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서평에서도 밝혔지만, 저에게 제대로 멘붕을 선사하고 여러 번 좌절감을 맛보게 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입니다.
사실 알베르 카뮈는 프란츠 카프카와 더불어 난해하고 읽기 힘든 작품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 제가 겁 없게도 <페스트>와 <변신> 모두 다 읽어보려다 <페스트>만 당첨되어 읽게 되었는데요..
진심으로 당첨되지 않는 것을 기뻐한 것도 처음인 것 같아요.
만약 <변신>까지 읽어야 했다면 저는 당분간 책 읽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제게 <페스트>는 정말 어려운 작품이었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뭐랄까.. 눈으로는 글을 읽고 있지만 뇌까지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달까.
정작 내용은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취감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페스트, 우리가 흔히 흑사병으로 알고 있는 치사율이 아주 높은 급성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역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전염병이라고 하니까 5월 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망자와 감염자가 발생한 메르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소설 속의 상황과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너무 비슷해서 (심지어 발병 날짜도 비슷)
알베르 카뮈가 환생해서 옆에서 지켜보고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신문 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였는데
그래서 소설이 아닌 르포 같은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알제리의 항구 도시 오랑.
의사인 베르나르 리유는 자신의 진료실에서 나오다가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문득 있어서는 안 될 곳에서 죽어있는 쥐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그 날 이후부터 점점 더 많은 수의 죽은 쥐가 도시 곳곳에 넘쳐나게 됩니다.
엄청난 수의 쥐들이 출몰하면서 리유는 시 방역소에 전화도 해 봤지만,
심각한 상태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며 상부의 지시가 있어야만 나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죠.
급기야 신문사에서도 이 일을 대서특필하며 시 당국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자진해서 뭘 해볼 생각도,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시 당국에서는
그저 새벽마다 죽은 쥐를 수거하라는 명령을 방역소에 내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거되어 소각되는 쥐의 양이 늘어났지만 갑자기 감소해서 한숨 돌리나 싶었던 때
수위인 미셸 영감의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을 파늘루 신부에게서 듣게 됩니다.
종기가 나고 온몸이 아프다던 수위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됐고, 그 이후부터 사망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게 됩니다.
사망자들이 보이는 비슷한 증세들과 심상치 않았던 죽은 쥐들의 출현까지,
리유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페스트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가능한 조속히,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하는 도지사와 이미 페스트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다른 의사들 앞에서
리유와 노의사 카스텔은 페스트가 맞다고 확신하나 페스트건 열병이건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사회 회장인 리샤르는 법에 규정된 방제 대책을 시행하려면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하다며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더욱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사태를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리유는 병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전염병으로 도시의 절반이 죽을 수도 있다며
최대한 빨리 방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거듭 주장합니다.
리샤르는 결국 이 전염병을 페스트라고 가정하고, 페스트 발생 시에 따른 예방 조치들을 적용하기로 합니다.
페스트가 아닌 악성 열병의 징후가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작은 공고문을 시작으로
하수구에 독가스를 분사해서 쥐를 박멸한다든지, 급수 사용 감시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고
시민들에게는 극도의 청결을 요구하며 몸에 벼룩이 있는 사람들은 무료 보건 진료소에 출두하도록 했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리는 경우 가족들은 의무적으로 신고하고, 특별 병실에 격리하도록 동의해야 했으며
환자의 방과 운송 차량을 의무적으로 소독하는 등의 내용도 실려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망자수가 갑자기 급증하게 되자 결국 페스트 발병을 공표하고 도시를 폐쇄하기로 결정합니다.
도시로 통하는 성문들이 폐쇄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생이별을 해야 했는데
병균이 퍼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 편지도 막으면서 유일하게 전보만 허락됐습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도시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도 했으나 한 번 들어오게 되면 다시 나갈 수가 없다는 점 때문에
카스텔의 부인을 제외하고는 언제 잦아들지 모르는 페스트가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책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 추천을 받아 오랑에 왔다가 마찬가지로 발이 묶여버린
레이몽 랑베르 기자의 이야기가 제일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철저한 이방인인 그가, 파리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와도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다고, 자신은 이방인이라고, 사랑하는 아내가 파리에 있다고 요구해봤지만 예외는 없었습니다.
이후에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오랑에 남아 리유를 돕기로 한 랑베르의
변화되는 심리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 그래서 가장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초기 대응에 실패하고, 병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은폐·축소하려했던 것과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한 자가 격리조치,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처럼 개인 위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예방법 등
이번 메르스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것은 저만의 착각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너무도 어렵고 너무도 무거웠던 작품이었지만,
죽기 전에 읽어야 할 걸작을 이번 기회에 읽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흐른 뒤에 다시 한 번 정독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구요.
그 때에는 지금보다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