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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도 없는 흔적들이 돌아오는 순간을 담아내다

이수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가 출간되었다. 2009년 《현대시》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와 현실이 전도되는 순간, 즉 현실이 활력을 잃고 멈췄을 때 그 틈으로 시가 등장하는 순간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이 바닥의 생리는 잘 모르지만/이 무리들과 어울리는 데는/몸을 바닥에 착 붙여 바닥을 보여주지 않는 데 있다”(「강물」)고 하거나, 활기 넘치는 모란시장에서 팔려가는 개를 보며 “저렇게 막연히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이라면/그 길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팔려가는 개」)고 묻는 시인의 질문 속에서 현실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의 시는 이렇게 “무기력을 전하는 게 아니라 기력의 붕괴를 가리키”는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산다는 것의 곤혹스러움과 엄정함 한복판으로 몰아넣”(2009년 《현대시》 신인상 심사평 중에서)는다. 그 순간 냉소나 환멸 대신 찾아오는 침묵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이수진 시인의 시작(詩作)의 핵심이다.
이번 첫 시집에도 그런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된 풍경들이 담겼다. 그리고 시인은 모든 풍경의 끝에서 독자들에게 “우리는 그때/죽음을 열망하며/마지막 꽃잎 잃을 이마에//딱밤 새길 생각으로/웃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고 고백한다. 시인이 이 세계의 극점에 다다랐던 것은 세계의 멸망을 지켜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거짓 웃음들이 무너져내린 뒤에야 ‘우리’에게 다가올 진짜 ‘딱밤’의 순간을 맞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활기 넘치는 현실의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시인의 언어가 현실을 얼려 버렸을 때 그 쪼개진 틈으로 전해지는 흔적들. 이번 첫 시집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는 그런 ‘기억에도 없는 흔적들’이 돌아오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서정성’과 ‘근접미래’ 사이의 긴장감을 읽어내는 시선들

이수진의 시는 익히 보아 온 한국적 감성을 노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익히 보아 온 한국적 감성’이란 대부분의 시가 ‘이별에 따른 정한’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아마도 좀 달라진 게 있다면 떠나는 님의 형상이 다변화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 ‘님’은 여름(「여름 강」), ‘당신’과 ‘나’의 시간(「개정」), 바깥 풍경(「조용한 생활」) 등 다양한 대상으로 표현된다. 어쩌면 이별 그 자체가 주제인 듯이 보일 정도라서, 이 시집을 이별의 존재 양상에 대한 탐구라고 정의할 수도 있으리라.

이수진의 시들은 분명한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마음의 길을 따라 어떤 목적 쪽으로 시의 광경을 이끌고 간다. 실로, “이 거울은 잃어버린 숨으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 아닌가”(「여름 사유」)라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상실의 심각성을 표출한다. 이 심각성은 이중으로 걸린다. 하나는 이 이별의 양상들 뒤편에 화자 혹은 시인의 이별의 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이별에서 준수되어야 할 윤리적 가치에 대한 책임감을 화자가 가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이별은 개인적 상처와 집단적 윤리라는 두 개의 상이한 지점에 연결된다.

가령 “언젠가 건네받은 당신의 말은/벼락처럼 살아있으나/나는 그 안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정애」) 같은 시구는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을 준 ‘당신’과의 불가능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으며, 반면 “잎도 썩고 그늘도 썩고 바람도 썩은 부패의 날들에게 옆구리를 내어주며, 근심과 고통의 마디를 이어, 세계를 둥글게 완성해 나가려는 듯, 봄이 귀를 묻고 눈을 감고 왔다,(「패밀리」)같은 시구는 부패로 인한 봄의 상실을 노래함으로써 오늘의 정치적 상황을 암시한다.
시인에게 이 두 가지 문제의 상관성은 거의 당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릴 적 ‘꽃잎 따기’ 놀이를 하는 도중, 떨어뜨린 사탕에 몰려든 개미들을 “먼 친척 형”이 발로 “짓이겼”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쓴다.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지구 끝의 비명이 가볍게 덮였다

우리는 그때
죽음을 열망하며
마지막 꽃잎 잃을 이마에

딱밤 새길 생각으로
웃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부분(본문 56~57쪽)

