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 순간,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제게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웃은 것입니다.

이 집에 와서 지낸 지 1년이 흘렀습니다. 한 남자가 오더니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거나 뜯어지지 않는 장화를 주문하더군요. 그런데 전 그 사람 어깨 뒤에 제 친구인 죽음의 천사가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저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전 천사를 알아보았고, 그날 밤 해가 지기 전에 천사가 신사의 영혼을 데려가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죠. ‘이 사람은 날이 저물기 전에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고 1년을 준비하는구나.’ 그때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렇게 6년이 흘렀고 오늘 어느 부인이 쌍둥이 여자아이들은 데리고 이곳에 왔습니다. 전 그 아이들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아이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아이들을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난 부모 없이 아이들은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말을 들어주었지. 하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자기 젖을 물려 아이들을 이렇게 키웠구나.’ 부인이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이들은 가엾이 여기며 눈물을 흘렸을 때, 저는 그 부인에게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 번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절 용서하셨다는 걸 알고서 세 번째로 웃었던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는 아이들이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그 부자 역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을 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산 자가 신을 장화가 필요한지 죽은 자가 신을 슬리퍼가 필요한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사람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제 힘으로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과 그의 아내가 사랑과 온정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잃은 그 아이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이웃집에 사는 한 여인이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엾이 여기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맨발은 긁히고 상처가 났으며, 다리는 힘이 빠졌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해는 야속하게 서산으로 자꾸만 기울었다. ‘아, 그렇게 욕심 부리는 게 아니었어! 늦으면 어떻게 하지?’ 바흠은 언덕과 태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언덕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태양은 이미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바흠은 걷고 또 걸었다. 몹시 괴로웠지만 점점 걸음을 빨리했다. 아무리 가도 목적지까지는 멀기만 했다. 결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조끼도 신발도 물통도 모자도 다 내던져버리고 오직 삽만을 지팡이 삼아 달렸다. ‘어떡하지.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다 망쳐버렸어. 해 지기 전까지 못 갈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자 두려워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바흠은 계속 달렸다. 땀에 젖은 셔츠와 바지고 몸에 들러붙고 입이 바싹바싹 탔다. 가슴은 대장간 풀무처럼 부풀어 오르고 심장은 망치질하듯 쿵쾅거렸으며 다리는 남의 다리인 양 흐느적거렸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죽을지도 몰라.’

죽는 게 무섭긴 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달려와놓고 여기서 멈추면 다들 날 바보라고 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리고 또 달려 어느새 언덕 가까이에 이르자 바시키르 사람들이 그를 향해 질러대는 함성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바흠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끌어모아 달렸다. 해는 이미 지평선에 거의 닿았고, 피처럼 붉은 빛이 주위로 넓게 퍼졌다. 아,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이제 해는 아주 낮게 떠 있었고 목적지도 눈앞에 있었다. 언덕위에 서서 바흠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땅에 놓인 여우 털모자와 그 위에 있는 돈, 그리고 땅바닥에 앉아 두 손으로 배를 잡고 있는 촌장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바흠은 꿈이 생각났다. ‘땅을 많이 차지한다 해도 하나님이 날 거기에서 살게 해주실까? 아, 이제 다 끝났어. 내가 다 망쳐버렸어. 저기까지 도저히 갈 수 없을 거야!’

바흠은 해를 보았다. 해 반쪽이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모아 또 달렸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겨우 언덕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겨우 언덕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날이 어두워졌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걸 보고 바흠은 탄식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다 허사가 되어버렸어.’ 바흠이 절망해서 그만 멈추려는데, 바시키르 사람들이 계속 질러대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언덕 아래에서는 해가 다 진 것 같아도 언덕 위에서 보면 아직 해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바흠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언덕에는 아직 햇빛이 남아있었다. 바흠은 언덕 꼭대기까지 가서 모자를 보았다. 모자 앞에 촌장이 앉아 배를 잡고 웃어댔다. 바흠은 또 한 번 꿈을 떠올리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스르르 무너지는가 싶더니 바흠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두 손이 모자에 닿았다. 촌장이 소리쳤다.

“아, 정말 대단하구려! 엄청난 땅을 차지했어요!”

바흠의 하인이 달려가서 바흠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바흠은 일어나지 못하고 입에서 피를 쏟았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바시키르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이 딱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인은 삽을 들고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길이에 맞춰 무덤을 파고 그를 묻었다. 바흠이 차지한 땅은 그 3아르신(약 2미터 10센티)이 전부였다.

 

▣ 촛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8~39절

▣ 세 가지 질문

 

꼭 기억하시오.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걸 말이오. 바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때에만 우리가 가진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앞으로 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인데,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이오!

 

 

▣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하오리까? 예수계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을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며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이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아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같은 자리에서 조금 전보다 더 밝은 불빛이 또 한 번 번쩍 일었다. 모자를 쓴 남자가 이반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앉아 손에 짚단을 들고 불을 붙이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반은 가슴이 새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성큼성큼 걸어갔지만 자신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흠,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현장에서 붙잡고 말 테다!’

하지만 이반이 두 개의 처마가 맞닿은 곳까지 채 가기도 전에 갑자기 그 부근이 번쩍하고 밝아지더니 제법 큰 불길이 일었다. 처마 밑 밀짚에 붙은 불이 지붕으로 번졌고 그 아래에 가브릴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매가 종달새를 덮치듯 이반이 절름발이 가브릴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절름발이 가브릴로가 이반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휙 돌아보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헛간을 지나 도망쳤다.

