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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원제 :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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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역사의 종말]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신작으로,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 가지 현상을 분석한다. 인정에 대한 요구, 타자 혐오, 포퓰리즘 정치가 그것이다. 이 현상은 모두 같은 이유, 즉 현대 사회의 필연인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에서 시작된다. 소속감을 갖기 어렵고 인정의 결핍을 겪어온 이들이 민족·인종·성별·종교에 몰두하게 되며,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혐오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개별 정체성을 기반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는 상황은 특정 정체성을 호명하고 자극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출현하기 좋은 토양이 되어준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다를 수 있을까. 후쿠야마가 찾고자 하는 답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 등장하는 사례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의 것이지만, 이와 같은 모순은 정치적 진영논리와 종교의 유무와 지역에 따라 균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 존엄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도모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정치학자의 경고를 못 들은 척 넘어갈 수 없는 이유다.

    출판사 서평

    [역사의 종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신작

    ★ 〈파이낸셜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 〈타임스〉 선정 정치 분야 올해의 책
    ★ 빌 게이츠가 읽은 책


    21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후보 선거 용지가 48.1cm에 이른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35개 정당이 비례대표 후보를 낸 탓이다. 사실 숫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졌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각각의 목소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민주주의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경고장이자 편지는 매우 시의적절한 때에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상반된 두 가지 디스토피아, 즉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분열로 동시에 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쪽에서는 민족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자극하며 동시에 국민 통제를 강화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특정 정체성에 대한 신념으로 뭉쳐 외부와 담을 쌓은 정체성 집단이 출현하면서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공통의 합의가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의 진보가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정신이 쇠퇴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향을 모색한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다를 수 있을까.’ 후쿠야마가 찾고자 하는 답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존엄을 지키면서 동시에 다를 수 있을까’
    인정에 대한 요구, 타자 혐오, 포퓰리즘 정치 사이에서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 가지 현상이 이 책의 중심 테마다. 인정에 대한 요구, 타자 혐오, 포퓰리즘 정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들의 근원에는 현대 사회의 필연인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현상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왜 정체성의 불안과 혼란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이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사람들은 정당, 교회, 학교와 같은 거대 집단을 기반으로 강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별로 없었지만, 적어도 소속감에 대한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계화, 인터넷의 발달,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 대규모 이주, 불평등의 심화, 소수자 운동, 인권 운동 등이 일어남으로써, 과거에 존재감을 지탱해주던 소속과 기존에 유지되던 삶의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는 매일매일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 또한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 되었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속감과 정체성의 안정을 제공해주던 단단한 토대가 사라진 것이다.
    이렇듯 정체성의 안전지대가 사라진 이들은 더욱더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줄 집단에 몰입하게 된다. 정체성의 강조와 재등장은 곧 정체성 결핍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소속감을 갖기 어렵고 인정의 결핍을 겪어온 이들이 민족·인종·성별·종교에 몰두하게 되며,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혐오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개별 정체성을 기반으로 빗장을 걸어 잠그는 상황은 민족을 비롯해 특정 정체성을 기치로 내건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출연하기 좋은 토양이 되어준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백인 민족주의, ISIS 문제, 힌두 민족주의 등이 그 증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백인·서구·남성으로 대표되는, 과거에 기득권을 누렸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집단을 대변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저자는 그러한 시각과 거리를 둔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다원화된 사회에서 여러 목소리가 등장하는 것은 불공평과 부당함에 대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반응이며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미투운동은 성폭력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이해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 법규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흑인인권운동은 소수 집단 시민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강한 자각이 형성되는 데 기여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의 절박한 목소리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정체성에 대한 강조와 정체성 정치의 발흥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어서 민주주의의 가치, 즉 존엄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길은 무엇인가. 후쿠야마의 균형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없던 시기, 정체성 정치가 발흥하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다만 우려를 표하는 것이 있다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돼온 30년간의 추세를 반전시킬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대신하는 편리한 대용물”로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그동안 외면받아온 집단은 관심에서 더욱 멀어지고 이들의 처지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의 것이지만, 이와 같은 모순은 정치적 진영논리와 종교의 유무와 지역에 따라 균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한국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 존엄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도모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정치학자의 경고를 못 들은 척 넘어갈 수 없는 이유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다음의 말로 책을 매듭짓는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다양성이 증가하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되,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더욱 굳건하게 만들 비전을 제시하는 세상 말이다.
    정체성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 운동, 이슬람주의 과격 세력,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정치 현상의 기저에 깔린 공통 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정체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도, 꼭 출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통합으로 향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결국에는 그것이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정치를 치료하는 해법일 것이다.”

