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으로 존재하기를... 『애인의 애인에게』

 

여전히 모를 것 같으면서, 어쩌면 알 것도 같은 감정이 들게 하는 이들의 사랑에 오래전 기억을 꺼냈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다 될 줄 알았다. 내 마음이 이러하니 당연하게 상대도 같아질 거라 믿었다. 너무 어려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내가 정말 사람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했던 건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게 기적'이라는 말을 신뢰하게 되었던 그때 한 번의 경험으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마음이 나와 똑같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그게 쉽다면 기적이란 말도 나오지 않았겠지. 그저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아지기를, 비슷한 양이길 바라는 선에서 멈추었을 뿐이다. 그 마음이 비슷해지면 애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시간을 이어갔고, 그 마음의 간격이 커지고 손이 닿지 않게 될 무렵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서로의 마음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횟수가 늘었다. 이별의 감정이 단칼에 정리되는 건 아니라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와 같지 않은 마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상대에게 바라는 건 그 정도였다. 사랑하는 건 '우리'였지만, 그 '우리' 안에 '나(너)의 사랑'이 분명하게, 별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거다. 소설 속의 정인, 마리, 수영, 그리고 성주의 사랑이 각자의 사랑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에 한참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다.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247페이지)'이라는 수영의 말이 내 가슴에 직선으로 꽂히는 순간이다.

 

자기가 마음에 품은 그 남자, 성주가 궁금해서 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 정인이다. 자기가 모르는 그의 모습이 궁금했을 터. 그의 모습을 찾고자 들어간 그 집에서 정인은 성주가 아닌 그의 아내 마리의 삶을 보게 된다. 그녀의 성격, 생각, 손길을 느낀다. 성주가 자신의 사랑이라 믿고 선택한 마리의 불안은 끝나지 않을 거고, 그녀 자신의 사랑을 끝내야만 그녀의 불안도 끝날 것이다. 영주권을 위해 마리를 선택한 성주였지만 그의 진심은 그게 아닐 거라 믿고 싶었을 테지. 수영에게 사랑을 고백한 성주 역시, 그 말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거다. 이미 마음에 들어온 그 사랑을 가만히 죽일 수는 없으니까.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결혼을 유지하며 성공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수영의 마음은 각자의 사랑을 인정한 후에야 평온해졌다. 자기에게 찾아온 여자도, 잘 지내지 말라고 말하던 남자도 뒤로한 채, 자기의 삶(사랑)을 향해 걸어가는 게, 우리가 하는 사랑의 최선인 것처럼...

 

라이언의 말이 맞다. 진실과 진심은 종종 어긋난다. 그것은 서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가지만 자주 만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어떤 진실은 한 사람의 진심을 거짓이나 배신으로 만든다. 죄책감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과 상대가 받을 상처 때문에 진실에서 멀어진 진심을 선택하는 사람 중에, 어느 쪽이 조금 더 윤리적인 걸까. 어디까지가 뻔뻔한 솔직함이고, 어디까지가 선의의 거짓말인 걸까. 솔직함과 거짓말이 충돌하듯 뻔뻔함과 선의가 충동한다면 그것의 경계 위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183페이지)

 

아마도 그 후의 것을 찾고 싶어서 이들의 어긋난 사랑을 보여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쌍방으로 향하는 건 이렇게도 어려우니,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각자의 사랑을 먼저 인정하고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내가 하는 사랑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생각이 우선할 때 보지 못하던 것을, '우리'가 아닌 '나'의 사랑으로 인정하고 나니 보이는 것들 말이다.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패라고 부르던 수영의 삶, 성주를 가진 여자로 보이지만 그 내면은 갈기갈기 찢긴 마음이었던 마리, 성주를 짝사랑하는 마음에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의 아내를 아프게 보게 된 정인. 그 세 여자 사이에 공존하는 성주 역시 현실에 적합한 상대를 고르며 자기 안위를 챙기기에 바빴지만, 결국 그의 사랑 역시 자기만의 사랑이 되고 만다. 그들의 모든 사랑이 왜 이렇게 쓸쓸하고 힘들어지는 걸까. 이상하게 어긋난 이들의 사랑에서 악역이 보이지 않는다. 간혹 성주의 가벼움과 무책임함에 욕이 나올 뻔하기도 하지만, 낯선 곳에서 채워지지 못하는 것들을 공유하기 바라는 간절함으로 보일 때가 있다. 수영이 성주가 찍은 사진을 보며 읊조리던 것처럼, 자기 뒷모습을 봐줄 사람이 간절해질 때. 혹시 그걸 사랑이라 착각해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찾아올 때 하는 선택. 수영이 남편을, 마리가 성주를, 성주가 수영을 향해 내밀었던 손의 의미가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어떤 것들을 위해 타이밍이 맞춰졌을 뿐은 아니었는지...