가브릴로는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이반이 거기까지 쫓아가 가브릴로에게 손을 뻗으려는데, 뭔가가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이반은 관자놀이를 돌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아득해졌다. 가브릴로가 마당에 있던 떡갈나무 막대기를 주워들고는 달려오는 이반의 머리를 힘껏 내리친 것이다.

이반은 정신을 잃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 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깜깜해졌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가브릴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주위가 대낮같이 환했고, 그의 집 쪽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윙윙하는 소리와 함께 탁탁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돌아보니 뒷마당의 헛간이 온통 불길에 휩싸였고 그 옆의 헛간에도 불길이 옮겨붙는 중이었다. 불꽃과 연기, 불붙은 지푸라기들이 한데 뒤섞여 안채 쪽으로 번져갔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반은 두 손으로 넓적다리를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처마 밑에서 짚단을 꺼내 밟기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 두 노인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 말로는 예배한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장 19~21절, 23절

 

 

▣ 대자代子

 

대자는 대부가 가르쳐준 대로 해가 뜨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참을 다가 보니 정말 숲이 나왔다. 숲 속 빈터까지 가보니 한가운데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소나무 가지에는 밧줄이 묶여 있고 그 줄에 3푸드 쯤 되어보이는 통나무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벌꿀이 든 통이 있었다. 이런 곳에 왜 나무를 매달아놓고 꿀을 두었는지 미처 궁금해 할 새도 없이 숲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곰 몇 마리가 꿀통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어미 곰이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두 살짜리 곰이 따르고 맨 뒤에 새끼 곰 세 마리가 따라왔다. 어미 곰은 코를 벌름거리며 꿀통을 향해 곧장 왔고 새끼 곰들도 따라왔다. 어미 곰이 꿀통에 코를 처박고 새끼 곰들을 부르자 새끼 곰들도 달려와 통에 매달렸다. 그때 통나무가 조금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새끼 곰들을 건드렸다. 이 모습을 본 어미 곰이 앞발로 통나무를 밀쳤다. 통나무는 아까보다 더 멀리까지 밀렸다가 돌아오면서 새끼 곰들을 후려쳤다. 그 바람에 어떤 놈은 등을 얻어맞고 어떤 놈은 머리를 얻어맞았다. 새끼 곰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어미 곰은 크르릉거리며 앞발로 통나무를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가 힘껏 내던졌다. 통나무가 높이 날아가자 두 살짜리 곰이 꿀통으로 냉큼 달려가 통에 코를 박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꿀을 핥아먹었다. 다른 새끼 곰들도 다가갔다. 하지만 미처 꿀통에 닿기도 전에 통나무가 휙 날아와 두 살짜리 곰의 머리를 쳤다. 곰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어미 곰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크르릉거리며 통나무를 잡더니 머리 위로 올렸다가 온 힘을 다해 내던졌다. 통나무가 소나무 가지보다 높이 올라가면서 줄 한 가운데가 휘청 흔들렸다. 어미 곰이 다시 꿀통으로 다가가자 새끼 곰들도 따라왔다. 통나무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잠깐 멈추더니 다시 내려왔다. 내려올수록 속도가 빨라지면서 순식간에 어미 곰의 머리를 내려쳤다. 어미 곰은 벌렁 나자빠져 버둥거리다가 죽고 말았다! 새끼 곰들은 숲 속으로 달아났다.

 

대자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악이 악을 낳는다는 걸 이제 알겠다. 악을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악은 더 퍼져가는 거야. 악을 악으로 없앨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없앨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송아지가 주인 말을 들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밭에서 몰아내겠어?’ 대자는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갚으려고 왔습니다.”

 

‘나는 또 죄를 지었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말이야. 어쩌면 죽음으로 죄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몰라. 내게 선이든 악이든 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야.’

“절대 놓지 못하겠소.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할 뿐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 놓아주지 말라고 명령하셨소. 그러니 이 사람을 놓아주시오!”

상인의 아들이 말에서 뛰어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강도가 말을 타고 가려 하는데 대자가 또 그를 잡아 세우고는 죄를 지으며 사는 건 이제 그만두라고 말했다. 강도는 잠자코 대자의 말을 다 듣더니 아무 대답 없이 떠나버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이 너무도 크구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헛되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도 말이야.’ 사람들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죄악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니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깨달은 것을 알려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도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자는 강도가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저런 자에게는 얘기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밖으로 나갔다. 강도는 어두운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타고 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대자는 그가 가엾어졌다. 그래서 강도에게로 달려가 그의 무릎을 잡고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여, 부디 자신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오. 당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 말이오. 당신은 스스로를 괴롭히고 다른 이들을 괴롭히며 앞으로도 더 많은 괴로움을 겪을 것이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큰 축복을 예비해놓으셨소. 그러니 자신을 망치는 짓은 그만두시오. 제발 새롭게 사시오!”

강도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리 비켜!”