    추천사

    지적이고 명쾌하다. 우리에게는 후쿠야마 같은 현명한 사상가들이 더 필요하다.
    -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 [엘리트 독식 사회] 저자

    이 책은 그 자체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위험한 시대에 대한 고발장이다.
    - <이브닝스탠다드>

    치밀하고 지혜로운 책이다. 빠른 속도로 험한 지형을 뚫고, 나아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 <하버드비즈니스리뷰>

    야심차고 도발적이다. 깊은 학식을 갖춘 이 책은 아마도 논쟁을 촉발할 것이다.
    - <퍼블리셔스위클리>

    인간은 누구나 본래부터 존엄성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며 그 욕망은 민주주의의 번영에도 필수불가결하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으면서도 절박한 목소리로 펼친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둘러싼 위협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
    - <커커스리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기적절한 책.
    - <북리스트>

    목차

    서문 006
    1장 존엄의 정치 021
    2장 영혼의 세 번째 부분 035
    3장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055
    4장 존엄성에서 민주주의로 073
    5장 존엄성 혁명 081
    6장 표현적 개인주의 093
    7장 민족주의와 종교 107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129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139
    10장 존엄성의 대중화 155
    11장 정체성에서 정체성들로 175
    12장 국민 정체성 203
    13장 국민의식을 위한 내러티브 225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257
    주 286

    본문중에서

    20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선거 결과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향후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스러웠다. 트럼프의 당선은 그해에 세계를 놀라게 한 두 번째 투표 결과였다. 첫 번째는 같은 해 6월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일이었다.
    ( '서문' 중에서)

    존엄 인정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하나로 묶는 마스터 개념이다. 그것은 백인 민족주의나 대학 캠퍼스에 나타나는 정체성 정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구시대적 민족주의의 고조와 정치화된 이슬람교 같은 보다 넓은 차원의 현상들과도 관련된다. 이 책에서 나는 경제적 동기라고 믿어지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정받기 위한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단순히 경제적 수단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 '서문' 중에서)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지구촌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많은 국가에서, 특히 선진국들에서 불평등이 크게 심화됐다. 경제 성장의 수혜를 받은 것은 주로 고학력엘리트층이었던 것이다.3 아울러 경제 성장이란 곧 세계 각지로 이동하는 재화와 자본, 사람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커다란 사회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개발도상국에서는 과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생활하면서 TV는 물론 휴대폰으로 인터넷까지 이용하기 시작했다. 노동시장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과 가족의 삶을 위한 더 나은 기회를 찾으려고, 또는 자국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탈출하기 위해 국경 너머 해외로 이동했다.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신흥 중산층이 크게 늘어나 선진국의 기존 중산층이 하던 역할을 대체했다. 제조업은 유럽과 미국을 떠나 동아시아를 비롯해 노동력이 싼 지역들로 꾸준히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점차 서비스 중심으로 변해가는 새로운 경제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을 대체했으며, 한편에서는 스마트 기계들이 저숙련 노동자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 '1장 존엄의 정치' 중에서)

    분노의 정치를 주도하는 리더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푸틴과 트럼프가 서로에게 느끼는 공감은 개인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공통되게 지향하는 민족주의에서 기인한다. 오르반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일각에서는 현재 서구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미국 대통령의 부상을 두고, 세계 정치라는 경기장에서 초국가적 엘리트(즉 ‘글로벌’ 엘리트)와 애국주의에 기초한 민족적 엘리트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오르반 자신은 일찌감치 후자에 속했다.
    위에 언급한 모든 사례의 집단은(러시아나 중국 같은 거대 국가이든, 미국이나 영국의 유권자들이든) 자신의 정체성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경우 외부 세계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유권자 집단의 경우 동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정체성은 민족, 종교, 민족성, 성적 성향, 성별 등을 토대로 매우 다양하게 형성되며 이들 정체성은 모두 정체성 정치라는 공통된 현상이 표출되는 매개물이다.
    ‘정체성(identity)’과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용어는 상당히 최근에 등장했다.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1950년대에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에 의해 대중화되었고,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문화정치학을 배경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늘날 정체성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사회적 범주나 역할을 지칭하고, 어떤 경우에는 개인에 대한 기본 정보를 의미한다(예컨대 “내 신원(identity)이 도난당했다”고 말할 때). 이런 방식으로 정체성은 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해왔다.
    ( '1장 존엄의 정치' 중에서)