 

그걸 알아채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 건, 정인이 마리의 집에서 뜨다만 스웨터를 발견해 다시 뜨기 시작하고, 마리의 집에서 나갈 때 그 스웨터가 다시 완성되었을 때다. 세 여자는 자기만의 사랑을 그렇게 끝내고 그렇게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던 것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마리는 정인이 완성한 스웨터의 포근함으로, 수영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와의 마지막 대화로, 정인은 마리의 삶을 엿본 흔적으로 자기만의 반창고를 가슴에 붙이게 된 거라고. 그 이후의 그녀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또다시 어떤 사랑으로 나아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들이 가슴에 담은 감정이 허투루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패의 아픔이 가져오는 자극이 절대 작지 않을 것이므로.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은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나 외로워 내 그림자라도 안고 싶어졌다. (247페이지)

 

사랑이 화두가 되지만, 사랑 그 자체보다는 사랑에 실패한 듯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그 감정에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다. 두근거림과 설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어긋나면서 보여준 고통스러운 감정들. 누군가의 성공한 연애담보다 이렇게 쓰디쓴 실패담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은 이유는, 그 애틋함보다 실패의 아픔을 공감하는 게 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경험 때문이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는데.'하는 아픔의 공유 같은 것. 세 여자 사이의 성주는 그저 지나간 사랑의 하나쯤으로 기억될 것 같은데, 세 여자가 겪어낸 그 시간은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또 다른 정의로 남았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저 '나의 사랑'으로 존재하기를, 그렇게 시작된 사랑에서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미친 듯이 달려서 찾게 되는 한 가지. 『비트레이얼』

 

살아오면서 크게 작게 바라는 것들이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런 바람 하나쯤 있지 않을까? 우리 살아가는 그 시간 끝에는 늘 행복이라는 도착지가 있길 바라기에, 그 길에서 원하는 것들, 이루기를 소망하며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건 돈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일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살면서 한 번쯤 겪게 될지 모를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함께 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향해 기본적으로 생기는 바람이 있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기를, 그 사람이 내게 주는 마음이 진심이기를, 그 사람에게서 진실만을 보게 되기를 저절로 바라게 된다. 그렇게 바라는 것들이, 상대가 나에게 보여준 것들이 거짓인 것을 알게 될 경우, 그 배신에 치를 떨고, 그동안 살아오며 세웠던 중심이 흐트러진다. 일상부터 인생의 큰 그림까지 엉망이 된다. 그때 나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의심과 억측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한 사람을 직접 대면해 진실 여부를 물을 수 없는 경우 의심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172페이지)

 