하지만 대자는 강도의 무릎을 더 꽉 쥐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강도가 눈을 들어 대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말에서 내려와 대자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나를 이겼습니다. 나는 20년 동안이나 당신과 싸웠지만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처음 내게 설교하려 했을 때 나는 그저 화만 치밀었습니다. 당신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들어갔을 때, 그제야 당신 말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 때 대자는 걸레를 빨고 나서야 식탁을 깨끗이 닦을 수 있었던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 대한 염려를 그치고 마음을 맑게 할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도 맑게 할 수 있었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고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받침틀을 고정하고 나서야 나무를 구부릴 수 있었던 바퀴 테 만드는 농부들이 대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자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에게 단단히 고정하고 나서야 강도의 순종하지 않는 마음을 길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완전히 녹아버린 것은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기고 눈물을 흘렸을 때였습니다.”

대자는 젖은 나무를 올리고 나서야 불을 피울 수 있었던 목동들을 떠올렸다. 그처럼 자신의 마음이 따뜻하게 타오를 때에야 다른 이의 마음에도 불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모든 죄를 갚을 수 있게 된 대자는 몹시 기뻤다.

1장 우주 공간 속 지구라는 행성에서

 

▪ 별은 가스와 먼지가 모여 있는 거대한 솥 속에서 탄생한다.

▪ 태양계의 시작은 상상을 초월하는 혼돈이었다.

▪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은 우주에서 온 것이다. 막대한 양의 유기물이 우주 공간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고, 태양 광선의 작용으로 변성되어 이윽고 생명을 배태하기 위한 재료가 될 수 있었다. 생명이 탄생한 뒤, 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모습을 바꾸고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우주선(宇宙線, cosmic ray)이나 천체의 충돌과 같은 외부 요소와 관련된다. 오늘날 지구의 거의 모든 생물들은 가장 가까운 항성에서 얻은 에너지를 사용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디까지가 지구에서 나온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지구 밖에서 온 것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2장 화톳불 위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 생명 탄생의 순간은 긴 지구의 역사에서 볼 때 매우 짧은 시간에 해당한다. 생명은 매우 빠른 속도로 등장한다. 천애 고아로 태어난 생명은 그 후 1억 년 동안 숱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래를 향해 확실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밝혀내는 작업은 ‘언제’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주변에 널려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서로 몸을 접근시키는 방법으로 극복하는 일종의 공생(共生)방어, 무수한 작은 생명체들의 희생 같은 현상은 거의 생명이 탄생한 순간부터 시작된,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한 본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4장 진흙 더미의 복음서

 

▪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는 자연선택이 생물을 자연 환경에 적응시켜가는 유일한 과정이라는 점뿐이다.

▪ 《린네협회회보(Linnaean Society Proceedings)》에 실린 1858년의 논문에서, 다윈은 “수백만 세대에 걸쳐” 자신이 원하는 특정한 형질만을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없이 계속 선택해 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고 말한다. 자연선택은 그런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무언가가 분명 존재했음을 – 물론 그렇다고 어떤 인격적 존재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입증하고 있다. 진화를 위해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 “단순하기 짝이 없는 최초의 생명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거의 무한할 만큼 다양한 형태로 펼쳐질(evolved) 수 있었던 과정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 추론을 계속해 나가면 모든 동식물이 단 하나의 원형(原型)에서 파생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찰스 다윈)

▪ 아직까지 생명의 기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초기의 지구에 생명의 재료가 풍부하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 일순간 주위의 경관을 뒤바꾸어 놓는 눈사태나 사람의 몸뚱어리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철도 사고처럼 간혹 일어나는 큰 변화 앞에서는 아름다움도, 지성도, 정신력도, 의지도, 명예도, 야심도 가치를 잃는다.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 ‘진화’란 유전과 환경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종의 협조 작업

▪ 1825년 영국의 대가족에서 태어난 헉슬리.. 헉슬리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모든 동물이 “뇌 속에 들어 있는 물질의 분자적인 변화에 따라 … 곧바로 다양한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탄소를 주원료로 한 “자동기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5장 3문자 단어에 불과한 생명

 

▪ 인간의 경우, ACGT 서열 중에서 무려 97퍼센트가 실제 역할을 갖지 않는 무용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염기 서열은 나머지 3퍼센트에 불과한 셈이다. ACGT 서열의 기능은 생물들의 다양한 외형과는 정반대로 전체 생물계를 통해 놀랄 만큼 유사하다. 더욱이 기본적으로 같은 기원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설명이 곤란할 만큼 비슷하다. 지구의 전체 생물이 40억 년 전에 존재한 공통의 선조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 즉 모두가 친척이기 때문에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제 분명하다.

▪ (염기서열 복제 할 때 생기는 착오) 메시지 안에 들어있는 수정되지 않은 착오는 그대로 자손 세대에 전달되어 이윽고 고정되어 간다. 이런 A, C, G, T에 타나다는 변화를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 돌연변이야말로 “진정 생명을 길러 낸” 장본인이다. 돌연변이는 생명의 역사와 그 본질에 근본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우연성을 불어넣었다.

▪ 진화는 시행착오의 연속일 뿐이다. 승자는 번성하지만, 패자는 무자비하게 절멸된다. 그 과정이 완성되기까지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것을 자손에 전달할 수 있으면 어떤 생물이든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그들 자신이 선택할 수는 없다.