    하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현대의 정체성 정치를 이끄는 힘은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해온 집단들의 평등한 인정에 대한 요구다. 그런데 이 같은 평등한 인정에 대한 욕망은 해당 집단의 우월성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로 쉽게 변형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민족주의와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종교 극단주의자들의 정치에서 쉽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 '2장 영혼의 세 번째 부분' 중에서)

    투모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해온 인간 본성의 보편적 측면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내면의 자아가 있고 주변 사회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시각이다. 따라서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투모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근대에 와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성이 내적 자아 및 외적 자아라는 개념과, 그리고 내적 자아가 외적 자아보다 더 가치 있다는 급진적 관점과 결합하게 된 것이다. 이를 초래한 원인은 자아에 대한 관점에 일어난 변화, 그리고 경제적 및 기술적 변화로 급속도로 진화하기 시작한 사회 현실이었다.
    ( '2장 영혼의 세 번째 부분' 중에서)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대부분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형성되기 힘들다. 인간 역사에서 지난 1만 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다수 사람들은 안정된 농업 사회에서 살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회적 역할이 제한적이고 고정돼 있다. 나이와 성별을 토대로 엄격한 계층이 형성되고 모두가 같은 직업(농사를 짓거나, 아이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돌보거나)을 갖고 산다. 사람들은 한정된 수의 친구나 이웃과 어울리며 평생 같은 마을에서 산다. 종교와 신념도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공유한다. 또 사회적 이동(다른 직업을 택하거나 부모가 정해주지 않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에는 다원성이나 다양성도, 선택권도 없다. 이처럼 별다른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개인이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고뇌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내적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특성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항하면서 다른 마을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는 거기 가서도 역시 똑같이 제한된 사회적 공간에 갇혔을 것이다. 당시에는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개인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사회’라는 개념이 없었고, 그 사회보다 내적 자아를 더 중시하는 관점도 당연히 없었다.
    ( '3장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중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면 현대의 정체성 개념을 구성하는 요소들 대부분이 나타난 상태가 된다. 즉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구분, 기존 사회 제도보다 내적 자아를 높이 평가하는 것, 내적 자아의 존엄이 그것의 도덕적 자유에 달려 있다는 관점, 인간은 누구나 그런 도덕적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견해, 자유로운 내적 자아를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그것이다. 헤겔은 현대 정치에 관한 근본적인 진실 한 가지를 지적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에서 목격된 거대한 열정은 결국 기본적으로 인정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사실이다. 내적 자아는 단순히 개인적 자기 성찰이라는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내적 자아의 자유가 권리와 법률로 구현돼야 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200년 동안 전개된 민주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추동한 힘은 자신의 정치적인 인격성을 인정받기를, 자신이 정치적 힘의 행사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도덕적 행위자임을 인정받기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었다.
    ( '4장 존엄성에서 민주주의로' 중에서)

    확장된 의미의 개인 자율성에 따르는 문제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최소한의 공통된 문화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공동의 과업을 위해 협력할 수도 없고 합당하다고 여기는 제도의 형태도 개인마다 달라질 것이다. 상호간에 이해되는 의미를 가진 공통의 언어가 없다면 서로의 의사소통마저 불가능해질 것이다.
    ( '6장 표현적 개인주의' 중에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즉 정치화된 이슬람교)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공적 인정을 원하는 숨겨진 또는 억눌린 집단 정체성의 표현물이다. 또한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둘 다 비슷한 상황에서, 즉 경제 근대화와 급속한 사회 변화가 기존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그 자리에 대안적 형태의 연대들로 이뤄진 혼란스러운 다원주의가 들어설 때 부흥한다.
    ( '6장 표현적 개인주의' 중에서)

