면 수학공식 같은 게 되기 쉬운데 시집을 묶고 나서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흐름이 잡힙니다.

    -시 전반의 정조에서 변화가 느껴진다. 삶에 대한 태도의 여유랄까, 너스레, 뭔가 달라진 듯한 느낌이다. 단순한 나이 탓은 아닐 거 같다.
    시는 항상 ‘영원한 현재’의 편이니까 시에서 연륜이 느껴진다고 하면 시인으로선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는데 다행입니다. 책임편집 에디터의 느낌을 존중합니다. 15년 전에 두번째 시집 『목련 전차』를 편집해주셨죠. 그때 오자 하나 없어서 황홀했던 기억이 새뜻하네요.(웃음) 그 사이에 두권의 시집을 더 냈는데 『나무의 수사학』과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입니다. 초기에 꼬리표처럼 붙어다닌 ‘자연’이나 ‘농경문화적 상상력’ 혹은 ‘서정’이나 ‘오래된 미래’ 같은 수식들을 은근히 즐기면서도 깝깝했던 게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그 두권의 시집은 도시공간을 전경화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자의식을 돋을새김해보려고 했어요. 그게 30~40대 제 삶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요. 말하자면 기억에 의한 시쓰기가 ‘지금, 여기’로 옮겨온 거죠. 그러면서 삶의 중력에 짓눌리거나 찌든 언어들이 틈입해 들어왔습니다. 저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삶도 언어도 다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으니까요. 아마도 그런 통과의례 뒤의 시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드리자면, 구양수는 시가 가장 잘 떠오르는 세곳으로 ‘말잔등, 침실, 화장실’을 꼽았죠. 이 세곳이 이성이 아닌 몸에 가장 가까운 장소들이잖아요? 시인은 말잔등을 타고 여행을 하고 침실에서 꿈꾸고 화장실에서 시름을 내려놓듯이 끝없이 움직이고 꿈꾸고 자신만의 내밀한 영역을 만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죠. 이런 공간들도 일상은 일상인데 사실 비일상에 더욱 가까운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미당이 「시론」이란 시에서 “제주 해녀도 제일 좋은 전복은 님을 생각해서 부러 따지 않고 바닷속에 부러 놓아둔다”고 했습니다. 일터인 바다를 사랑이나 신화 같은 비일상의 공간으로 바꾼 비법이 거기에 있는 거죠. 일상 속에서 비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시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비일상은 이번 시집에선 ‘애도’나 ‘상실’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농경문화시대를 상징하는 할머니와 근대화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 보낸 애도의 시간이 그리움의 세계를 열어주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그리움은 슬픔이긴 하지만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거울에 사물들이 더 잘 비추인 거겠죠. 슬픔의 선물이 아닌가 합니다.

    -작년에는 첫번째 동시집을 출간했다. 동시로도 등단했으니 당연할 수 있는데, 어떤 마음이었나?
    우리의 시사가 증명하듯이 정지용과 백석, 박목월과 윤동주, 오규원, 최승호, 안도현, 함민복 등 좋은 시인들은 하나같이 동심을 간직한 분들입니다. 동심을 저는 질문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고 공감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작은 잘못에도 죄스러워할 줄 아는 능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시는 아니고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쓴 ‘송아지’라는 동시를 소개해볼게요.

    “송아지 눈은 크고 맑고 슬프다/그런데 송아지 국물은 맛있다/나는 어떡하지?”

    재밌고 아름답죠? 아이는 송아지의 눈앞에 멈춰 서서 그 골똘한 정지 속에 여린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모순을 고백하죠. 그러고는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떡하지?’ 이 단순한 질문은 사실 인류의 참 스승들이 인간은 자연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를 두고 던진 화두와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멈추고, 고백하고, 질문하기! 좋은 글쓰기의 모든 것이 이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게 동심인 거죠. 피카소는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가란 자기 안에 깃들어 있는 존재의 시원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인데 자라면서 자기 안의 예술가를 망각하게 됩니다. 피카소 식으로 말하자면, 동시는 내 안에 숨어 있는, 그러니까 많이 알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송아지의 눈을 들여다보는 가난한 마음의 아이를 찾아내게 해줍니다. 세월호만 바다에 침몰해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자기 안의 바다에 그런 아이를 수장시키고 있는 줄도 몰라요. 어른이 되기 위해 ‘가만히 있어!’라고 강제한 뒤 망각한 저마다의 동심을 회복하면 지금의 일그러진 우리 얼굴이 보이겠죠. 그래서 저는 동시를 시의 오래된 미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시집에도 그런 아이의 눈빛이 담겨 있을 거에요.