▪ 진화란 우연적이고 확률적인 과정이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갖지 않기 때문에 예측할 수도 없다. 진화하는 분자들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일련의 돌연변이를 끊임없이 만들고, 그런 변이들 중에서 간혹 원래의 것보다 조금 나은 개량형이 나올 뿐인 것이다.

 

 

 

6장 나와 너

 

▪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오직 하나의 계통에 속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생물은 친척, 말하자면 서로 ‘먼 사촌’의 관계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생물 속에 내재된, 둔감하기까지 한 보수성(conservatism)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 원래 변화란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나’와 ‘너’도 구별하지 못하고 소화 효소의 분비를 제어하지도 못한다면, 그 생물은 거의 자손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감정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생물들은 욕망이나 욕구, 좋고 싫음, 정서,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먹이가 되는 동물들이 그런 식의 적응 계획을 가졌던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남은 개체들이 마치 그런 계획을 가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 최소한 포유류에서, 감정은 주로 뇌의 낮은 등급의 오래된 부분에서 제어된다. 그에 비해 사고를 제어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한, 고도로 발달한 바깥쪽의 층이다.

▪ 발가벗겨진 생명은 여러 가지 정보 중에서 특정한 ACGT 메시지의 우선적인 복제라는 태고의 본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서로 다른 유전적 처방 사이의 충돌, 유전 언어 사이의 전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리차드 도킨스의 관점), 선택되고 진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전 정보 그 자체가 된다. … 분명 이타주의로 보이는 행동도 실제로는 혈연 선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미 새는 포식자를 자신의 새끼에게서 떨어뜨리기 위해 여우 앞에서 천천히 날갯짓을 하거나 한쪽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행동하여 유인한다. 결국 어미 새는 목숨을 잃지만 어미 새의 유전 정보가 매우 유사한 다수의 유전 정보가 새끼들의 DNA에 남는다. 손익 계산에 의거해 훌륭한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타주의는 한낱 감상적인 환상인 것이다.

▪ 세포가 엽록체를 소화하지 않는 것은 엽록체에 대한 일말의 이타적 감정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다. 엽록체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소화하지 않을 따름이다. 먹는 기쁨보다 장래의 실리를 취하는 것, 즉 충동을 제어하고 단기적인 이기주의를 제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기주의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단기적인 것과 장기적인 것의 구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생물이 자신의 증식을 단념하더라도, 친척(자신과 매우 유사한 DNA의 소유자)의 증식과 생존에 전념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만약 어떤 염기 서열이 장래의 생물에게 널리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면, 이타주의 경향을 가진 종이 번성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다른 종의 생물을 향한 애정이나 용기는 분명 혈연 선택 기능의 잘못된 작동에 따라 일어난 결과일 것이다. … 유전자 수준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는 이기적인 쪽이, 단기적으로는 이타적인 쪽이 적응에 좀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인간과 다른 동물은 부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다. 혈연 선택은 생명의 본질이고, 작은 집단을 형성해 생활하는 동물에 대해서는 특히 강하게 작용한다. 이타주의는 사랑과 매우 유사하다.

 

7장 처음 불이 타올랐을 때

 

▪ 미국 남서부에 서식하는 캥거루쥐의 경우 반복되는 염기 서열이 전체 유전 정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무의미한 염기 서열의 반복에 …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기능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진화 과정은 어떤 전능한 존재가 미래를 내다보며 다가올 위기를 피할 수 있도록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근시안적이고, 위기를 회피하기보다 완화시키며, 밑에서 위로 진행된다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인간이나 DNA 분자 모두 메시지 내용의 극히 일부가 변했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예상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 따라서 확실한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어쨌든 해 보는 것’이다. 기능을 유지시킨 채 나타난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실험해 보는 방법이다.

 

8장 성과 죽음

 

▪ 성과 자연선택은 일종의 교정자와 같은 역할을 해, 돌연변이가 일으키는 불가피한 오류를 오염되지 않은 정보로 대체한다. 진핵 생물이 서로 다른 진화 계통을 따라 다양하게 발생한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원시동물(짚신벌레 등), 병원충(말라리아 병원충 등), 조류(藻類), 균류, 그리고 모든 육상 식물과 동물에까지 이어지는 각각의 계통이 분기하는 시기는 대체로 진핵 생물이 ‘성’을 획득한 시기와 일치한다.

▪ 아마도 ‘성’은 일종의 감염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염을 일으키는 세포와 피감염 세포에 의해 성이라는 방식이 점차 확립되어 갔을 것이다.

▪ DNA는 오직 성에 의해서만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성의 기쁨이란 바로 여기에 있다. 10억 년 전, 생물에게 하나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 거래란 개체의 불사성(不死性)을 잃는 대신, 성의 기쁨을 얻은 것이다. 죽음과 성, 우리는 죽음 없이 성을 얻을 수 없다. 자연은 생물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거래를 강요한 셈이다.

▪ 최초의 생물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그 후 30억 년 동안 하나의 개체에게는 오직 하나의 부모가 있고, 그 생명력은 거의 불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에 비해 현생 생물의 대부분은 두 명의 부모를 가지고, 수명은 한정되어 있다.

