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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넓이 : 이문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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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얼마나 많은 오래된 기도가
저 달을 향해 올라가는 것인가”
등단 40주년, 7년 만의 신작, 유일한 감각의 서정 시인 이문재
하염없는 걱정과 연민으로 써내려간 간절하고 뜨거운 시


1982년 시 동인지 [시운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뒤 생태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이문재 시인의 신작 시집 [혼자의 넓이]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여섯번째 시집이다. 오랜만의 시집이라 반갑기도 하거니와, 등단 40년을 맞이하는 해에 펴내는 것이라 더욱 뜻깊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본주의 세계와 현대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이 깃든 성찰의 시 세계를 보여준다. “대전란의 화염과 비명” 속에서 신음하는 지구와 “문명 폭주와 기후위기라는 대재앙 속에 제 발로 들어”선 무지한 인간에 대한 하염없는 걱정과 연민으로 기도하듯이 써내려간 간절하고 “뜨거운 시”(이영광, 추천사)들이 가슴 깊이 절실하게 와닿는다. 90편의 시를 3부에 나누어 실었으며, 한편의 시로 대신한 ‘시인의 말’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을 적실하게 대변한다.
낯익으면서도 아주 낯선 ‘혼자’에 대한 질문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이면서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바꿔야 미래가 달라진다”([전환 학교])고 말한다. “질문을 바꿔야/다른 답을 구할 수 있다”([어제 죽었다면])는 것이다. ‘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감성적 담론”([혼자가 연락했다])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몸’과 ‘개인’이라는 화두에 몰두하면서 이전 시집에서 강조했던 ‘세계감(世界感)’ 즉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을 다시 한번 꾀한다. 너무 낯익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우리 몸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낯익지만 낯선 발견’을 찾아내고, 나아가 “안 못지않게 바깥이 중요하다”는 인식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나 또한 가장 귀중한 사람”([얼굴])이라는 깨달음에 닿는다.
시인은 세상을 바꾸려면 다른 미래를 설계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계는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사람 안에도 사람이 있”([사람])다. “타인과 더불어, 천지자연과 더불어 자기 철학을 세워나가”([철인삼종경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혼자서는 깨닫기 힘든 혼자의 팬데믹”(시인의 말)의 혼돈 속에서 혼밥과 혼술을 즐기며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하다가 결국 혼자 죽어가는”([노후]) 이 시대의 모습은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 “독거와 독거가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활발한 독거들의 사회])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시인은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하면서 때로는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혼자의 넓이])하고, “혼자 있어보니/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혼자와 그 적들])는 내면의 성찰 속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 존이구동(存異求同)”([우리의 혼자])의 각성에 이른다.

고민과 통찰이 깃든 ‘시 이전의 시’이자 ‘미래에서 온 시’

일찍이 “진정한 시인은 모두 미래를 근심하는 존재”라고 말했던 시인은 “미래 세대에게 미래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 모두 파국을 맞을 것”([미래에게 미래를])이라고 경고한다. “꽃말을 만든 첫 마음”([꽃말])을 생각하는 초발심을 간직해야 “우리 생의 뿌리”([두번째 생일])인 미래를 기꺼이 맞이할 수 있으며,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줄 때 비로소 “누구도 함부로 미래에 손을 대지 않을 것”([삼대])이라고 말한다. “바야흐로 끝이 시작”된 지금, 시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안팎의 새것을 마중”하기 위하여”([끝이 시작되었다]) “맨 끝에서 다시 시작하”여 “맨 끝에서 맨 처음으로/다시 태어나는”([분수]) 희망을 꿈꾼다. 절박한 심정으로 “지구 걱정”과 “인간 걱정”에 대한 고민과 통찰의 아포리즘이 깃든 이 시집은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빛을 던지는 “시 이전의 시”이며 “미래에서 온 시”(이영광, 추천사)이다.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사회로 가는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끊임없이 신생(新生)을 갈망하는 간절한 시적 발원문”(이홍섭, 해설)이다.

이문재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질의: 편집자)

―『지금 여기가 맨 앞』 이후 7년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강의하고 학교 밖에서는 글쓰기 강좌를 매개로 다양한 시민을 만나고 있습니다. 크게는 문명 전환에서부터 작게는 개인 내면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주요 관심사는 그대로인데, 현실은 더 안 좋은 쪽으로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네요. 임계 상황인데 임계점이 언제일지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과 인류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와 산파가 동시에 필요한 ‘거대한 과도기’라는 시대적 진단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단정한 노인, 품위 있는 노후’가 꿈인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노년이 품위를 위해 갖춰야 할 요건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요즘입니다.