    -해설은 송종원 평론가가, 추천사는 김민정 시인이 썼다. 가깝고 인연이 많은 분들이신데?
    좋은 귀명창들이죠. 분에 넘치는 글들을 받아서 좀 얼떨떨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품은 읽는 이를 통해 재창조될 자유가 있으니까, 오독의 권리까지를 포함해서 저는 그분들의 감상을 고스란히 다시 곱씹는 독자로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또 어떤 대화적 관계가 형성되고 제 작업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죠. 작년에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만난 퓰리처상 수상 시인 포레스트 갠더의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네루다를 이야기하면서, 사랑의 시인인 네루다가 군부의 총탄에 죽어가는 소녀를 묘사할 때 그 끔찍한 장면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은유의 아름다움을 저만치 저버리고 여의는 모습 속에서 어떤 윤리감을 의식한다고 했어요. 제 시에서 그런 걸 이야기할 수 있다니 좀 충격이었습니다. 예전에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할 때 축사를 오신 김춘수 시인께서 “손군의 시는 너무 소박해”라고 얘기한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저는 “선생님, 저의 소박은 방법적인 겁니다”라고 답하긴 했지만 그런 말씀들이 오래오래 나침판 역할을 하더라고요. 앞으로 그런 귀명창들을 만날 기대로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마치 첫시집을 내는 것 같아요.(웃음)

    -노작문학관 관장을 맡고 계신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가? 강단에 선다거나, 후배들을 가르친다거나 하는 계획은 없으신가?
    문학관 뒷산에 노작의 유택이 있어서 ‘나는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니까 눈물의 릉을 지키는 능참봉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말 못할 사정은 이번 시집엔 싣지 않았는데 「누릉」([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이라는 시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노작이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눈물이 있는 곳이면 다 자신의 왕국’이라고 선언했잖아요? 저는 그걸 문명과 자연, 언어와 사물, 삶과 죽음, 성과 속 사이에서 균열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작고 여린 존재들의 편에서 살아가야 하는 근대적인 시인의 운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인연이 없는 곳이라 망설였는데 죽음을 마주하는 천직이라 생각하고 새 스승을 한분 모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노자도 딱 한번 출사한 적이 있는데 그게 그 당시의 ‘도서관장’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저에게 그런 인연을 허락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릴 일이죠. 여기서 연극제도 하고, 잡지도 내고, 출판학교나 창작강의 같은 과정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방법 중의 가장 좋은 방법이 가르치는 거라고 하는데 그런 기획들도 어느 정도는 가르치는 일이 아닌가 스스로 위안을 삼아봅니다. 당분간은 여기서 일상에 집중하고 다음 시집 준비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려고 합니다. 어떤 시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시인의 말]

