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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 꽃잎보다 붉던 | 박범신 장편소설[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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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박범신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5년 10월 22일
  • 쪽수 : 388
  • ISBN : 9788954638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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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1주 추천도서 리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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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주 추천도서 리뷰 1

책소개

시간에 의해 저물던 일흔넷에 만난 놀라운 축복, 놀라운 고통의 시작!

어느덧 일흔을 맞이한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의 마흔두 번째 장편소설 『당신』. 이번에 저자가 파고든 주제는 노년, 기억, 죽음, 애도 그리고 사랑이다.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문학동네 네이버카페에 ‘꽃잎보다 붉던―당신, 먼 시간 속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일 연재했던 작품으로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평생의 삶과 사랑과 관계, 그 현상과 이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2015년, 일흔여덟 살의 주인공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남편의 죽음을 준비해온 것처럼 부인 윤희옥의 뒤처리는 섬세하고 깔끔하다. 그런데 일을 마친 윤희옥이 경찰서를 찾아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신고를 한다. 그녀는 왜 사망 신고 아닌 실종 신고를 하게 됐을까?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 흐름이 이처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을 한평생의 인내, 헌신, 사랑의 이면을 부인과 딸아이에게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게 된 주호백.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에 윤희옥은 애써 감추고 또 잊고자 했던 지난 삶의 순간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혁명을 꿈꾸었던 김가인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되었지만 그가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간 후 주호백에게 구원을 받은 윤희옥.

인내와 헌신으로 시종하는 주호백의 삶과 사랑은 2009년 치매에 걸리면서 무너져가고, 억눌러왔던 내면이 그 틈으로 하나둘 비집고 나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치매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 주호백을 간병하면서 윤희옥은 그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차례로 거친 후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돕는다. 자신의 몸속에서도 치매가 이미 진행 중이었던 걸 모른 채, 남편의 염원대로 그를 안락사 시키고 제 손으로 남편을 묻었다는 사실을 이내 잊고는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남은 생애 매순간 기다리며 지낸다.

출판사 서평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 당신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이 노년에 부친,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의 슬픈 시간여행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이 신작 장편소설 『당신―꽃잎보다 붉던』을 문학동네에서 펴냈다. 42년 전 문단에 데뷔한 작가의 마흔두번째 장편소설이니, 작가는 매해 한 권의 장편을 발표해온 셈이다. ‘갈망 3부작’ 『촐라체』 『고산자』 『은교』, ‘자본주의 폭력성 비판 3부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비즈니스』 『소금』에 이어 지난해 『소소한 풍경』을 발표한 작가가 이번에 파고든 주제는 노년, 기억, 죽음, 애도 그리고 사랑이다.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문학동네 네이버카페에 ‘꽃잎보다 붉던―당신, 먼 시간 속 풍경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일 연재되기도 했던 이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평생의 삶과 사랑과 관계에 대해, 또 그 현상과 이면에 대해 남김없이 천착해 펼쳐 보인다. 한편으로는 치매 걸린 노인의 정신이 먼 과거의 기억을 향해 달려나가듯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육체가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무너져내려가듯이, 이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노부부가 살아온 과거의 시공간을 종횡으로 오간다.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끝을 맺고 만 ‘당신’의 사랑을 달래고 기리는 진혼곡으로 『당신―꽃잎보다 붉던』은 씌어졌다.

‘박범신 중단편전집’(전7권), 문학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 동시 출간!

노년의 주인공이 지난 삶을 회고하듯 씌어진 소설 『당신―꽃잎보다 붉던』은 작가의 문학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 ‘박범신 중단편전집’(전7권, 『토끼와 잠수함』 『흉기』 『엔도르핀 프로젝트』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빈방』 『쪼다 파티』)과 함께 출간됨으로써, 작가의 지난 42년 작품세계를 회고하고 갈무리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지닌다. 작가의 초기 중단편부터 최근작까지 모두 85편이 실린 ‘박범신 중단편전집’에는, 197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표했던 콩트들의 핵심을 한 권으로 추려낸 『쪼다 파티』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일흔넷이 되던 날 새벽에 비로소 시작한 사랑, 그러나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끝을 맺고 만 사랑


『당신―꽃잎보다 붉던』은 2015년, 일흔여덟 살의 주인공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오랫동안 남편의 죽음을 준비해온 것처럼 부인 윤희옥의 뒤처리는 섬세하고 깔끔하다. 그런데 일을 마친 윤희옥은 경찰서를 찾아 남편이 실종되었다고 신고를 한다. 그녀는 왜 사망 신고 아닌 실종 신고를 택했을까?