    사상적 배경은 민족주의의 부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지만, 한편으로 19세기 유럽에서는 민족주의의 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도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중세 유럽에는 사회 계층에 따른 엄격한 신분 질서가 존재했다. 봉건 제도 하에서 사람들은 영주가 다스리는 수많은 장원에 종속되어 살았고 평생 자기가 태어난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근대 시장경제에서는 노동력과 자본,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이동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풍부한 곳으로부터 그것들을 이용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자유주의 사회가 강조한 보편적 인정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는데, 그런 이념에서는 상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 권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경제 성장의 시녀가 된 것, 그리고 당대의 자유주의 사회의 두 대표 주자인 영국과 미국이 19세기와 20세기 초 산업화를 이끈 주축국가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 '7장 민족주의와 종교' 중에서)

    게마인샤프트에서 게젤샤프트로의 이행이 낳는 심리적 혼란은, 다원주의적 현대 사회의 분열과 혼란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강력하고 끈끈한 공동체에 대한 강한 향수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이념을 성장시키는 토대가 됐다. 1930년대에 히틀러가 독일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기 훨씬 전에, 독일의 지식인들은 게마인샤프트의 상실을 안타까워하고 세계시민주의적 자유 사회의 타락이라고 여기는 현상을 개탄하고 있었다.
    ( '7장 민족주의와 종교' 중에서)

    루아의 설명은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극단주의자 지하디스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임을 시사하며, 특정 개인들이 마주하는 심각한 정체성 문제를 일깨워준다. 유럽의 이민 2세대 무슬림들은 두 문화 사이에 끼여 있다. 하나는 그들이 싫어하는 부모 세대의 문화, 다른 하나는 그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제2의 조국의 문화다. 반면 급진 이슬람주의는 그들에게 공동체와 소속감, 존엄성을 제공한다. 루아는 자살 폭탄 테러범 같은 테러리스트가 되는 무슬림의 숫자가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무슬림 인구에 비교하면 극소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빈곤에 시달리거나 단순히 미국의 외교 정책에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스트 가운데는 안정된 중산층 출신도 많고 그동안 세계 정치에 별 관심 없이 살아온 이들도 많다. 젊은이들을 움직인 것은 이런 요인들이나 어떤 독실한 신앙심이 아니라 바로 분명한 정체성과 의미, 자부심에 대한 필요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내면의 자아가 있음을, 외부 세계에 억압받는 자아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 '7장 민족주의와 종교' 중에서)

    2010년대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20세기 정치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지녔던 계급 중심의 좌파 정당들이 퇴조하고 대신 민족주의 또는 종교적 성향의(정체성 정치의 두 얼굴에 해당함) 정당 및 정치인들이 세계 정치의 풍경을 새롭게 바꾸는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중에서)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널리 인용되는 ‘코끼리 곡선(elephant graph)’을 제시했다(다음 페이지 참조). 이는전 세계 소득 분포의 다양한 집단들에 대해 1인당 소득의 상대적 증가율을 보여주는 그래프다. 1988년에서 2008년 사이에 세계는 생산성 증가와 세계화를 통해 훨씬 부유해졌다. 그러나 이런 성장의 이익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코끼리 곡선을 보면 백분위 20에서 70 사이의 사람들은 소득이 상당히 증가했으며, 이들은 백분위 95에 해당하는 사람들보다도 소득 증가율이 더 높다. 하지만 백분위 80 근처의 사람들은 소득이 전혀 증가하지 않거나 미미한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 그룹은 대체로 선진국의 노동자 계층에 해당한다. 즉 고졸 또는 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다. 이들은 낮은 백분위의 사람들보다 훨씬 부유하긴 하지만 소득 분포 상위 10퍼센트 사람들에게 크게 입지를 잃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상대적 지위는 현저히 낮아졌다
    (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중에서)

    가난한 것은 곧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모욕당하는 것은 종종 궁핍한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 '8장 잘못 배달된 편지' 중에서)

    경제학에서 보는 인간은 ‘선호’ 또는 ‘효용’에 따라서, 다시 말해 물질적 자원이나 재화에 대한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다. 하지만 이 관점은 영혼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부분인 투모스를 간과하고 있다. 여기에는 남들과 평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대등 욕망과 우월함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우월 욕망이 포함된다. 우리가 흔히 물질적 필요나 욕구에 의한 경제적 동기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존엄성이나 지위에 대한 인정을 원하는 투모스적인 욕구인 경우가 대단히 많다.
    (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중에서)