 

 

 

10장 마지막 치유 수단

 

▪ 동물의 행동에서는 한편으로 공격 메커니즘을 제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촉진하는 모순이 자주 발견된다. 문자 그대로 ‘두 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부리와 발톱 공격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투계 수탉은 한참 싸움을 벌이다가 간혹 몸을 돌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약돌을 쪼아 대다가 죽어버리는 일이 있다. 이런 행동을,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우에도 ‘전위(轉位)’라고 부른다. 공격성이 다른 감정으로 전환되고 그 대상까지 바뀌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만드는 충동이다.

▪ 공격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새끼는 온순한 어미가 길러도 역시 공격적이고, 온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새끼는 공격 성향이 강한 부모가 길러도 여전히 온순하다.

 

11장 지배와 복종

 

▪ 지배자에 의한 평화(pax dominatoris) 위계가 완전히 확립된 사회에서는 격렬한 폭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위협이나 협박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화된 복종은 있지만, 신체적인 충돌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은 아직 위계가 확립되지 않고 유동적인 때에 발생한다. 젊은 수컷이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려 하거나, 알파 수컷의 자리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질 때면 어느 한쪽이 심한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위 개체들이 만년 하위에 머물러도 괘념치 않는다면 그 위계는 별다른 동요 없이 평화롭고 의례화된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사람들의 경우에는 종교나 학계, 정치, 경찰, 기업 그리고 평화 시의 군대의 위계 구조가 그와 흡사하다. 위계 구조가 개인의 자유를 아무리 제약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사회 안정은 그러한 손실을 충분히 상쇄해 줄 수 있다.

 

11장 카이니스와 카이네우스

 

▪ 고대 그리스 신화 카이니스(Kainis) 테살리아 지방의 절세 미녀로 이름 높던 카이니스는 인저이 없는 해변을 혼자서 걷고 있었다. 바다의 신이자 신들의 왕 제우스의 형이고, 자주 여인네들을 겁탈했던 포세이돈이 그 모습을 은밀히 훔쳐보고 있었다. 더 이상 욕망을 억제할 수 없게 된 포세이돈은 사정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욕심을 다 채운 포세이돈은 그녀가 측은한 생각이 들어 보상으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남자의 성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남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남자 중의 남자’, 어떤 전투에서도 상처를 입지 않는 불사신과도 같은 전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포세이돈에게 당한 것과 같은 치욕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 말이다. 포세이돈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남자로서의 변신은 완벽해서, 카이니스는 카이네우스(Kaineus)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카이네우스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날카로운 검을 뛰어난 솜씨로 휘둘러 많은 적을 죽였다. 그렇지만 상대의 검이나 창은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이 메타포의 뜻을 읽어 내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카이네우스는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져서 이윽고 신들까지 무시하게 되었다. 그는 시장 안에 자신의 창을 세워 놓고 사람들에게 그 창을 경배하고 그 창에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게다가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못하도록 엄한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 또한 매우 분명하다.

그리스 인들은 극도의 오만함을 흔히 ‘지나친 자신(hubris)’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오만함은 남성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네우스의 오만함은 신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고, 결국 벌이 내렸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신들에게 충분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 인간에 대해 신들은 복종을 요구했다. 이윽고 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카이네우스의 몰염치한 작태는 인간들의 재판 기록을 책상 하나 가득 쌓아 놓고 있는 제우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제우스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키메라인 켄타우로스들에게 자신의 무자비한 판결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켄타우로스들은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카이네우스를 공격하면서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너는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남자라는 거짓 형상을 얻게 되었는지 잊었느냐? … 전쟁은 남자들에게 맡겨 두어라.” 그러나 켄타우로스들은 카이네우스의 빠른 칼을 당해 내지 못하고 무려 여섯이나 목숨을 잃었다. 카이네우스의 몸에 닿은 그들의 창은 지붕에 떨어지는 싸락눈처럼 힘을 쓰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켄타우로스들은 치욕에 떨면서 “온전하지도 않은 반쪽 남자에 불과한, 고작 한 명의 적에게 패했다.”라는 공허한 푸념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숲의 나무를 이용해 카이네우스를 질식사시키기로 결정하고, “그의 끈질긴 생명을 빼앗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나무를 베어 냈다. 카이네우스는 호흡에 관해서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끝나자 켄타우로스들은 카이네우스를 질식시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를 매장하려 할 때, 그들은 카이네우스가 원래의 카이니스로 돌아간 사실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다. 용맹한 전사가 연약한 처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불행히도 변신을 위해 포세이돈이 사용했던 양이 카이니스에게 너무 많았던 것이었으리라. 한 사람의 남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적당한 양이 있는 법이고, 그보다 넘쳐도 모자라도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 공격성은 생물들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적절하게 제어될 때에만 적응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13장 생존을 향하여

 

▪ 산소 호흡은 먹이에서 에너지를 얻는 효율을 훨씬 높여준다. 그러나 산소는 인체에 유독하기 때문에, 생체에 의한 처리에는 그만한 비용이 들어간다.