한평생을 부인 윤희옥과 딸아이 주인혜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듬직한 남편이자 아버지 주호백, 그는 2009년 두 차례 뇌출혈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생의 말년을 맞이하게 된다. 치매에 걸린 그의 정신이 구심력을 따라 먼 과거의 시간을 향해 나아갈 때, 파킨슨병과 당뇨와 고혈압은 그의 육체를 원심력의 힘으로, 삶의 끝으로 몰고 간 것이다. 주호백의 정신과 육체의 에너지 흐름이 이처럼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로서는 결코 밝히고 싶지 않았을 한평생의 인내, 헌신, 사랑의 이면을 부인에게 또 딸아이에게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생급스럽기만 한 남편의 거친 모습에, 부인 윤희옥은 애써 감추고 또 잊고자 했던 지난 삶의 순간들을 복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소설은 2015년 시점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또 과거끼리 교차하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치매 이후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변한 남편을 새로 받아들이기 위해 윤희옥은 가장 먼저 1950년의 기억으로 거슬러올라간다. 6·25가 발발하기 몇 달 전, 열세 살 윤희옥과 열 살 코흘리개 주호백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도무지 답답한 가슴이 뚫리질 않는다. 소녀를 보는 순간 무슨 얄망궂고 앰한 일이 분명 자신에게 벌어진 느낌이다. 이를테면, 별똥별이 정통으로 가슴속에 떨어졌거나, 이상한 벌레들이 머릿속으로 갑자기 이사 들어와 막 집을 짓고 있는 것 같다.(62쪽)

공감 능력이 유달리 뛰어나기도 했던 소년 주호백은 자신 가슴속에 ‘정통으로 떨어져내린’ 윤희옥에게 한순간 사로잡히고, 한평생 의심 없는 사랑으로 그녀 곁에 머문다. 둘이 성인이 되었을 때 김가인이라는 인물이 돌연 등장했다가(1959년), 둘에게는 쉬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 채 또 홀연히 떠난다(1969년). “누구나 제 마음대로 조정이 안 되는 쪽배를 타고 흘렀던” 시절에 혁명을 꿈꾸었던 김가인에게 윤희옥은 온 마음을 빼앗기지만, 그 시절은 김가인이라는 사람을 송두리째 그녀에게서 빼앗아가고 만다. 1964년, 김가인은 희옥의 뱃속에 아이를 남기곤, 소식은 물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감옥으로 붙잡혀 들어간다. 처녀가 애를 배는 걸 상상할 수 없던 시절, 오갈 곳 없이 무작정 새벽 도망을 친 윤희옥을 흔연히 받아들여 구원한 건 십수 년 전의 코흘리개 주호백이다. 인내와 헌신으로 시종하는 주호백의 삶과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2009년, 노년의 주호백이 치매에 걸리면서 한결같았던 그의 삶에 균열이 생겨나고, 그가 억눌러왔던 내면이 그 틈으로 하나둘 비집고 나오더니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1968년 수두에 걸린 딸아이를 주호백과 함께 내팽개치고 두 달여 김가인과 지내고 돌아온 윤희옥에게 ““인혜야, 엄마 왔네. 저어기, 저기 엄마!” 원만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들어와요. 그러고 서 있으니까 애가 울잖아요” 덧붙이던 그”가 2013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번은 그가 나의 뺨을 후려친 적이 있었다.

(……) 누군가의 광포한 힘에 상반신이 들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손바닥이 사정없이 내 뺨으로 날아들었다. 살똥스러운 손짓이었다. “나쁜 년!” 그가 말했고, 이어 그의 다른 손이 반대쪽 뺨으로 날아왔다. 얼마나 거칠었는지 내 몸이 침대 밑으로 나가떨어졌을 정도였다. “네년이 그러고도 에미야? 수두에 걸려 죽을 둥 살 둥 하는 어린것을 팽개치고 사내놈을 만나러 집을 나가?” 그의 눈에서 사뭇 불길이 솟아나왔다. 잘못하면 나를 죽이려고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았다. “나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를 기어들어와! 인혜는 이제 네 딸이 아니야. 내 딸이야. 그러니 당장 다시 나가란 말이야! 나 혼자 키울 수 있어!” 그가 소리쳤다.(201쪽)

치매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윤희옥은 그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차례로 거친 후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돕는다. 말년의 주호백은 잠깐 제정신이 들 때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미욱한 방식으로나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윤희옥은 그가 생전에 특별히 사랑했지만 지독한 알레르기 때문에 결코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청매꽃을 구해, 주호백의 염원대로 그를 ‘안락사’시킨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고 여긴 희옥은 집 마당에 새로 매화나무를 심으려고 파놓은 구덩이에 남편을 몰래 묻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다. 윤희옥은 그러나 제 손으로 남편을 묻었다는 사실을 이내 곧 잊고는,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남은 생애 매순간 기다리며 지낸다. 윤희옥의 몸속에서도 치매가 이미 진행중이었던 것이다.

