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반만 덮는 앞머리에 딱 귀 밑에서 끝나는 짧은 단발머리, 커다란 갈색 눈의 여자 주인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다소 황당하지만 유머 넘치는 현실과 환상이 섞인 아기자기한 (러브)스토리의 영화 ’아멜리에’. 예쁜 분홍빛 표지가 소녀적 감성을 자극하는 <키다리 베르타의 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떠오른 것은 바로 영화 ’아멜리에’ 였다.

사랑과 함께 시작된 운명의 소용돌이

마을의 이름 빼고는 내세울 것 없는, 심지어 볼품없기까지 한 크리스마스 마을에 존재하는 ’무지개 전설’. 무지개가 떴을 때 태어난 베르타는 전설대로 특별한 재능을 지녔어야 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키가 무척 크다는 것 빼고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너무 큰 키 때문에 자신감도 없고 넘쳐나는 힘에 반비례하는 지능을 지닌 아마데우스 외에는 친구도 없는 베르타. 아버지의 과잉보호 속에 외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작스레 사랑이 찾아왔다. 같은 키다리이기에 느낄 수 있는 유대감, 거기에 새파란 하늘 처럼 푸르디 푸른 눈을 가진 요나가 원수지간인 폰사 마을 사람이라는 유일한 결점 때문에 그들은 비밀 연애를 시작한다. 사랑을 시작하고부터 생겨나는 베르타의 감정대로 마을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고  그 사이 예전에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일들은 마을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마을에서 슬픈 일들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고 더 이상의 나쁜 일들을 막기 위함이기라도 한 듯 마을이 사라진 뒤 뿔뿔히 흩어진 옛 ’크리스마스’ 마을 사람들의 현재의 모습을 조명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빗나간 예상. 그러나 환상의 러브 스토리와 현실의 적절한 조화.

처음엔 그랬다. 개성 있는 크리스마스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재미있었고, 베르타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수다쟁이 마르가리타 시푸엔테스의 이름이 또 언제 뜬금없이 나올까 기대되었고, 도중에 크리스마스의 중요 구성원이 된 나귀 때문에 웃음이 났고, 중간중간 삽입된 삽화가 귀여웠고, 아버지 후안의 축복 속에 베두근두근거렸다. 이 말랑말랑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나의 예감대로 동화 같이 흘러갈 줄 알았다. 베르타의 사랑앓이, 좌절, 슬픔, 행복, 얼어붙을 것 같은 슬픈 충격이라는 심리적 변화를 겪을 때마다 날씨가 변화하는 동화 같은 설정에 어울리는 예쁜 결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슬프지만 그렇게 불행하지만도 않은, 디즈니식 해피앤딩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결말을 맞이하면서 책 중 한 귀절,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없다.’를 곱씹었다. 그렇다. 완전한 사랑이 없듯, 완전하고 완벽한 삶도 없기에 이들이 아픔과 상처를 뒤로하고 다시 소소한 행복이 존재하는 일상을 꾸려나가며 책의 끝을 맺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스페인 에로티시즘 판타지.

여주인공의 키 차이만큼이나 내가 떠올렸던 ’아멜리에’와 ’키다리 베르타의 사랑’ 이야기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이다. ’키다리 베르타의 사랑’에는 그만의 독자적인 매력이 가득하다. 현실과 환상을 잘 버무려놓은, 동화 같지만 동화 같지 않은 사랑이야기에서 <하몽하몽>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쿠카 카날스의 스페인 에로티시즘 판타지와 반짝반짝한 상상력을 즐길 수 있다. 거기에 겻들여진 창의력 넘치는 삽화가 이 책에 깜찍함이라는 매력을 더해준다. 베르타의 사랑의 판타지가 궁금하다면 그녀가 보내는 크리스마스 마을로의 초대에 응해보자. 마을 사람들의 즐거운 환대와 함께 베르타의 날씨 마법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 넌 누구냐?!