▪ 바다 속을 누비고 다니는 펭귄이나 맹렬한 속도를 자랑하는 달리기 선수 타조도 하늘을 나는 능력을 잃었다. 헤엄치거나 달리기 위한 공학적 설계와 하늘을 날기 위한 설계는 양립할 수 없다. 이러한 양자택일에 직면한 거의 대부분의 종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모든 선택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생물은 지구라는 무대에서 사라져 간다. 과도한 보편화란 진화의 방향에서는 실수이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좁은 방향으로 특화된 생물이나 제한된 환경에서만 능숙하게 생존할 수 있는 생물도 결국 멸종할 위험이 높다. … 과도한 특화(overspecialization)가 위험한 것은 환경이 변화되어 오도 가도 못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이다. 가령 어떤 생물이 현재의 서식지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반대로 미래에 일어날 우연한 사건 – 그 대부분은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 에 대비하느라 모든 시간을 사용한다면 단기적으로는 매우 불리할 것이다. 자연은 생물들을, 단기와 장기 사이에 최적의 균형을 찾고, 과도한 특화와 과도한 보편화 사이에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트린다.

▪ 빠르지만 대참사를 수반하지 않는 변화는 … 유성생식이라는 효율적인 대응 수단을 낳았다. 유전자 재조합이 유전적인 다양성을 큰 폭으로 늘리기 때문이다.

▪ 그들에게는(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다. 무슨 수로 미래의 일을 알겠는가? … 막연한 ‘미래’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유전자 빈도의 집합을 예방책으로 미리 갖추어 놓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 생물집단은 돌연변이와 선택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보조를 맞추고 항상 최적 적응에 근접하려고 애쓴다. 유전자 빈도는 항상 완만하게 움직인다. 변화하는 물리적 생물학적 환경 속에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야기하는 이 점진적인 움직임은 다윈이 묘사한 진화의 과정이다.

▪ 아직까지 어떤 생물도 자신의 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의식적인 진화 전략’을 채택한 적은 없다. 자신들을 소집단으로 분할하고, 유전적인 표본 추출의 우연을 증폭시키고, 동시에 근친 교배라는 극악한 영향을 회피하기로 결정한 적도 없다. 그러나 진화적인 과정에서 늘 그렇듯이, 우연을 통해 적절한 변화를 일으킨 종은 우선적으로 많은 후손을 퍼뜨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 불완전한 격리는, 즉 다른 집단과의 격리와 성적인 자유분방함이 적절히 뒤섞인 상태는 다양성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 다양성이야말로 선택이 작용할 수 있는 원료인 것이다.

 

 

 

15장 굴욕적인 반영

 

▪ 막 동물 행동학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은 동물을 의인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의인화란 문자 그대로 동물들을 인간적인 형태로 바꾸는 것, 즉 그 생각을 알 수 없는 동물에게 인간의 태도나 정신 상태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과학자라면 동물의 실제 행동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실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각 기관을 통한 입력과 그에 수반되는 행동이라는 출력이 있다. 오직 그뿐이다. 동물은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은 기계적인 블랙박스이다. 행동주의(behaviorism)라고 불리는 이 학파는 미국 과학계의 초(超)실현주의적 흐름의 한 보기이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자동 기계’와 유사하지만, 자유로운 탐구를 위한 여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행동주의는 궁극적으로도 인간에게도 아무런 사고나 감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16장 유인원의 삶

 

▪ 알파 수컷은 자신이 지위가 높다는 사실만으로 그 지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부추긴다. 우두머리보다 지위가 낮은 수컷들은 서열을 역전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허세, 위협, 또는 실제 싸움으로 알파 수컷에게 도전한다. 그러나 알파 수컷은 2~4마리는 능히 혼자 힘으로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다.

 

17장 정복자에 대한 경고

 

18장 원숭이 세계의 아르키메데스

 

19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 (인용) ‘특히 인상적인 사례는 먹이를 감춰 둔 곳을 다른 침팬지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침팬지가 사용하는 이중 전술, 그리고 그런 허풍을 간파하기 위해 다른 침팬지가 구사하는 잔꾀이다. … 아무런 의도를 가지지 않고 거짓말을 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자기 기만의 관념의 경우에도 고의성이 있으며, 자아의 일부분은 나머지에게 그것이 받아들여지도록 애쓰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침팬지는 자기가 보인 반응이 다른 침팬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인지 분명히 알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C. G. Beer, “Study of Vertebrate Communication – Its Cognitive Implication” in D. R. Gnffin, editor, Animal Mind – Human Mind, 2981)

20장 인간 속에 내재하는 동물

 

▪ 인간의 뇌는 오랜 지질 시대에 걸쳐 형성된 불완전한 기관이다. 뇌의 일부 작용은 다른 작용에 비해 원시적이며 낡은 것이다. 우리의 머리에는 인간이 되기 이전의 과거에서 유래하는 불가사의하고 불합리한 그림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현대인들은 배웠다. 때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 그림자가 늘어나 우리의 합리적인 생활의 문턱 너머로 희미한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다. 인간은 순수 이성의 계몽적인 힘에 대한 18세기의 믿음을 이미 버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순이 없는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두운 본성에 깜짝 놀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야. 인간처럼 살아야 해.”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서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앞으로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인간은 악마야. 인간은 동물이야. 인간은 어두운 숲과 동굴에서 왔다.” ― 로런 아이젤리 『다윈의 세기』

▪ 이빨과 맨손으로 적을 죽이는 것은 방아쇠를 당기거나 단추를 누르는 것에 비해서 감정적으로 매우 격한 행위이다. 도구와 무기를 발명하거나 문명의 이기를 고안하면서 우리 인간은 제어 장치를 배제시켰다. 때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앞뒤를 재 보고 그런 조치를 취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에 해당하는 동물들이 마구잡이로 근친상간과 대량 살해를 감행했다면 그들은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이 되기 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점은 모두 단지 우리 자신, 우리의 정치적 수완 때문이다. 그것은 ‘야수들’이나 우리의 먼 조상들 탓이 아니다.