밤새들이 꾹꾹 꾸르륵 하면서 가을 숲으로 날아갔다. “근데 얘, 네 아빠가 지금까지 돌아오질 않는구나.” 어머니가 잠시 후 덧붙여 말했다. “이 양반 들어오기만 해봐, 내 가만두나!” 나는 후훗, 하고 웃었다. “왜 곤장이라도 치게?” 매화나무 붉은 잎이 어머니의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내가 뭐, 주호백에게 곤장이라고 못 칠 것 같니?”(386쪽)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 봄, 이 여름,
이 가을이 아니면 못 볼 꽃을 그냥 지나쳐왔을까”


아빠의 실종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들어온 딸 주인혜와 함께 윤희옥은 제 손으로 땅에 묻은 주호백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오른다. 그녀에게는 주호백의 죽음을 애도하고, 또 그의 넋을 달래는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행길에서 윤희옥은 딸 주인혜에게 그녀를 낳아준 아비 김가인, 그녀를 키워준 아비 주호백에 대한 속 이야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한다. 그 여정에서 딸아이 주인혜는 실종된 아빠를 되찾는 데 실패하지만, 윤희옥은 남편의 본모습을 되찾아 회복시키는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이 의식/여행을 마친 후 윤희옥은 얼마 전 주호백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정신이 그와의 기억을 좇아 먼 과거를 향해 나아갈 때 육체는 죽음을 향해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며, 먼저 간 남편을 뒤따른다.

대학시절 무용을 전공한 윤희옥은 갑갑한 토슈즈를 신어야 하는 발레 대신 신발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춤추는 현대무용에 매료된다. 1960년대 한국에서의 현대무용은 역사가 깊은 전통 발레에 비해 지위와 진로가 상당히 불안정한 편이었다. 현대무용과 발레는 윤희옥에게 이상과 현실이라는 대립쌍이었을 텐데, 결국 그녀는 현실을 택하고 A발레단에 입단한다. 김가인과 주호백이라는 두 남자 또한 그녀에게 이상과 현실 같은 존재이다. 현대무용 아닌 발레를 선택했듯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현실이 주호백이었지만, 그녀는 그 현실을 평생 밀치며 살아왔다. 주호백이 치매에 걸려 윤희옥에게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 현실을 또 자신의 삶을 단 한 번도 긍정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치매에 걸린 말년의 주호백은 인내와 헌신으로 시종했던 이전의 삶을 전면 부정했지만, 윤희옥은 그 모습에서 “관계의 윤리성에서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건 공평함”이라는 걸 깨달았고, “삶이란 죽어가는 긴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우쳤다. 치매라는 고통스러운 질병이 이상과 현실이라는 윤희옥의 이항 대립을 무너뜨리고, 그녀로 하여금 평생 밀쳐오기만 했던 현실을 껴안도록 해준 것이다. 박범신의 신작 장편 『당신―꽃잎보다 붉던』은 우리에게 치매가 선물이라는 역설을, 슬프도록 아름답게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 윤희옥과 주호백처럼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혁명, 1972년 유신헌법 공포,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등을 경험한 세대들에게 인내와 헌신으로서의 한평생 사랑은 그리 낯선 주제가 아니다. 작가 자신처럼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세대에게 작가는 그래서 일생一生의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을 들려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또 젊은 세대에게 이 소설은 앞선 세대의 삶과 사랑을 만나고, 그 이해와 공감의 폭을 확장하는 텍스트가 될 것이다. 박범신 작가는 ‘작가의 말’을 대신한 ‘헌사’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랑에서, 주호백과 닮은 당신, 나는 그러나 정염과 슬픔 사이의 골짜기를 낮은 포복으로 갈팡질팡 여기까지 왔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야, 당연히 사랑이 있지!” 당신은 담담하게 대답했어. 내가 한없이 비루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 나는 이 소설의 작은 뼈 하나를 얻었다네. 사랑의 지속을 믿지 않는 남자 곁에서 그것의 영원성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오랜 당신,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허락을 구하면서, 나이 일흔에 쓴 이 소설을 부끄럽지만 나의 ‘당신’에게 주느니, 부디 순하고 기쁘게 받아주길!