<죽은 고양이, 컴퓨터 프로그래머, 세상이 분홍색이라 믿는 전자수도사, 유령, 연대기 교수, 타임머신..이상한 사건이 펼쳐지는 가운데 영국의 대시인 클리지의 시구에 감춰진 충격적인 인류의 비밀이 드러나는데>라는 설명 글이 뒷면에 쓰여진 책,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탐정 사무소>. 살인, 실종, 불륜의 남녀관계 등 가장 추악한 사건만 쫓아 다닐 것 같은 탐정의 사무소 앞에 붙은 '성스러운' 이라는 단어가 신경쓰여 머리 속이 복잡한데, 아무렇게나 나열된 듯한 설명 글 속 단어들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두툼한 책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결국 책의 성격이나 줄거리에 대한 짐작하기를 포기한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낡은 장르, 낡은 인물, 낡은 이야기, 낡은 전개는 가라!

혼란스럽고 정신 없어 보이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사이, 이야기 흐름을 놓칠 새라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른다. 다음 챕터에 어떤 인물이 재등장할지, 그들은 어느 장소에 있을지, 어느 장소에서 무슨 주제에 대해 대화할지, 이 대화는 어떤 결말을 낳을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그저 사라졌다 불쑥불쑥 재등장하는 천재, 사기꾼, 정신병자 중 하나일 것 같은 수다쟁이 인물들의 유머 감각이 넘치지만 이상야릇한 대화를 "흐흐" 웃어가며 쫓아 읽어 나아갈 뿐이다. 이해불가한 지식 토크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괴짜들의 방법으로 재미있게 설명해주니 지루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단역으로 잠시 등장하는 경찰들과 여비서조차 주요 인물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언변력을 지녀 이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서 즐거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정신 없이 펼쳐지지만 결국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

<전자 수도사라는 낯선 단어로 표현되는 인물의 첫 등장→모교 캠브리지 대학에 방문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리차드→형편없는 기억력의 소유자인 리즈 교수와 함께 참석한 시인 클리지 기념 저녁 만찬→그 사이 벌어지는 살인사건→초능력 사기 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리차드의 동창생더크 젠틀리의 늦은 등장→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듯하다가 다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인물들→타임머신의 정체가밝혀질 즈음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40억년 전 (태초의) 지구→짤막하고 극적이지만 어딘지 웃기는 반전>

줄거리를 사건별로 요약해 놓았으나 책을 읽지 않는다면 절대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그저 황당해 보이는 사건들이 뒤죽박죽 전개되다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Dirk Gently's Holistic Detective Agency'라는 영문제목에서 '성스러운'으로 번역된 Holistic의 원래의 뜻인'전체론적'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어떤 한 대상에 대해 불가능하거나 특이한 현상이 연속으로 일어난다면 그 현상 사이에는 분명 관계가 있음을 연신 주장하는 더크 젠틀리의 말대로 이 책의 특별한 사건들은 '더글러스 애덤스'의 넘치는 상상력과 재치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읽으며 특별히 염두에 두지않았던 요소들 하나하나까지 아무 의미없이 쓰였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새로운 재미를 찾고 계셨다면 빠져~ 봅시다!

오랜만에 만난 유쾌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 그 매력에 흠뻑 취해 책장을 덮기가 무척 아쉽지만 2탄격인 <길고 어두운 영혼의 티타임>에서 다시 한 번 더크 젠틀리와 그의 친구들의 맹활약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 된다. 2001년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 신작을 더 이상 접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한 더글러스 애덤스의 뛰어난 유머와 우주적 상상력을 꾹꾹 눌러 담은 이 책을 우울함이나 고독감을 호소하거나, 색다른 재미를 찾고 있는 이에게 꼭 권하고 싶다. 정신없이 이곳 저곳 끌고 다녀 우울할 짬, 고독할 짬 한 번 허락하지 않는 개성 넘치는 더크 젠틀리의 이야기라면 그들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을 매우 흥미로운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