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와 판타지의 즐거움을 동시에... 『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왕이 있고 왕비가 있다. 대를 이를 왕자도 있다. 물론 첫째 왕자가 그 계승을 잇는다. 과거의 우리 역사나 세계사에서도 그랬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왕비는 대를 이를 왕자를 낳는 것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실제 우리 집의 지배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데 말이다. ^^)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이미지는 여왕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여줄 것 같았다. 성별의 구분이나 차별이 아닌, 그저 그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여왕일 뿐이지 않을까 하고 바라면서 읽게 됐다. 누구나 평등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며, 신분이란 계급이 의미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는 주인공의 활약을 기대하며 펼쳤다.

 

적혈과 은혈. 피로 나뉜 신분의 세계가 있다. 은혈이 적혈을 지배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적혈로 사는 소녀 메어 배로우. 위기의 순간에 우연히 궁으로 들어가 둘째 왕자 메이븐의 왕자비가 된다. 친구인 킬런의 징병을 막고자 그렇게 바랐으나 킬런은 메어의 바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재능은 왕실의 시선을 받고 왕자비 간택이 된 거다. 그녀와 처음 마주한 첫째 왕자 칼 역시 왕이 이끄는 지배 구도에서 적응한 인물이다. 부드럽고 나약해 보이는 메이븐에 반해 칼은 강한 전사의 모습을 풍긴다. 파티에서 그의 팔에 안기고자 꿈꾸는 소녀들도 넘쳐난다. 그만큼 남자다움과 왕위 계승자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은혈에게 있는 재능들은 그들에게 특별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런 이유로, 그 재능과 피의 색으로 나뉘고 차별받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 되지 않나. 적혈의 분노와 투쟁은 그런 이유로 계속된다. 살아가는 진짜 이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포함하여 어떤 세상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보게 한다.

 

내 취향과 조금 벗어난, 그저 그런 판타지 소설일 거로 생각해 염려가 앞섰다. 막상 읽고 보니 판타지를 넘어서서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다양해서 다음이 기대되는 소설이다. 특별한 재능이라 여기며 신분을 구분 짓는 구도. 그런 구조의 세상에서 지배받는 삶을 살다가 본인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적혈로 살아왔던 메어가 번개 소녀라 불리며 찾아낸 재능은 그녀의 신분과 운명을 바꿔놓는다. 적혈로 살았지만 은혈의 숨겨진 보물이었다는 설정으로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손을 잡긴 했지만, 앞으로 그녀의 삶이 어떻게 바뀔지 어떤 마음으로 은혈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훈련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더는 소녀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녀가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커지면서 피부에 닿게 될 여러 가지 환경이, 그녀를 성장시킬 거라는 기대가 커진다는 거다. 어쩌면 숨겨진 전사로 키워지지 않을까, 은혈이 그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은혈을 이용해서 그녀만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메어가 중심이 되어 변화할 세상이 궁금해지는 거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로맨스. 메어가 찾아낸 재능을 십분 활용하면서 그녀에게 조력자가 될 메이븐이 어떤 힘을 실어줄지 긍정적인 기대를 하게 한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나는 어떤 어긋난 로맨스를 상상했다. 아직 그들의 로맨스는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 내 마음이 출렁인다. 칼의 등장은 메어에게 먼저 손을 뻗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왕은 메이븐에게 메어의 손을 잡게 한다. 그럼 처음부터 등장했던 칼은 그대로 남편의 형이 될 것인가? (후훗~) 알 수 없다, 아직은... 이미 서로에게 정해진 짝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고 있지만, 다 드러내지 않은 채로 서로의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마음이라 더 크고 다양하게 그려지겠지만,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이제 막 두근거리는 마음이 시작되려고 하니까.

 

무엇보다 더 크게 보이는 건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누군가, 언제부턴가 이미 정해놓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부조리하고 옳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 적혈의 시도는 그런 이유로 큰 의미가 있다. 은혈과 적혈. 붉은색과 은색의 대조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지만, 그렇게 비치는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누가 누구를 지배하기 위한 구분은 아니다. 그저 서로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다를 뿐인데, 그게 지배와 피지배의 결정짓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적혈의 싸움을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와 다를 바 없이 그려지는 이 소설의 배경이 아픈 이유이기도 하다. 살 만한 세상,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세상을 그리고 싶은 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 터이니...