    거위와 점등인의 별에서

    스물다섯에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연극판을 기웃거리다가 철 지난 포스터처럼 뜯겨져서 거리를 떠돌아다닌 뒤의 일이었다.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친구들은 졸업을 준비할 나이였으니 낙오병이라는 자괴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늦은 건 없어. 낙오한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도 있겠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나의 낙천주의는 경쟁을 외면하는 습관에서 온다. 남쪽 바닷가 소도시의 산골 마을에 짐을 푼 나는 무엇보다 만(灣)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교정으로 거느린 캠퍼스가 좋았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섬을 품은 바다를 산들이 어깨를 겯고 호수처럼 아늑하게 품어주었다. 그 바다가 바로 임화의 시 「현해탄」의 바다였다.
    바다가 캠퍼스라면 소라와 게들, 말미잘과 교우 관계를 맺으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병들어 남행한 임화처럼 나는 치자향이 좋던 가포와 장지연 열사의 유택이 있던 현동과 덕동 바닷가를 떠돌며 자취 생활을 하였다. 일부러 도시 외곽을 선택해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불편을 복으로 삼을 줄 아는 은자(隱者)의 후예라도 된 것처럼 은근한 긍지가 나를 제법 오똑하게 했다.
    강의를 마치면 학교에서 야간 수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근로장학생’이라는 좀 멋쩍은 딱지가 붙은 나의 첫 임지는 대학원 건물이었다. 청소를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퇴근을 하고 나면 아주머니들의 쉼터가 초소로 바뀌었다. 책상 하나와 목제 침상 그리고 낡은 갓등이 있는 오두막에서 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습작을 하였다. 혼자서 하는 습작에 진척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의 습작 방법이란 그저 더 많은 책을 읽고 좋은 시집을 만나면 필사해보는 것뿐이었다. 오른쪽 검지에 펜혹이 생길 때까지 필사를 하다 보면 뻐근해오는 어깨에 말의 근육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서로 길이가 다른 투수의 팔처럼 나는 글쓰기 신체로 몸을 바꾸는 변신의 고통을 달게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의 수더분한 선임들이었던 정문의 수위 아저씨들은 야경주독하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출근과 동시에 수위실에 틀어박혀 소설책이나 파고 있는 나의 해태를 매번 눈감아주었다. 뜻밖에 내가 근무를 제대로 서나 안 서나 꼬장꼬장한 잣대를 들고 삼엄하게 감시한 선임은 따로 있었다. 학교 연못에 터를 잡은 그는 쉴 틈 없이 순찰을 돌았다. 도르래 소리 같기도 하고 마치 녹슨 철문을 열었다 닫을 때처럼 쇳소리가 나는 그의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는 진폭이 꽤나 커서 그가 바로 이 대학의 터줏대감임을 능히 알게 하였다. 하긴, 한밤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소리가 나면 득달같이 그 요란한 호각을 불며 출동하였으니 내 수위 업무의 태반은 그가 본 것이나 다름없다. 가을밤 창문 밖을 온몸으로 하얗게 프레시를 비추며 걷는 그를 보면 적이 안심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심지어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때조차 하얗게 깨어 있을 줄 알았다. 경비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나 해야 할까.
    그 경이로운 수위 선임은 거위였다. 노을이 지면 나는 뒤뚱거리는 거위와 함께 저물어가는 교정에 가로등을 켰다. 멀리 섬들에도 접선 신호처럼 불이 들어오고 하늘에도 개밥바라기 별이 켜지면 나의 대학도 어느새 점등인의 별이 되었다. 새벽이면 서리에 으슬으슬 입술을 깨물고 떨고 있는 별들에게 이제 질 때가 되었다는 신호로 스위치를 내리기 위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때도 거위는 나와 함께였다. 가로등 스위치 오르내리는 소리를 따라 천체가 회전하는 것 같았을 때, 늦깎이 대학시절의 열패도, 실패로 얼룩진 습작기의 낭패와 가난도 조금은 견딜 만한 것으로 바뀌어갔을 것이다.
    수위실에서 나는 짬이 날 때면 대학원생 선배들의 구두를 닦았다. 어느 명절 앞날이었다. 고향 내려갈 준비로 다들 어수선할 때, 식사를 마치고 수위실에 들른 같은 과 조교 선배의 깨어진 구두코가 보기 참 딱했다. 상처에 연고라도 바르듯이 코에 까무스름 구두약을 바르기 시작한 것이 마칠 때쯤 해서는 구두 전체가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아마 내게 세탁 기술이라도 있었다면 구겨진 옷주름을 수평선처럼 좍 펴주고 싶었으리라.
    그 이후부터 대학원생들의 구두가 수위실을 ‘구두 병원’으로 만들었다. 소문이 퍼져서 행정실 직원들의 구두까지 순번을 기다리는 일이 일어났다. 생수병을 오려 만든 내 저금통엔 슬며시 놓고 간 지폐들이 모여 한 학기 장학금이 되었다.
    어느날 수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가는 길에 가끔씩 부딪치던 행정실 직원이었다. 그는 오래 망설이던 말을 겨우 꺼내듯이 수줍게 점심을 같이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그는 몇 년간 지켜보았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동생 같아서 그저 밥 한끼 사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안경 너머에서 오는 그 깊은 눈빛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엔 당시 내가 한창 빠져 있던 백석의 「고향」에서 보았던 온기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타향에서 혼자 앓아누워 있던 시인이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고 노래한 의원의 그 온기 말이다. 나 역시 그의 눈빛에서 떠나온 부모와 고향의 흙냄새를 마주하였으리라.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밥을 대접받았다. 그 ‘밥심’으로 시를 쓰고 책을 만들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물론, 밤새 습작을 하던 나 대신 순찰을 돌던 그 극성스럽던 거위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