―제목(「혼자의 넓이」) 그리고 수록시를 살펴보면 '혼자'라는 단어가 자주, 주요하게 다뤄지는데, 시인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거리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혼자와 여럿’의 관계는 사실 호모사피엔스가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이래,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들어 사태는 더 심각해졌지요. 제가 관찰하는 ‘혼자’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외되거나 배제된 존재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이탈한 단독자도 아닙니다. 왜 혼자인지 알지 못한 채, 왜 혼자가 문제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혼자가 된 혼자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자각 증세를 자각하지 못하는 혼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설령 자각하더라도 이 혼자들은 원인과 책임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혼자들이 자책, 자괴, 무기력, 우울에서 벗어나야 온전한 삶과 사회가 가능하겠지요. 제가 희망하는 ‘바람직한 혼자’는 시에도 썼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존이구동(存異求同)하는 주체입니다. 타자와 조화롭되 같아지지 않으며, 동시에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면서 보편 가치를 추구한다. 화이부동하기도 쉽지 않고 존이구동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치, 이 두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사회는 물론 인류와 천지자연 사이의 온전한 관계는 회복되지 않을 겁니다. 화이부동과 존이구동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움직이는 균형’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삶의 전환이자 문명전환의 한 방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앞서 언급한 개인과 사회, 인류와 천지자연 사이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저로서는 긴급한 호소를 담으려고 했는데 매번 역부족입니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사라진다는 생각은 시인의 직관만은 아닙니다. 생태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민감한 분들은 누구나 동의하실 겁니다. 저는 ‘인류세’란 말이 무겁습니다. 인류가 지구의 생태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얼마 전 충격적인 보고서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물질 총량이 자연이 만들어내는 물질 총량을 초과했다는 겁니다. 유리, 시멘트, 플라스틱, 아스팔트, 철강 등을 재료로 한 건물과 도로, 각종 제품들이 동식물의 총생산량(질량)을 능가했다는 겁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인간이 만들어낸 물질의 총량은 지구 생명체의 생산량 중 3%를 넘지 못했는데 지난해엔가 50%가 넘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자원을 착취하고 지구 곳곳을 파헤치는 속도와 범위가 얼마나 막대한지 새삼 확인하는 계기였습니다. 여기에다 지구 전체 인구 증가폭보다 전제 인구 중 도시에서 사는 인구의 증가폭이 더 크다는 것도 작지 않은 문제입니다. 현재 75억 인류 중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삽니다.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와 이유를 부탁드립니다.
‘혼자’에 관한 시에 애착이 갑니다. 최근에 쓴 시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번에 시집 원고를 정리하다 보니, 적지 않은 시의 화자가 혼자였습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보다는 밀도가 떨어져서 조금 미안한 몇몇 작품에 더 신경 쓰입니다. 어떤 시는 더 압축할 걸, 또 어떤 시는 조금 더 보완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변명 같지만, 이런 아쉬움과 미안함이 다음 시를 쓰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시 쓰기를 중심으로 시민을 위한 ‘전환 글쓰기’를 확대하고자 합니다. ‘나를 위한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학교 안팎에서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는데요, 이 글쓰기는 한마디로 ‘자기성찰과 재탄생’입니다. 지나온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지금 여기의 나를 객관화하면서 새로운 내일을 설계하도록 하는 글쓰기입니다. 쓰기가 듣기, 말하기, 읽기에 비해 조금 어렵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전환의 근거이자 동력이라고 저는 생각해왔고 매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구조와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청소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명함을 들고 다니려고 합니다. ‘전환 글쓰기 촉진자’.

시인의 말

혼자의 팬데믹

혼자 살아본 적 없는
혼자가 혼자 살고 있다

혼자 떠나본 적이 없는
혼자가 저 혼자 떠나고 있다

혼자가 혼자들 틈에서 저 혼자
혼자들을 두고 혼자가 자기 혼자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 삶을 살고 있다