    따라서 중산층 지위에 대한 위협감은 2010년대에 세계 많은 지역에서 포퓰리스트 민족주의가 약진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고졸 또는 그 이하 학력을 가진 미국 노동자 계층의 삶은 지난 세대 동안 황폐해져왔다. 이들은 소득의 침체 또는 하락과 실직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열도 겪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북부의 시카고, 뉴욕, 디트로이트 등으로 이주해 도축업이나 철강업, 자동차 산업 분야에 취직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삶에는 그런 변화가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이들 산업이 쇠퇴해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사회적 병폐와 범죄의 발생이 잇따랐다. 범죄율이 증가하고 크랙 코카인 사용자가 늘어났으며 가계가 파탄 나 빈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중에서)

    중산층 지위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의 분노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위쪽의 엘리트들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분노는 그들이 보기에 자격이 없음에도 부당하게 사회적 혜택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아래쪽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향한다. 크레이머는 이렇게 말한다. “같은 나라에 사는 동포들을 향한 분노가 중심적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현재처럼 된 것이 커다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힘들의 결과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혹실드는 이런 비유를 든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적힌 문으로 들어가려고 긴 줄에 서서 인내심 있게 기다렸는데, 자신들을 무시하는 바로 그 엘리트층의 도움을 받고 갑자기 다른 이들(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이민자)이 새치기를 해서 먼저 들어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혹실드는 루이지애나의 보수 유권자들을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들은 자기 땅에 사는 이방인이다. 당신은 남들 눈에 비치는 당신 모습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되고 존중받기 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존중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 잘못도 안 했음에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은 자꾸 뒤로 미끄러진다.”
    (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중에서)

    좌파의 문제는 그동안 특정한 형태의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춰온 데 있다. 노동자 계층 또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과 같은 커다란 집단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소외된 점점 더 작은 집단들에 집중해온 것이다. 이는 보편적이고 평등한 인정이라는 원칙이 특정 집단들에 대한 특별한 인정으로 변형되어온 현대 자유주의의 운명이라는, 보다 커다란 스토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 '9장 보이지 않는 인간' 중에서)

    래시는 미국 문화에서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이 파시즘을 낳지는 않겠지만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 개인의 심리적 문제들로 축소 및 환원된다는 것이다. 래시는 트럼프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이 같은 글을 썼지만 트럼프는 그가 설명하는 나르시시즘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하는 정치인이다. 나르시시즘은 트럼프를 정계로 이끌었고 그의 정치는 공공의 목적보다는 대중적 인정을 향한 그의 내면 욕구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 '10장 존엄성의 대중화' 중에서)

    새로운 사회 운동들이 등장한 1960년대는 많은 이들이 이미 정체성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 시대였으며 사회가 여러 제도를 통해 개인의 자존감 증진이라는 임무를 기꺼이 수행하고 있던 때였다. 1960년대 이전에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체로 개인적 잠재력을 실현하길 원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위와 같은 사회 운동들이 전개되면서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표나 지향점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존엄성과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됐다. 전 세계의 민족 운동들을 연구한 결과는 개인의 자존감이 해당 개인이 속한 집단이 받는 존중과 연관돼 있음을 보여줬다. 따라서 정치적인 상황은 개인적인 상황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각각의 사회 운동은 이제껏 보이지 않는 존재로 억눌려 있던 사람들을 대변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현실에 분노하면서 자신들의 내적 가치를 공적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가 현대의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했다. 표현만 새로울 뿐 사실 이들 집단은 과거에 민족주의나 종교를 중심으로 한 정체성 운동에 나타났던 투쟁 방식과 관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11장 정체성에서 정체성들로' 중에서)

    국민 정체성의 출발점은 한 나라의 정치 체제(민주 체제든 아니든)가 지닌 정당성에 관한 공통된 믿음이다. 국민 정체성은 공식적인 법과 제도에 담길 수 있다. 예컨대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나라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지, 또는 어떤 언어를 나라의 공식 언어로 삼을 것인지 등을 법과 제도로써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 정체성은 거기서 더 나아가 문화와 가치관이라는 영역과도 관련된다. 다시 말해 국민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국민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주요 구성 요소다. 자신의 연원이 어디인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공통된 역사적 기억이 무엇인가,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등에 대한 인식이 여기에 포함된다.
    ( '12장 국민 정체성' 중에서)