사회적으로 성공한 회계사 로빈은 화가인 남편 폴과 함께 모로코로 떠난다. 결혼 3년 차, 더 좋은 관계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 모로코행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로빈의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그동안 로빈이 알고 있던 폴은 누구였나? 폴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고 폴에 대해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앞이 캄캄한 미스터리의 소용돌이에 빠진 듯하다. 그런 폴을 위해 로빈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아니, 무엇보다 로빈의 인생에 닥쳐온 이 위기와 변화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배신한 남편의 행적을 좇는, 굳이 그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로빈의 다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폴의 거짓은 드러났고, 그런 사람을 믿고 더는 함께할 수 없음을 알았고, 헤어지기로 했는데, 귀국길에 그와 동행해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던 거다. 아니, 폴과의 시작부터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해야 할까.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그의 성향을 뻔히 알면서도 폴을 선택한 로빈이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그녀를 폴에게 이끌었다. ‘내가 로빈이라면?’이란 물음표를 머릿속에 계속 띄워보면서 읽게 되는데, 만약 내가 지금보다 많이 어렸더라면 로빈처럼 폴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어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에게 오래 내재한 습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누군가의 성향이 변할 거란 기대는 기적에 가까운 일임을 인정했다. 세상을 살면서 부딪치고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날 때마다 부정의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건 ‘막상 겪어보니 안 되는 일도 있더라.’하는 어떤 경험의 결과를 알아서다. 지금의 나는 폴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를 선택하는 게 어려운 일임을 안다. 그래서 로빈의 폴과의 시작이 무모해 보였다. 그런데도 어떤 선택 이후의 노력과 책임을 다하는 그녀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 선택이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갈지 다 알 수는 없어도, 그 순간 그 선택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니까. 폴의 배신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렇게 두터운 믿음으로 그를 대했던 로빈이었음을 알기 때문에, 로빈이 조금은 다른 이유로 폴을 찾아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의 손을 아직 놓고 싶지 않았기에 말이다.

 

알 수 없고 대책 없는 일들이 로빈 앞에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놀라우면서도 심란해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살면서 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마치 ‘그동안 너 편하게 살아온 것 같으니 이제 한번 당해 봐!’라고 원인 모를 불행이 몰아서 오는 것만 같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라는 생각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때. 딱 그런 기분이었다. 잘살아 보자고, 으쌰으쌰 하는 기분으로 떠나온 여행에서 마주하기에는 절대 예상 못 할 일이지 않나. 기분 좋게 하늘을 날았다가 갑자기 추락한 기분. 남편의 배신과 실종이 불러온 기가 막힌 감정이 채 사그라질 사이도 없이 로빈에게 이어지는, 끝도 없을 것 같은 불행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읽는 내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의도하지 않았던 이 모험에 끝은 있을 것인가?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결말이 내가 아는 뻔한 확인으로 마무리될 것인가? 하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점점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한다.

 

살아가야만 하는 소중한 내 인생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으니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 상대의 배신에 분노할 시간이 없다. 지금 내 앞에 닥친 게 위기이든 배신이든, 건너가야만 하는 순간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는 거다. 배우자의 배신으로 시작된 한 여자의 모험은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생존의 문제인 듯 보이다가, 마침내 이 소설과 그녀의 여정 끝에서 진심을 보인다. 진실을 찾게 한다. 누군가의 배신에 치를 떨어도, 과거 어떤 시간의 죄책감에 질주하듯 그를 찾아다녀도, 복수하겠다고 누군가를 수렁에 빠트리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면서도, 보이는 건 보게 된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심과 호의를 보는 눈이 아직 감기지 않았음을, 그들이 바라는 평범한 삶의 그림을 자신도 그릴 수 있음을,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노력하거나 찾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껏 살아와 보니, 삶의 위기라는 건 예고하지 않고 찾아오는 게 보통이었고, 한 번씩 그 순간을 경험하게 될 때마다 당황하기 일쑤였다.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마찬가지였다. 그 당황의 강도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더라만, 그 기저의 불안과 고통, 약해지는 마음은 같았다. 그때마다 다짐하고 바라게 된다. 만약에 다음에 이런 일이 또 닥친다면, 그때는 더 견고해진 마음으로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기를, 하고 말이다. 이 소설에서 로빈이 찾은 건, 위험의 순간을 몇 번씩 넘기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일 테다. 자신의 삶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 정도의 위기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단단한 가슴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임을, 그 행복 역시 누구도 아닌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저자가 로빈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는, 아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꿈을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행복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439페이지)

 