“삶이란 죽어가는 긴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소설 속 주호백은 윤희옥에게 마지막 선물처럼 가르쳐주고 떠난다. 지난 삶에서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추하고 고통스럽고 때론 부끄럽기까지 한 풍경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에는 누구나 서툴기 마련이다. 박범신 작가가 사랑 끝엔 당연히 사랑이 있지, 라는 말에서 “이 소설의 작은 뼈” 하나를 얻었다면, 독자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삶과 사랑을 돌아보고 또 앞날을 기획하는 한 방법을, 자서전적인 삶을 쓰는 ‘작은 뼈’ 하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2015 · 11
2009 - 2015 · 32
1950 · 55
2010 - 2015 · 66
1950 · 93
1959 · 105
2012 - 2015 · 123
1962 · 156
1964 · 164
2013 - 2015 · 182
1965 · 225
2014 - 2015 · 255
1970 - 2015 · 268
1970 - 2013 · 294
1981 - 2015 · 307
1993 - 1995 - 2014 · 344
2014 - 2015 · 363
2015 · 371

에필로그 · 380

본문중에서

치매는 그렇대요. 가까운 시간은 멀고 먼 시간은 가깝다는 거야.(40쪽)

도무지 답답한 가슴이 뚫리질 않는다. 소녀를 보는 순간 무슨 얄망궂고 앰한 일이 분명 자신에게 벌어진 느낌이다. 이를테면, 별똥별이 정통으로 가슴속에 떨어졌거나, 이상한 벌레들이 머릿속으로 갑자기 이사 들어와 막 집을 짓고 있는 것 같다.(62쪽)

그는 평생 동안 나에게 당신의 본심을 감추면서 살아왔다. 울어야 할 때 그는 웃었고, 화가 날 때 그는 침묵했으며, 욕망이 생길 때 그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130쪽)

그를 품고 선 매화나무가 가끔 흔들렸다. 괜찮아. 아빠는 네 곁에 있어.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날이 저무는 중이었다. 나는 손바닥 두 개를 가만히 내 가슴에 얹었다. 인혜와 내가 공통으로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그 점일 터였다.(193쪽)

바보는 지혜롭게 살고 악인은 도덕에 대해 말하기를 즐긴다는 경구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주호백은 바보같이 사는 길을 선택했으나 죄 없는 사랑의 인생으로 시종했다.(211쪽)

지난 몇 년, 나는 분노와 갈망 사이에서 살았단다. 뇌를 쪼그라뜨리는 베타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에 대한, 치매라고 이름 붙여진 비인간적인 병인病因에 대한 분노와 그것에 맞서서 그를 구하고 싶은 끝없는 갈망 사이.(248쪽)

그런데 얘, 허깨비로 살아온 내게, 그것도 일흔이 넘어서, 새로운 기회가 도래한 거야. 경이로운 삶의 실체, 어떤 심지, 뭐 그런 거. 딱 맞는 말은 떠오르지 않지만 어떤, 그래, 삶의 어떤, 이를테면 여실한 뼈 같은 것, 그런 걸 네 아빠인 주호백, 그의 치매 때문에 만났다면 이해할 수 있겠니. 일흔이 넘어서야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거라고 여겨. 늦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그 축복이 너무나 컸거든. 뭐랄까, 여실한 뼈 같은, 그런 사랑이거든. 치매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감추고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능을 차례차례 내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다면, 죽기 전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각성에 도달했다고 나는 느껴. 내 자신도 몰랐던, 원래 내 안에 쟁여져 있던 사랑이 나날이 솟구쳐 오는 그것. 오해하지 마. 연민이 아니야. 경이로운 각성이라고 나는 생각해. 비극이면서 곧 축복인.(249쪽)

그는 두 개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온 게 사실이다. 하나의 인격은 자애와 헌신과 인내로 시종한 관용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의 인격은 상처와 분노와 슬픔 등 보편적 희노애락을 날것으로 갖고 있는 얼굴이다. 거의 평생 나와 인혜에게 그는 첫번째 인격으로 대응했으며, 이 방에 들어와 혼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두번째 인격의 실체와 맞닥뜨리거나 그것의 해방을 경험했을 터이다. 때로 혼자 울고, 때로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벽을 치고, 또 때로 그 모든 감정을 가지런히 하려는 고통스러운 내적 투쟁과 정면으로 마주쳤겠지. 치매가 깊어진 다음 그가 보여준 그 본능적 반응들. 이 방에 간직된 것들은 그러므로 그가 환자가 되기 전 한사코 감춰온 그의 이면에 대한 생생한 증거들이다. 한 지붕 아래에서도 그는 두 개의 인격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 그로 인한 내적 분열을 거듭해왔다는 뜻이다.(259쪽)

당신 가슴속을 좀 들여다보구려.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당신 가슴속인데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지어서 미안해요. 미웠던 적은 있었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참, 아무것도 후회하진 말아요. 후회하면 당신 가슴속에 지은 내 집이 무거워질 거요. 아이고, 그 집이 무거워지면 당신, 무슨 수로 걷고 춤출 수 있겠소. 당신은 춤출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266~267쪽)

저자소개

박범신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46

저자 박범신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여름의 잔해〉 당선으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소외계층을 다룬 강렬한 사회 비판적 중ㆍ단편소설들이 담긴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덫〉〉을 펴냈고, 이어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 중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1993년 작가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돌연 절필을 선언, 히말라야로 떠나기도 했다. 1996년 인간영혼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한 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로 다시 문단에 돌아와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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