아이들은 그때 막연히 사과처럼 웃고 있었지만, 마지막 “딱밤”을 맞을 이마에는 그 웃음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다. 그 긴장은 은근히 자책과 자기 처벌의 기미를 띤다. 무심결에 행했던 일이 자행한 개미 살육의 결과에 대해서 말이다. 이때를 회상하는 화자는 ‘딱밤 맞을 이마’를 “마지막 꽃잎 잃을 이마”로 표현함으로써, ‘꽃잎 따기’ 놀이에 상실의 의미를 부여한다. 놀이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육으로 변질되었으니, 꽃잎이 가진 상징적 가치를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두 연결선 사이의 농밀한 긴장일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인적 상처의 절실성은 집단적 윤리에 의해 보증받을 수 있어야 하며, 집단적 윤리는 개인적 체험의 절실성에 근거할 때만 보편타당성을 얻는다는 것이리라. 이수진 시의 특이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별의 순간을 담는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사연은 감추는 대신, 이 이별의 양상을 보편적 진실의 문제에 접목시킴으로써 이별의 아픔을 승화시키고자 한다.

언제부터 나는
어느 시간에 묶여 제자리 걷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먼 이국에서
불빛 향하던 새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글을 읽었다

그 빛은 새에게 무엇이었을까
그 새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숨결로 날아갔던 걸까

의사는 우주의 문고리가 일그러진 게
두통의 원인이라며

망막 속으로 빛을 밀어넣는다
-「새들의 분화」 부분(본문 133~134쪽)

시적 화자는 어떤 상실과 ‘못잊음’으로 인해 정지된 삶의 자리에서 동동거리고 있다. 그러다 문득 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은 새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화자에게 새의 죽음은 자신의 처지와 상동성이 있는 행위로서 감지된다. 새의 행위는 일종의 생명적 사건이어서, 이때 화자는 자신의 사연이 그런 보편적 의미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건 마치 “망막 속으로 빛을 밀어넣는” 것처럼, 아픈 각성을 낳는다. 빛은 그전의 눈을 버리게 하고 새 눈을 주려고 한다. 물론 화자의 안구가 어떻게 운동하느냐에 따라, 그는 새 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운동은 치밀한 고안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의 사연을 최대한 감춤으로써 경험의 절박성을 희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없는 경험조차 억지로 만들었던 몇몇 서정시의 화자들이 독자들에게 ‘감정의 주체’가 되기를 강요했던 방식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를 윽박지르는 대신에, 화자의 고안을 행위로 실연하는 과정을 독자에게 제출한다.

시인은 이 과정에서 “자기를 지워 자기를 사는” 방식이 자신의 시적 ‘태도’이며, “자기를 걸어 자기에게 이르는” 것이 자신의 시적 ‘의미’임을 「죽음을 사는 일」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태도’와 ‘의미’ 사이의 치열한 움직임으로서의 시작(詩作)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태도 이전과 이후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이 필요하다. 이수진은 이러한 과정을 「죽음을 사는 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장미의 꽃잎을 혀라 부르기로 한다

꽃을 들고 너를 찾으러 간 길 끝에서
바람이 불자
장미꽃 한 잎의 혀 쑥 빠진다

다시 바람이 불자
장미꽃 수만 잎의 혀 쑥쑥 빠진다
-「죽음을 사는 일」 부분(본문 24~26쪽)


화자는 ‘너’를 찾아간다.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꽃을 들고” 간다. 이 행위를 독자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너’는 모를 수도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장미를 입의 ‘대행기관’으로 삼기로 한다. 장미 꽃잎은 ‘혀’로 가정된다. 그러고 보니, 꽃잎과 혀 사이에는 그 모양으로 객관적 상관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나’(화자)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가 정말 받아줄까? 오히려 그의 외면(外面)을 더욱 자극하지는 않을까? ‘나’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요동하고, 그때마다 혀는 움츠러든다. 혀를 대행한 장미꽃이 혀를 대신해 쑥쑥 빠진다. 화자의 마음속에서 장미 꽃잎은 몽땅 빠졌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장미꽃들이 다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완벽한 좌절이다. 그는 ‘너’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할 말을 모두 잃었다. 그러고 나서 나온 “장미는 어떻게 자기를 지워 자기를 사는가”(「죽음을 사는 일」)라는 발언은 앞서 언급한 ‘태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태도가 어떻게 바로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이전의 상황이 실은 화자에게 수도 없이 되풀이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방금 인용한 구절들은 그 수많은 좌절을 요약적으로 복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미꽃 한 잎”이 곧바로 “장미꽃 수만 잎”으로 치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만’은 여기서 수량을 뜻할 뿐 아니라 동시에 시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복기된 문장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뜻으로 귀착한다.