 

21장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 나는 일찍이 소년이고 소녀였다. 수풀이고 새였다. 바다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였다. ― 엠페도클레스 『정화(淨化)』 (재인용 Early Greek Philosophy, Jonathan Barnes)

▪ 30억 년 전에 생명체들은 내해(內海)의 색을 변화시켰다. 20억 년 전에는 대기의 조성을, 10억 년 전에는 기후와 기상을, 3억여 년 전에는 토양의 지질을, 그리고 지난 2~3억 년 전에는 지구의 외양을 바꾸었다.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생명체를 통해, 물론 자연의 과정을 통해서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기술 문명이 ‘자연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많은 종을 멸종시키고 있다. 나아가 스스로를 파괴시킬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로 보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구라는 무대에서는 벼락부자가 된 종이 무대 장치를 바꾸고 다른 종을 멸종시키며, 그 후 스스로도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는 일이 오랫동안 반복되고 있다. 인간은 아마도 마지막 벼락부자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막에서는 새로운 주역이 등장할 것이다. 지구는 여전히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다. 지구로 보면 이 모든 것은 예전에 여러 번 겪은 일에 불과하다.

▪ 예언은 사라진 능력이며,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떤 명확한 전망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다가올 비래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를 가지고 비관주의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그들의 그림자 속에 다른 어떤 것이 숨겨져 있다 해도, 우리 조상들은 우리에게 ―물론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제도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건네주었다. 그 외에는 그 무엇도 처음부터 미리 정해진 것은 없다.

자신의 부모에 대해 감상적이거나 신비적인 태도를 갖지 않고, 동시에 자기의 결정을 두고 부당하게 부모를 탓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부모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길고 긴 음지(陰地)나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 그리고 조상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후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살필 수도 있을 것이다.

 

 

 

 

(127) [인간이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분자를 가지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성서에서 6일만에 만들었다고 한다는 것은 이러한 예와 같다.]

매우 극적이고 강렬한 진술은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날린 찬드라 위크라마싱(Nalin Chandra Wickramasinghe)이 내놓은 바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원시 바다 속에서 분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자동적으로 생명이 발생한다는 것은 고물 하치장에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더니 자동적으로 보잉 747 여객기 한 대가 조립되어 있더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생생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매우 유용한 비유입니다. 보잉 747 여객기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품인 채로 항공업계에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51) 그들이 보내면 우리 은하에서도 가장 나이 어린 통신 문명인 우리가 듣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문명이 우주 내에서도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측면임을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154) 외계인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뾰족한 귀라든지, 안테나라든지, 초록색 피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지 몰라도, 그런 것은 사소한 외모 차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외계인과 인간은 똑같습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요? 인류의 진화로 귀결된 확률적인 무작위 사건들의 기나긴 연쇄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발상은 어떻습니까? 이것 역시 상상력의 실패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일까요? 가령 우리는 하느님이 콧구멍을 갖고 있고, 숨도 쉰다고 상상하는 것일까요? (..) 제가 생각하기에 이른 바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이라는 구정에 들어있는 유일한 의미는, 우리 인간과 더 고등한 유기체 - 물론 그런 것이 정말 있을 경우 - 사이에 지적인 유연성이 있다는 의미뿐일 것입니다.

 

(166) 폰 데니켄의 감정적 호소.. 그것은 바로 외계인이 찾아와서 우리를 우리 스스로부터 구해 주기를 바라는 염원이었습니다. 만약 그 외계인들이 인류사에 있어 이미 여러 번 간섭한 바 있다면, 당시에도, 그러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인식되었던 크나큰 위기의 시기에도, 또한 전 세계적으로 5만 5천 개에 달하는 핵무기가 있는 오늘날에도, 외계인들이 지구를 찾아와 우리가 스스로에게 최악의 짓을 행하는 것을 막아 주리라는 염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것을 극도로 위험한 교리라고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해결책이 외부로부터 온다고 가정하면 할수록, 우리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가능성은 더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172) 제가 보기에 이것(UFO 목격경험)은 우리가 정신 병리와 의식적 사기 행각과 자연 현상에 관한 잘못된 이해가 조합된 어떤 것을 상대하고 있을 뿐이지, 이른바 UFO 목격자들의 경험담을 상대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해주는 것입니다.

  1950년대 뉴멕시코 주의 고속 도로에서 순찰대 소속 경찰관이.. 그는 커다란 접시 모양의 물체가 막 땅 위에 내려앉고, 햇빛이 거기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과학자들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서 그 장소로 날아갔습니다. 한참 달려가다 보니 어떤 농부 한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농사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과학자 일행이 말했습니다. "비행접시가 있지 않습니까." "비행접시? 뭔 놈의 비행접시요?" 농부는 뒤를 돌아보았는데 분명히 그 물체를 보면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몇 분에 걸친 당혹스러운 대화 끝에 그들이 본 것은 그 농부가 사용하는 곡식 보관용 사일로였음이 밝혀졌습니다. ...고속 도로 순찰대원이 본 것은 구구절절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세부 사항만 빼고 말입니다. 그는 그 물체가 착륙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목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그가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 강조되는 바는, 이와 같은 종류의 논증에서는 그 논증의 연쇄에 있는 고리들이 모조리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논증의 연쇄에 있는 고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옳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중 하나다로 약한 고리가 있으면, 논증의 연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176) 기적이란 우리가 기꺼이 믿고자 소망하는, 갖가지 종교적인 이야기들의 집합체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기적인 줄로 알았던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폭로되면 매우 분노해 마지 않습니다.