    국민 정체성이라는 말은 이 시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됐다. 민족에 근거한 배타적인 종족민족주의와 연관짓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종족민족주의는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핍박하고 타국에 사는 동족들을 위해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외국인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국민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국민 정체성이 특정 민족을 강조하고 편협하며 공격적이고 비자유주의 특성이 강한 형태를 띨 때 발생했다. 국민 정체성이 그런 형태로 변질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니다. 국민 정체성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그리고 다양한 공동체의 공존과 번성에 기여하는 공동의 경험을 중심으로 구축할 수 있다. 인도와 프랑스, 캐나다, 미국은 이와 같은 길을 모색해온 대표적인 나라다. 그런 폭넓은 의미의 국민 정체성을 수립하는 일은 성공적인 현대 정치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 '12장 국민 정체성' 중에서)

    유럽과 미국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우리의 나라를 되찾자’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가치관 및 문화를 가진 이주자들 때문에, 그리고 국민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종차별적이고 편협한 개념이라고 공격하는 진보 좌파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국민 정체성이 희석되면서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되찾자고 외치는 것은 어떤 나라일까? 미국 헌법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 합중국 국민은 보다 완벽한 연합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평안을 보장하고, 공동 방위를 가능케 하고, 국민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보장하기 위해 이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 헌법은 국민에게 주권이 있으며 합법적인 정부가 국민의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하게 명시한다. 하지만 그 국민이 누구인지는, 즉 개인이 국가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정의하지 않고 있다.
    ( '12장 국민 정체성' 중에서)

    국민 정체성 형성에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시민권 및 거주와 관련된 규정, 이민과 난민 관련 법률, 공공 교육 제도에서 나라의 역사를 가르칠 때 사용하는 커리큘럼 등에 관한 정책이다. 상향식 프로세스에서는 ‘국민의식을 위한 내러티브’가 해당 사회의 음악가, 시인 등 예술가, 영화제작자, 사학자, 일반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공유된다. 이런 내러티브는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미래에 대해 어떤 염원을 품고 있는지를 담고 있다.
    ( '13장 국민의식을 위한 내러티브' 중에서)