    2020년 봄 동탄 돌모루에서

    추천사

    여기 적힌 그대로, 그 있는 그대로에 힘입어 시 읽다 말고 나가 걸었지 뭐야.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 했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이라 그랬지. 회복이라는 단어, 보자마자 나 왜 설레었을까 하니 꽃니 자국 같은 말인 거라. 곰취나물 그렇게 잡아당기다 간 거 대체 누구라는 이라니. 덕분에 취해서는, 엉겁결에 착해져서는 내가 내 걸음에 낯설어도 하게 되는 거지. 가만히 앉은 채로 넘어가는 저를 볼 줄 아는 산의 눈빛, 나는 그 산색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거라니. 풀리는 다리, 주저앉는 꼬리뼈…… 허나 시인의 종이가 나를 품고 시인의 바위가 나를 업지 뭐야. 냉큼 그만큼의 가벼운 실림이 싫지 않은 데는 그 덕분에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게도 되어서지. 가을 하늘이 얼마나 푸르냐고 물어오니 나는 이미 말한 가을 하늘을 다시 보게도 되는 거지. 명품을 간파하는 눈이 생겼는데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고 정작 네 살갗에는 무덤덤……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에게 이 구절을 편지로 옮겨주는데 쓰라려, 쓰라립지 뭐야.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은 이 느낌, 붉은빛이라고 서둘러 써둘 참이지.
    - 김민정 / 시인

    목차

    정지
    찬란한 착난
    석류나무와 함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오리나무의 측량술을 빌려서
    있는 그대로,라는 말
    먼 곳이 있는 사람
    아홉 귀에 들다
    물받이통을 비우며
    곰취나물에 꽃니 자국
    연못을 웃긴 일
    차경
    잊는 일
    먹기러기
    백이 날다
    명옥헌
    산색
    파미르 고원
    지게體
    한 켤레의 구두
    쌀암
    서리가 돋는 아침
    백일장과 짜장면
    흉터 필경사
    검은 혀
    붉은빛
    눈빛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저녁의 소리
    자작시
    백경
    지축을 지나다
    파이프오르간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비둘기 일가
    칼새
    기도와 잠
    아침의 신부
    망원동
    시집의 쓸모
    강화의 사랑
    행복에 대한 저항시
    날씨 없는 날씨
    물의 뼈

    골법(骨法)
    세한도
    죽은돌
    제주
    애월
    아픈 섬
    응달
    점자별 1
    점자별 2
    점자별 3
    수백 페이지의 혀를 가진 바람
    수풀떠들썩팔랑나비의 작명가에게
    수연 수진
    우표의 맛
    성냥갑 동물원
    평강 눈종이 공장에 가고 싶다
    물바퀴를 달다
    터치
    채석강
    석양의 제국
    풀과 양들의 세계사
    신록의 말
    뒷짐을 지고 크게 웃다
    냉이꽃
    저무는 돌

    해설|송종원
    시인의 말

    본문중에서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 '먼 곳이 있는 사람' 중에서)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 '지게體' 중에서)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책을 발로 밀어 슬쩍 빼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컥 식탁이 내려앉겠지
    국그릇이 철렁 엎질러져서 행주를 들고 수선을 피우겠지)
    고소한 복수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치고 긁히고 깨진 식탁
    각을 잃고 둥그스름해진 모가 보인다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 '시집의 쓸모' 중에서)

    뼈 빠지게 사노라 살지 못했는가
    죽는 것은 습관이 아닌데 사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행복이여, 어쩌다 나는 행복에 대한 저항시를 쓴다
    행복을 위해서도 저항시를 위해서도 이건 참 서글픈 일
    이다
    ( '행복에 대한 저항시' 중에서)

    나는 나의 시에 성대가 있었으면 한다
    목을 파이프처럼 통과하면서 혀를 만난 말이
    이와 입술 너머의 공기를 진동시켰으면 한다
    공기를 만난 말은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새의 속깃털을 후 불어주고
    어느 귀퉁이 흔들리는 꽃잎사귀를 만나 한눈도 좀 팔고
    책상에 앉아 이맛살 찡그리며 궁상을 떠는
    시 같은 것은 이제 까맣게 잊고, 그예 시인도 잊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 말씀이나 찾아서
    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한다
    ( '수백 페이지의 혀를 가진 바람' 중에서)

    저자소개

    생년월일 1970~
    출생지 전남 담양
    출간도서 22종
    판매수 4,888권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경남대 국문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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