*** devil's advocate(악마의 변호인) : 기적이라 주장하는 사건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제시함으로써 그 증거가 얼마나 훌륭한지 여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192) 하느님에 대한 서양의 통속적인 시각은 덩치가 거대하고, 피부색이 밝으며, 길고 흰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하늘 위에 있는 매우 커다란 보좌에 앉아서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도 일일이 세고 앉아 있는 양반이란 것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상당히 다른 하느님에 대한 시각도 있는데, 가령 바루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두 번째 종류의 신을 그들은 그저 '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항상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비유를 써서 이 세계를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의미한 하느님이란, 우주의 물리 법칙의 총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즉, 중력 더하기 양자 역학 더하기 대통일장 이론 더하기 다른 몇 가지가 하느님과 등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의미한 바는 우주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상당히 많이 설명해 줄 수 있어 보이는, 절묘하고도 강력한 물리학적 원리들의 집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연 법칙이란 국지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글래스고에서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먼곳에서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224.

텍스터의 연구는 다양한 범주들을 하나로 편집해 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레스콧의 연구는 다변량 해석(multivariant analysis), 즉 통계적 상호 관계를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도출된 연결점은 방금 제가 말씀드렸던 두 가지 성격의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레스콧의 견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적 차이는 해당 문화에서 어른들이 자기 아이를 안아 주느냐의 여부, 그리고 청소년 간의 때 이른 성적 활동을 허락하느냐 여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른들이 아이를 안아 주고, 십대들이 마음껏 성행위를 할 수 있는 문화에서는 강력한 사회적 위계가 없으며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반면 어떤 사회적 금제 때문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안아 주지 않고, 청소년 간의 때 이른 성적 활동에 대한 금기가 있는 문화들에서는 결국 살인과 증오가 횡행하게 되고, 강력한 지배적 위계가 생기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230.

저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종류의 태도를 지니고 인생을 시작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인들의 땅에서 자라나는 셈인 것이, 처음에는 우리가 매우 작고 어른들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일련의 느린 단계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자라나고, 어른들 중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린 시절의 일부분이 사라지지 않고, 자라나지도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격 형성기에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이 우주에는 여러분보다 더 크고, 더 나이가 많고, 더 현명하고, 훨씬 더 강력한 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며, 절대적으로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장 강력한 감정적 유대는 바로 그들과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은 가끔 여러분에게 분노를 표시하며, 그러면 여러분은 그 분노를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시키고, 여러분은 반드시 그들과 화해해야만 하고, 여러분은 반드시 그들에게 사과해야 하고, 여러분은 반드시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라난 다음이라 하더라도, 과연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인격 형성기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 사실 이것은 Sigmund Freud가 <토템과 터부>와 <환성의 미래>에서 주장해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주장입니다. 프로이트의 견해는 “근본을 따져 보면, 하느님이란 결국 높아진 아버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238.

만약 종교적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물질이 있다면..... 이득은 무엇일까요? 경험의 본성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 앞에서 갖게 되는 강렬한 경외와 겸손의 느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예배하고 순종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그토록 부단하고 그토록 고통스럽게 공연히 발버둥치는.... 그렇게 함으로써 뭐가 좋을까요? 그것은 사회적 일치(social conformity)를 산출하거나, 사회적 안정성과 도덕을 공고히 해줄 것입니다.

 

 

271.

여러분도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신다면 그야말로 놀라실 것입니다. 국경이라고는 전혀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구상에 이른바 적도라는 것, 또는 남회귀선이니 북회귀선이니 하는 것이 실제로 있는 듯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지구는 실제입니다. 지구상의 생명 역시 실제이며, 오늘날 이 지구를 위험에 처하게 한 정치적 분열은 하나같이 인류의 고안품입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내린 계명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작은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275,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삶이란 불가능하다.”  - Leo Tolstoy, <Anna Karenina>

 

276.

종으로서 인류의 성공은 물론 우리의 지능 덕분이지, 감정 덕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말고 다른 수많은 동물 종들 역시 감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다른 동물 종들은 또한 저마다 다른 정도의 지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공에 있어 진정으로 기여한 것은 바로 우리의 지능 – 즉, 뭔가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관심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에다, 손을 다루는 능력과 공학적인 재능이 덧붙여진 것 –입니다.

 

 

279.

인간의 마음 내부의 갈등으로 바라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본성에는 관료적이고 위계적이고 공격적인 부분들이 있으며, 신경 생리학적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우리는 파충류인 우리 조상들과 우리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에는 사랑할 수 있고, 공감을 할 수 있고, 외관상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보이거나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시할 수 있는 일반화된 역량이 우리 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우리의 대뇌 피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부분들이 서로 갈등을 빚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반성에,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 내에 있는 이처럼 경쟁하는 경향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