너무 뻔한가? 식상 한가? 뭐, 그럴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비단 이 소설뿐만은 아니겠지만, 더글라스 케네디가 전달하고 있어서 매력적인 게 있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그의 경험에 어울리게 에사우이라, 카사블랑카, 와르자자트, 사하라사막에 이르기까지 북아프리카의 이국적인 풍광과 문화를 눈에 담게 하면서, 그 더위에 느슨해질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부부의 흥미로운 여행으로 가볍게 뛰게 하다가, 무엇인지 모를 사건의 발단으로 어리둥절 주춤하고 멈칫거리게 하더니, 어느 순간 생존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 긴장의 순간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게 하는 요소를 곳곳에 심어두고 목적지에 이르게 한다.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선택의 기준 역시 행복이 될 것이며,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향을 묻는다. 로빈에게 닥친 위기가 그냥 찾아온 것은 아님을, 그녀의 행복을 폴에게서 얻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다. 나의 행복을 타인에게서 찾을 수 없음을 증명하는 거다. 이 소설 속의 로빈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그 행복의 의미를 묻게 하는 대상이다. 나에게도 로빈은 자극적인 대상이었다. 타인에게서 나의 행복을 조금은 끌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던 나에게 경고를 하더라니까.

 

흥미롭게 읽은 소설인데, 흥미 그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밑도 끝도 없이, 요즘 행복에 대해 참 많이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가 나를 누르고 있어도 자꾸만 상기하게 되는 단어였는데, 이 소설에서 행복을 말하는 또 하나의 개념을 배운 듯하다.

 

 

나의 믿음이 나를 만들 때... 『사라바』

 

선뜻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들려오는 게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데,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한데 계속 읽어가게 된다. 궁금했다. 그 끝에서 내가 보게 될 게 무엇이기에 그 여정의 시작이 태어나는 순간부터인 걸까. 그러면서도 살짝 지루하기도 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어야 하나 점점 고민스러웠다. 그렇게 1권만 읽고 멈출까 망설이는데 뭔가 자꾸 목에 걸린 듯 개운하지 않았다. 내가 이 소설에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도 잘 모르면서, 아직 그 말을 듣지 못한 것만 같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결국, 2권까지 구매해서 읽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1권 7페이지)’로 시작한 아유무의 인생은 ‘나는 왼발을 내디딘다.(2권 420페이지)’로 끝나면서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자신의 믿음을 찾았음을...

 

스스로 사람들에게 예쁨 받고 있음을 아는 아이, 그렇게 모나지 않게 굴면서 사는 고요함이 주는 편안함을 아는 시간을 배우며 성장하는 아유무다.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내아이였다. 하나뿐인 누나 다카코의 기행(?)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건 그런대로 또 누나의 삶이다. 이란에서 태어나 이집트, 다시 일본으로의 삶이 이어지면서 아유무는 점점 그 고요하고 느린 삶을 이어간다. 누나의 소란스러운 삶도 여전하다. 갑작스레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아유무 가족은 와해하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화자인 나, 아유무는 자신의 인생과 가족들의 삶을 바라보며 성장한다. 그의 나이 서른넷, 주변 사람들이 강조하던, 그들이 자기 길을 찾아갔던 믿음을 배우게 되면서 이 기록은 시작되었다.

 

우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어느 순간 몰락할 수도 있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가족이 흩어지는 것도, 준수한 외모와 매력으로 늘 사랑받는 존재였지만 그게 어느 날 갑자기 끝날 수도 있다. 아유무를 이루던 삶이 그랬다. 이란, 이집트, 일본으로 이어져 온 그의 성장에 방해될 만한 게 없어 보였다. 그냥, 이렇게 그의 인생 탄탄대로.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은 그대로 좋은 상태. 가족이라는 구성으로 묶여있지만, 그가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없었다. 가족들은 아유무에게 여러 가지 갈등과 혼란을 주는 인물들이다. 그래도 뭐,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니, 최대한 서로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다 대학 졸업 후의 그의 인생은 추락한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절망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그가 찾아야 할 것을 위한 여정이. 자꾸만 안으로 파고들 것 같은 그는 미친 듯 소설을 찾아다닌다. 지진을 겪었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서로 상관없이 지내던 가족들의 삶을 듣는다. 오래전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야곱을 찾아간다. 모든 게 다 제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조금씩 변했다. 되밟아간 그곳에서 야곱을 마주하고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가 보게 되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갖고 있던 것. 그들이 가진 믿음이다. 그건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나 행위일 수도 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누군가의 존재를 유지하고 걸어갈 수 있게 한다는 거다.