 

영화로는 또 어떤 재미를 만나게 될지 궁금해지면서, 메어, 메이븐, 칼, 킬런. 주인공을 둘러싼 사랑과 우정, 음모, 배신이 넘나드는 판타지 로맨스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 자리에 머문 시간, 마음마저도... 『봄의 정원』

 

내가 너무 건조하게 살아서 그런 걸까. 그리움이란 단어 속에서 오래전 어떤 기억을 떠올려보려 하니 금방 떠오르는 게 없다. 오늘도 매일 다니는 거리, 자주 보는 사람들, 익숙한 건물.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채우는 평범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언젠가,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르게 보일까? 선뜻 어떤 대답을 꺼낼 수가 없다. 그렇다는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곰곰 생각해보니, 항상 보는 곳들이라 특별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그 장소 그 시간에 포함할 사람이 함께한다면,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무언가를 함께한 기억이 머문다면, 나는 지금의 건조함과는 다르게 오늘, 이 장소를 더 기억할 것 같다. 나의 일상을 채우는 배경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좀 더 소중하고 애틋한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저장해놓을 것 같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다가간 그 장소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시간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곳, 그게 비록 호기심일지라도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다. 오래된 연립주택에 머무는 사람들. 전직 미용사 다로는 얼마 전에 이혼했다. 같은 연립에 사는 여자 니시가 이웃집 '물빛 집'을 몰래 들여다보는 걸 알게 된다. 니시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니시는 다로에게 '물빛 집'을 찍은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 20년 전에 그 집에 살던 광고감독과 여배우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진집으로 니시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이사할 집을 찾던 니시가 '물빛 집'을 바라보고 싶어 그 옆의 연립으로 이사와 살게 된 것까지. 그렇게 물빛 집을 관찰하던 니시를 발견한 다로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다.

 

별것 없어 보였다. 니시의 기억 속의 생각들과 현재 눈앞에 보이는 물빛 집을 향한 호기심이 전부인 것 같았다. 오늘을 사는 여자가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져 온 집을 보고 싶은 간절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사진집 <봄의 정원>의 두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와 사진집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독자의 마음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한때 누군가 행복하게 살던 장면을 보는 기분은 어떠한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이사하게 눈길이 더 머무는 건, 그 안에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표정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광고업자와 여배우 부부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흐뭇함이 우리가 바라는 삶을 비춘다. 물빛 집 정원의 나무들이 자라고 가꿔지는 시간 동안 그들의 시간도 함께 자랐을 거다.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욕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니시가 손에 피를 보면서까지 그 집 욕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녀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젊은 부부의 시간을 새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한때를 그렇게 저장해놓고 싶었는지도...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는 몰랐던, 생각나지도 않던 일들이, 소설이 끝나갈 무렵에는 하나씩 내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책상에 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싸우던 짝은 어떤 아줌마가 되어있을지 궁금했다. 세상 그따위로 살지 말라며 싸우고 헤어진 옛 남자는 지금 어느 거리를 걸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갑자기, 10여 년 전 요리학원에서 만난 언니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었는데, 그날그날 살아가면서 겪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움과 섞여 마음속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지금 이 거리를, 이 시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소설로 듣는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품고 있어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 수 없는 일로 머물지 몰라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오늘 이 시간의 풍경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이다. 주말의 낮에, 조금 늘어지게 늦잠을 잤고, 뒤늦은 아침을 먹고 다방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쌓여있던 잡지를 몇 권 뒤적거렸고,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놨다. 온 집안의 창을 열고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가 다 되는 사이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하면서 며칠 전 내린 비로 다 떨어져 버린 봄꽃 이야기를 했다. 짧은 봄이 가는 게 아쉽다며 곧 시간 내서 얼굴 보자는 말로 인사를 했다. 나의 이런 오늘 하루가 누구나 비슷하게 보낼 수 있는 평범한 주말의 하루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이 보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오늘이 특별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미리 말해주는 소설이 시바사키 도모카의 『봄의 정원』이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소소한 일상이 우리의 소중한 시간으로 저장되는 순간이다. 바로 지금.

 

바쁠 때도, 시간 여유가 있을 때도, 빠르다는 이유로 KTX를 선호하곤 했다. 기차 좌석에 오래 앉아있으면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어디를 가든 빨리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KTX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모든 기차역에 정차하던 완행열차가 떠오른다. 천천히 가면서 창밖 풍경을 놓치지 않게 하고, 모든 역에 정차하면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보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느긋하게 앉아있던 그 불편한 좌석이 그리워진다. 다시 만나지 못할 기억과 시간이어서, 오래된 앨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사진처럼, 마음속에만 머물 수 있어서 더 그럴 테다...

