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실습이 끝나고 난 첫날, 오늘의 한가함을 축복하기 위해 책 한권을 읽었다.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등의 단편집을 읽고 내 마음 속 작가 3위에 등극해 있는 그녀의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이전에 읽어왔던 글의 제목이나 표지와는 달리 뭔가 산뜻하고 발랄하여 눈에 띠었다.
음, 하지만... 예상과는 조금 다른 스토리. 오랜 투병 중이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감동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모르나, 나보다 많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몸이 건강한 내가 고마워야 할텐데, 오히려 그 반대의 느낌이 든달까. 어쩌면 난 남들보다 마음의 병이 더 큰 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아름'은 여든의 몸으로 열일곱의 시간을 살고 있는 소년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꼭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올랐는데, 정반대의 상황이긴 하지만 인물이 받는 고통은 같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 나는 이 병이 판타지처럼 작가의 상상에서 탄생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있는 병이란다. 일명 '조로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영화 <오, 브라더스>에서 김범수가 맡은 인물도 걸린 병으로서 이미 다뤄진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므로 패스!)
몸의 성장이 뇌의 성장보다 빠른 조로증. 하지만 주인공 '아름'이는 다른 10대들보다 몸의 성장속도만큼이나 마음과 뇌가 같이 성장해버린 듯하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아프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아이들이 부모에게 해줄 수 없다고 믿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자식'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아름이를 보는 아빠나 엄마는 안쓰럽다.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거야. (중략)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그러니까 너는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p.50)
통원치료를 하거나 혹은 입원하면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아름'이는 세상의 이치를 책으로 깨우친다. 특정 장르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책을 읽는 그는 '철학서는 꽤 어렵고 지금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데가 수두룩하지만, 우아하고 긴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며 읽'는다. 27의 뇌와 몸으로 성장하는 나에게도 읽기 어려운 철학서를 '당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이며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나중에야 도착(p.52)'한다고 생각하면서 읽는 아름이. 몸의 병이 그의 마음과 긍정적인 사고에는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밝고 명랑한 성격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성숙한,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귀병에 걸린 아름이를 뒷받침해주기에는 집안형편이 많이 어렵다. 아름이의 아빠는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아름이를 돌보면서 집은 빚에 허덕인다. 이젠 돈을 빌려줄 친척도 친구도 없는 상황이므로 아름이 가족은 엄마의 친구 남편이 연출하는 '이웃에게 희망을'이라는 성금모금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러던 중 아름이는 익명의 이메일을 받는다. 방송을 보고 아름이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서하'라는 여자 아이였다. 아름이와 같은 병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오랫동안 입원해야 하는 병을 앓고 있는 서하. 그녀와 아름이는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서하는 희귀병에 걸린 환자의 삶과 사랑을 그리고 싶었던 30대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로 밝혀진다.
기막힌 반전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는 이야기인 <두근 두근 내 인생>. 단지 그 이야기가 공포와 충격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던 점은 작가의 톡톡튀는 발랄한 문체와 병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삶을 걸어가는 '아름'이의 긍정적인 성격이 크게 작용했다. 어둡고 절망스럽게 그려질 수 있는 아름이의 삶을 밝게 그려낸 작가 김애란은 삶은 단면이 아니라 양면, 아니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희귀병에 무지하고, 또한 부담스러워 하는 나의 편견의 벽을 허물고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아름이를 보면서 삶은 고통스럽지만 살만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평탄하고 무난한 삶을 걸어오다 첫번째 시련에 벌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회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어려워할 만한 일도 아님을 읽는다.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생각과 고민으로 힘들어하고 있기에.
삶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면, 혹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아름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당신은 빛을 품고 유유히 고통의 길을 벗어나 삶의 밝은 면을 다시 보게 되리라.
1. "소설이에요, 아빠. 여기 주인공인 남자애가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가다 폭풍우를 만나 조난당하는 이야기예요. 이야이는 태평양 한가운데 호랑이랑 남겨지는데, 어느 순간 절망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고 말해요. 그리고 어느날 자기가 그렇게 경계했던 호랑이가 떠나자 엉엉 울어요. (중략) 그러니까 아빠, 언젠가 아빠가 너무너무 외로울 때, 이 세상이 무섭고 막막한 태평양처럼 느껴질 때 말이에요. 그때 제가 아빠의 호랑이가 되어드릴게요."(p.55)
2. 아버지가 어른이란 말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그것은 다름아닌 외로움의 냄새였다. 말만 들어도 단어 주위에 어두운 자장이 이는 게 한번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이었다.(p.67)
3.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p.79)
4. 앞으로도 그러고 살겠죠? 거절당하고 실망하고, 수치를 느끼고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을 해보고...... 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어, 그러니까 저는 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실패해보고 싶었어요. 실망하고, 그러고, 나도 그렇게 크게 울어보고 싶었어요. (p.172)
5. 내 성격은 조금 바뀌어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는 습관이 든 거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더 성급해지고 경솔해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갖는 기분이었다.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