 

“그 애한테는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지.”

내 콧구멍에는 누나 방의 강렬한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는 자동적으로 벽 한 면에 새겨진 꼬리 달린 고둥을 떠올리게 했다.

“스스로 자신이 믿을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돼.”

누나의 종교적 방랑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누나는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토라코몬사마’를 대신 하는 것, 자신이 믿을 것을 찾기 위해. (2권 147페이지)

 

이상하리만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했던 누나의 변화가 궁금했던 아유무가 야다 아주머니에게 들은 말은, 고요하지만 분명하고 힘 있는 문장이었다. 스스로 믿을 것을 찾아낼 것. 종교도 아니지만, 종교인 것처럼 야다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와 사토라코몬사마에 의지하던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믿고 싶은 것을 찾았을 때 찾아오는,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걸음을 내딛게 하는 갈망. 밋밋하던 이 소설이 정점을 찾은 듯 가슴 속에서 울렁이기 시작한 때가 이 부분이다. 그가 오랜 시간 알지 못했고 찾으려 하지도 않았던 게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다. 누나의 변화가 불러온 건 누나 자신의 인생뿐이 아니었던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인생 진리 아니었나? 그런데 이런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게, 역시 사람이라는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가족들이 하지 못했던 말을 하나씩 듣게 되고, 말이 없는 누나의 긴 얘기가 끝났을 때, 마침내 아유무의 믿음 찾기는 시작된다. 그렇게, 3년 전에 왼쪽 발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3년 만에 왼쪽 발을 내디딘다는 다짐으로 끝이 난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런 순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고 한 번 더 말해주는 이야기. 그 움직임이 어떤 믿음으로 시작되었음을 굳이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떤 계기로든 발 내밀 것을 강조한다. 강요가 아니다. 그저 한 번, ‘인생은 이런 거야’라는 고요한 음성으로, 아유무의 누나가 결국 그 방을 나오게 된 거라는 믿음으로 전하는 말이다. 이제 그 말을 누나가 아유무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균형이 중요한 거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의 중심, 그 줄기 같은 것이 확고하지 않으면 안 돼. 몸을 관통하는 줄기가 말이야.”

누나는 차분했지만 열심이었다. 때때로 도움을 청하듯이 아이작을 봤지만, 아이작은 물론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전혀 몰랐다.

“줄기. 내가 찾은 것은, 믿는 것은 그 줄기 같은 거야.”

“줄기?”

“그래.” (2권 268페이지)

 

소설이 끝을 향해 가면서, 뭔가 울컥거리는 게 가슴 속에서 커져만 갔는데, 정확히 그게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긴 어려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한 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답답했다. 아유무가 3년 여의 기록으로 찾게 된 것을 나는, 우리는 어떻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는 걸까. 무슨 주문처럼 외우던 ‘사라바’의 효능을 언제쯤 확신하게 될까... 언제쯤 찾게 될까? 내일? 아니면 몇 년 후? 이 소설은 그게 언제든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믿음을 전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긴 인생을 들려주고 있었나 보다. 어떤 송곳 하나가 찔러올 때까지 조금만 참고 들어보라고 말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게 있다. 아유무가 이 기록으로 알게 되는 것들이 그가 왼쪽 발을 내딛게 했을 테지. 왼쪽 발로 시작한 그 내딛음이 지금쯤 얼마만큼 갔을지 궁금해진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가 이렇게 ‘쓰는’ 행위를 통해 빽빽하게 채웠을 그 믿음을 듣고 싶다.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그대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