 

어떻게 살아갈까요?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20여 년 전에 『소피의 세계』를 접했지만 완독하지 못해서인지 이 소설에 대해 읽기도 전에 걱정이 앞섰다. 너무 유명해서 부담스러웠던 작품의 저자가 들고 온 이 책이 자꾸만 그 무게감을 더했던 거다. 물론 여전히 이 작품이 마냥 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어떤 선입견이나 지레짐작 없이 만난다면 차분하게 읽어가면서, 크고 작은 생각들을 더 해가면서, 무언가 자꾸 생각의 연결고리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한스의 여행이다. 8년 전에 떠난 엄마를 찾아가는 거라고 했지만, 그 목적지에 이르면 무언가 분명하게 다가올지 어떨지 모르겠다. 그토록 찾는 엄마가 거기 있을지, 그 여행을 끝내고 엄마와 함께 돌아올 수 있을지. 어쨌든 이 여행의 끝은 있어야 하므로 계속된다. 노르웨이의 아렌델에서 그리스의 아테네까지 가는 그 여정에서 머물고 만나는 사람들. 난쟁이의 등장은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나는 왜 자꾸 난쟁이의 실재를 의심하기만 했을까. 난쟁이에게 선물 받은 돋보기, 도르프 마을 제빵사 노인이 준 빵의 의미, 그 빵 속에서 발견된 작은 책, 돋보기로만 볼 수 있는 그 작은 책까지 이어지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이 여행의 긴장감과 즐거움을 고조시킨다. 동시에 독자에게도 한스의 여행과 비슷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어떤 이야기가 들려올지 궁금하게 하면서 이 소설에 점점 몰입하게 하니까. 현실인지 상상인지 가늠할 수 없는 섬에 도착한 사내의 이야기에 한스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기대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한스가 도르프 마을로 가게 된 이유, 아니 난쟁이가 한스를 보낸 거라고 해야 할까. 그곳에서 펼쳐질 무언가에 자꾸만 가슴이 부풀어 오르려고 한다. 여행의 재미와는 별개로 가슴 속에 묵직하게 남을 이야기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

 

숨어있는 듯한 이야기가 조금씩 등장할 때마다 머릿속이 바빠진다. 추리하듯 인물들과 이야기를 엮어내기에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아진다. 한스에게 책을 남긴 사람은 누굴까. 어느 정도 추측이 되긴 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나지도 않기에 자꾸 궁금해진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삶의 선생 같은 지침이 묻어난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에 어떤 경험과 생각들이 쌓였는지 듣게 한다. 프로데, 알베르트, 루트비히로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지 끊임없는 고민.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살아온 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는 게 필요한 순간이 많아진다. 먼저 겪은 세상, 그 세상을 보는 눈, 그 세상에서 살아가며 몸에 스며든 시행착오가 불러올 나은 삶. 이건 아마도 지금 우리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선택되지 못한 길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마음과 선택된 삶에 최선으로 노력해야 하는 숙제가 남은 것처럼,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묻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한다.

 

이 소설의 각 챕터마다 등장하는 카드와 그 카드에 얹고 싶은 말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떻게 살아갈까요?'라고 은근히 묻는 듯한 분위기다. 실제와 상상 그 사이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여러 방법을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닐까 생각한다. 불가능할 거라 믿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시도해 보는 게 상상일 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가끔은 그 시도를 현실로 끌어와 보고 싶은 용기와 도전이 삶에 적용되기를 바라는 게 우리의 마음일지도 모르니까.

 

퍼즐을 맞추는 듯한 흥미로움이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한다. 존재 의미를 묻는 여행에 로드 무비 같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엄마를 찾아가는 걸 생각하면 가족이 화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이 하고 싶은 말은 살아가는 그 의미와 자세다. 내가 누구인지 물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숙제를 던져주고, 트럼프 카드 52장으로 살아갈 것인지 묻는다. 그에 답은 조커라는 선택지가 있음을 드러낸다. 살아가면서 부딪힐 수많은 선택 앞에서 우리가 만날 답도 그에 비례한다고 시사한다. 내 앞에 놓은 선택이, 답이 무한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난쟁이의 존재를 자꾸 의심했던 게 떠오른다. 그냥 보이면 보이는 대로 믿으면 될 일은, 왜 자꾸 의심했을까. 그건 아마도 살아오면서 겪은 부정의 모습들 때문인 듯하다. 자꾸만 캐내고 찾으면서 내 앞의 문제를 도모해야 할 때, 이미 정해지고 봐왔던 답으로 대체하는 게 현명한 삶이라고 믿어온 시간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은 난쟁이는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환상에 머무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 내 마음에 반대되게, 아마도 주인공으로 소년을 등장시킨 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선입견이나 답을 정해두지 말라는 경고로 보인다. 그저 지금 놓인 것들을 보이는 그대로, 차분히 펼쳐보거나 밟고 걸어가면 될 일이다. 내가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 360도의 세상이 보이는 거다. 우리 삶의 선택지도, 살아가는 매 순간에 보일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360도로 펼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