춤과 노래가 생겨난 이래
지구 곳곳에서 마음 안팎에서
처음 마주하는 사태다

추천사

이문재는 지구를 걱정한다.
지구는 크다. 직경 12,756킬로미터, 질량 6조×10억 톤의 몸집을 가지고 초속 30킬로미터로 우주 공간을 질주하는, 어마어마한 돌덩이다. 맨눈으로 지구를 본 인간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문재는 지구 걱정을 한다.
지구는 작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 프록시마는 4.3광년 거리에 있다. 멀다. 태양계를 식탁 위의 과일 쟁반만큼 줄여도 프록시마는 십리 밖에 있다. 쟁반 속 지구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문재는 하염없이,
지구를 걱정한다. 커서 안 보여도 걱정, 작아서 안 보여도 걱정…… 기실, 이게 진짜 걱정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까봐 근심하던 옛날 기나라 사람 같다. 그런데 ‘기인지우’의 신경쇠약 뒤엔 대전란의 화염과 비명이 있었다.
지구 걱정은 인간 걱정이다. 인간은 문명 폭주와 기후위기라는 대재앙 속에 제 발로 들어섰다. 이문재는 잘 안 보이는 그걸 미리 보고서 자신과 세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광야를 짓고, 거길 떠돌며 외쳐왔다.
그 외침의 이름은 ‘기도’인데, 그에게 기도는 시 이전이고 ‘오래된 미래’이다. 지구가 인간을 위해 결코 기도하지 않는 곳, 그의 뜨거운 시는 다 여기서 나온다. 시 이전의 시. 미래에서 온 시.
이영광 시인

목차

제1부 • 혼자와 그 적들
모란
혼자의 넓이
꽃말
혼자와 그 적들
초발심
어제 죽었다면
분수
우리의 혼자
혼자 울 수 있도록
얼굴
흔들의자
물휴지
남쪽
배웅
발치(拔齒)
대가족
남 생각
침묵에서 가장 먼 곳까지
물의 백서 3
노후
밤의 모란
스트라이크
예술가
모래시계

제2부 •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 당신을
로마서
아파트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 당신을 찾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향월암(向月庵)
별내
초여름
생일 생각
가로등
천산북로
풍등(風燈)
연등 축제
낙엽송
달의 백서 1
약간의 마법이 스며 있는 평범한 이야기
유모차
이웃에게 말 거는 법
또 하나의 가족
공동주택
고독사
안전지
황금률
지슬
녹슬었다
고맙다
증강현실
손 단속
쉬운 것들
오래 만진 슬픔
백서 3
존엄의 사생활
대동강 247킬로미터
활발한 독거들의 사회
사람
마음의 바깥
농업

제3부 • 끝이 시작되었다
지구 생각
소로의 오두막
남향(南向)
두번째 생일
풍향계
지구의 말
어제보다 조금 더
불경
구글어스
1인 시위
천국의 묵시록
끝이 시작되었다
사랑과 평화
평화보다 먼저
파브르 아저씨
죄가 있다, 살아야겠다
발성 연습이다
삼대
모름지기
활보 활보
인터스텔라
전태일반신상
미래에게 미래를
거대한 근황
남녘 사십구재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전환 학교
철인삼종경기
토지 탁구
혼자가 연락했다

해설|이홍섭
시인의 말

본문중에서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혼자의 넓이」 전문

혼자 살아보니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없는 사람 없던 사람
매번 곁에 와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도 시끌벅적

고마운 분들
고마워서 미안한 분들
생각할수록 고약해지는 놈들
그 결정적 장면들이 부르지 않았는데
다들 와서 왁자지껄했다 저희들끼리
서로 잘못한 게 없다며 치고받기도 했다

혼자 있어보니
혼자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나였다
―「혼자와 그 적들」 전문

남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하고
남쪽에
아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바라보는 남쪽은
얼마나 다른가
―「남쪽」 전문

죽어서 살아 있다
이천년 넘게
죽은 채 살아 있어서

기뻐하는 자들은
기뻐하는 자들끼리 기뻐하고
아픈 자들 또한
아픈 자들끼리 아파하고
―「로마서」 부분

그러다보면 등꽃 향기에 취해
오월 한낮이 새카매지고
가까운 지구 밖 어디선가는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이 땅이
하늘의 끝, 천장일 수도 있겠거니 하다가

아니지, 모든 나무의 하늘은
여기 땅이 마땅할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
아니지, 등나무가 땅속에서 수고하는
모든 뿌리를 위해 걸어놓는
연등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
―「연등 축제」 부분

지금 저기
저 높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빛이
만나고 있는 것인가

지금 여기
얼마나 많은 꿈이
얼마나 많은 안부가 안타까움이
저 달을 향하고 있는가

(…)

얼마나 많은 어두운 곳에서
얼마나 많은 오래된 기도가
저 달을 향해 올라가는 것인가
지상의 아픈 마음들 다 받아내는
저 달은 그래서 둥글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저토록 둥글고 밝은 것인가
―「달의 백서 1」 부분

우리의 새로운 광장은 거리
선글라스 끼고 활보
도회지 한복판 교차로 횡단보도 건너
휘황한 상점들의 거리
날마다 커지는 찬란한 본사 건물을 지나
쨍쨍한 햇빛 속으로 활보
탄탄한 어둠 속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함께 활보 활보 활보
―「활보 활보」 부분

저자소개

생년월일 1959~
출생지 경기도 김포
출간도서 26종
판매수 4,342권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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