    우리는 정체성이나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체성은 찰스 테일러의 표현대로 “우리 현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강력한 도덕적 이상”이고, 투모스라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국경이나 문화권과 상관없이 힘을 발휘해왔다. 이 도덕적 이상은 우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진정한 내적 자아를 갖고 있으며 외부 사회가 우리를 억누르려 하는 잘못된 존재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또한 존엄성 인정에 대한 요구를 강화하고 그런 인정을 받을 길이 요원할 때 일어나는 분노를 표현할 언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존엄성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튀니지의 모욕당한 노점상 청년이 촉발한 시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중 봉기를 점화시킨 불꽃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정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인으로 대우받고 싶어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평등한 자유를 가진, 즉 집단 구성원으로서의 정치적 삶을 결정할 선택권과 주체적 행위력을 평등하게 가진 개인들에게 부여되는 권리들을 중심으로 수립된다.
    (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정체성 정치의 역학은 사회를 자꾸만 더 작고 이기적인 집단들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보다 넓고 통합적인 성격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 역시 가능하다. 각 개인의 잠재력과 체험을 부인해야만 그들이 타집단을 포함한 사회 전체 구성원과 가치 및 목표를 공유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를레프니스가 모여 에르파룽이 될 수 있다. 체험은 명백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정체성 정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겠지만 정체성 정치를 존엄성에 대한 보다 넓은 상호 존중의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는 있다. 민주주의의 기능을 더 확실하게 증진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현 상황에서 이와 같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각 집단의 정체성 주장을 가속화한 특정한 학대와 부당 행위들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소수 인종에 대한 부당한 경찰 폭력, 일터, 학교, 기타 조직에서 일어나는 성폭행 및 성희롱이 그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이것들이 구체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실질적이고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울러 그보다 거시적 어젠다로서 개별 집단들을 신뢰와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보다 큰 차원의 집단에 통합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이념들을 바탕으로 한 신조 중심의 국민 정체성을 함양하고 공공 정책을 통해 이민자들을 그 정체성에 신중하게 동화시켜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고유의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 문화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거부하는 문화보다 반드시 더 높이 존경받아야 한다.
    (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미국은 다양성이라는 이념에서 많은 혜택을 입었지만 다양성 그 자체를 중심으로 국민 정체성을 세울 수는 없다. 정체성은 입헌주의, 법치주의, 평등 같은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개념들과 연결돼야 한다. 미국인들은 이런 개념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부하는 사람을 국민에서 배제하는 것은 마땅히 옳다. 현대 사회의 실질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적절한 종류의 신조적 정체성을 정의하고 나면 이민을 둘러싼 논쟁의 성격이 불가피하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든 미국에서든 현재 이민 논쟁은 우파와 좌파 사이에 극명하게 반대로 갈려 있다. 즉 우파는 이민을 전면 금지하고 현재 자국에 들어와 있는 이민자들도 원래 출신국으로 되돌려 보내자고 하고, 좌파는 정부가 이민자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논란에서 벗어나 해당 국가의 신조적 정체성에 이민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전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효과적으로 동화된 이민자들은 사회에 건강한 다양성을 가져오며 그런 사회에서는 이민의 이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제대로 동화되지 못한 이민자는 국가 발전에 장애물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위험한 집단이 될 수도 있다.
    (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이민자, 난민, 시민권 관련 정책은 오늘날 일어나는 정체성 논쟁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문제의 범위는 그보다 훨씬 넓다. 정체성 정치는 애덤 스미스의 표현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분노를 생성시키는 요인은 현실적인 경제적 곤궁이므로 그런 분노를 잠재우는 한 가지 길은 일자리와 소득, 안정에 대한 걱정을 경감시키는 것이다.
    (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는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끝없는 분열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종류의 디스토피아로 동시에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거대 독재 체제를 세우고 있는 중국에서는 정부가 모든 국민의 거래 데이터를 수집하고 빅데이터 기술과 사회 신용 시스템을 이용해 국민을 통제한다. 한편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중앙집권화된 제도가 무너지고, 실패한 국가가 등장하고, 양극화가 심해지고, 공동의 목표에 관한 합의가 약해지고 있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은 물리적 장벽이 아니라 공통된 정체성에 대한 신념으로 외부와 담을 쌓는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커뮤니티들의 등장을 촉진했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좋은 점은 그것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흐름이 앞으로 훨씬 더 과장된 방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상상해봄으로써 유용한 경고를 얻을 수 있다. [1984]는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전체주의 사회를 보여주는 강력한 상징적 작품이 되어 인류에게 일종의 예방접종을 놓아준 셈이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다양성이 증가하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되,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보다는 더욱 굳건하게 만들 비전을 제시하는 세상 말이다.
    정체성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 운동, 이슬람주의 과격 세력,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정치 현상의 기저에 깔린 공통 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정체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도, 꼭 출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체성은 분열로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통합으로 향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결국에는 그것이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정치를 치료하는 해법일 것이다.
    ( '14장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저자소개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52
    출생지 미국 시카고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1952년 일본 이민 3세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코넬 대학교에서 서양 고전을 전공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비교문학으로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워싱턴 소재 랜드연구소에 몸담았고, 1989년에는 미국 국무부 정책기획실 차장을 지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조지메이슨 대학교 공공정책학과 교수를 역임한 뒤, 2005년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학장으로 있으면서 국제개발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현재는 스탠퍼드 대학교 민주주의.개발.법치주의 센터에 있다.
    미래 정치학자이자 역사철학자인 후쿠야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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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년월일 1975~
    출생지 서울
    출간도서 0종
    판매수 0권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했으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인문교양, 경제경영, 심리학, 실용, 자기계발,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영미권 책을 우리말로 옮겨 왔다. 옮긴 책으로 《뒤통수의 심리학》, 《영국 양치기의 편지》, 《완벽에 대한 반론》,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 《멀티플라이어》, 《소소한 즐거움》, 《해피니스 트랙》, 《블루오션 전략 확장판》, 《앱 제너레이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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