또한 그렇기에 저 복기문은 동시에 반전의 단서를 품고 있다. 혀가 움츠러드는 걸, “빠진다”고 표현했다는 것. 그것이다. 혀는 입안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남는다. 다른 시편에서 시인이 “꼭 온다는 말은 꼭이라는 말을 남긴다/정말 온다는 말은 정말이라는 말을 남긴다”(「어나더 타임」)고 썼듯이, 이별의 결말은 기필코 만남의 정념을 남기고, “당신이 오는 일이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끔 한다. 마찬가지로 혀는 사방에 흩날리는 꽃잎의 모양을 빌어 사방으로 쏟아지는 어떤 말들이 된다. 그 말들은 하지 못한 말,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말이고 소용돌이치는 말이다. 만해의 시 「님의 침묵」의 마지막 행에서 제시된,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상태 그대로, 새 삶의 가능성이 된다. 혀의 주체는 “마치 추운 돌 위에/빛의 기지개처럼//차가운 소멸로 단단해지는/영혼의 하얀 피”(「개정」)처럼 단단해지며 빛의 기지개를 켠다. 그래서 이어지는 시구에서 “혀, 안에 있는 것 같아도 언제나 바깥을 넘어서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시인은 그러한 시적 해방의 과정을 통해 독립한 ‘나’로 온전히 서려고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시 의심한다. ‘나’가 독립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해방일까? 왜냐하면 내가 탈출한다 해도 ‘너’는 여전히 예전의 굴레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의심을 화자는 “허공이 도려지면/장미, 천공/장미는 어떻게 그리 많은 이야기가 되어 아무 말 없는 말이 되는가”라는 구절로 드러낸다.

‘너’에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너’에게 다가가기 위한 애타는 여정이다. 그것이 그냥 의미 없는 것일 수는 없다.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 과정은 어떻게든 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의 단서가 된다. 그때 ‘나’가 탈출했다면, 그건 고스란히 의무를 방기한 표지로서 남을 것이다. 장미는 “푸른 천공”일 수는 없는 것이다. 천공(天空)은 천공(穿孔)이다. ‘천공’은 해방의 막연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포기가 될 수도 있다. 때문에 화자는 미래로 튀어나가는 동작을 거두어 현실의 경계 언저리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튀어나가려는 자세 자체를 현실을 꿰뚫는 운동으로 전환시킨다. 마지막 행들은 그 복잡한 전진-역진의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해야 할 말보다 언제나 한 발 뒤에 서 있다, 혀

경계선 바깥에서

장미는 어떻게 그리 많은 죽음을,
불꽃으로 솟아나게 하는가
-「죽음을 사는 일」 부분(본문 24~26쪽)

여기에 와서 무한히 그러나 막연히 열린 하늘(“천공”)은 ‘위 천공’이 되었다가 다시 ‘벽 천공’의 운동으로 변신한다.
바로 이 자리가 개인의 체험이 보편적 윤리로 화하는 지점이다. 나의 해방은 나-너의 변화로 나아가지 않는 한, 가짜 해방이 된다. 이별의 원인이 무엇이든, 나의 행동은 모든 주체에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흥미로운 시제를 접한다. 이수진 시의 시제는 근접미래라는 것. 그것은 현재와 단절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들을 원료로 포함하고, 그것들을 불태움으로써 미래를 조성하는 동사이다. “더 이상 향기가 되지 못하는 꿈을/줍고 다시 주워 그 미소 아래 일일이 널어주는 소국”(「바닥에 걸린 액자」)의 동작이다.
따라서 근접미래로서의 시제는 행동 자체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정념과 의지와 예감을 행동 속에 싣는다. 다음 시구처럼.

고양이 털 사이 무언가 반짝 어리었는데 별이 울었다

나는 창이 흘리는 눈물이 아무렴 별이 훔치는 울음이지 싶었다
-「그 여름을 훔치다」 부분(본문 87~88쪽)

이별의 정한은 만남을 예측하는 떨림으로 결정적으로 바뀐다. 똑같은 마음의 요동이지만, 절망으로 가라앉은 처음의 파동은, 삶이라는 과정의 복기를 거쳐, “아침과 정오 그리고 저녁이라는/하루를 가진 사람이 되어//달빛의 젖은 발 씻어주고 싶”(「수성못 달빛」)어 애닳는 마음의 진동으로 변화한다. 이 긴 과정에서 느낌의 포인트는 변신의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다다르기까지의 긴 과정의 굴곡이다. 그 굴곡을 필자는 이 글 안에 최대한 압축적으로 담으려 했으나, 실로 작품의 넝쿨은 그보다 훨씬 얼키설키 옥실거리고 그 움직임은 구렁이의 몸통처럼 꿈틀거린다. 독자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그 힘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5

1부 - 유대

여름 강·15
개정·16
어나더 타임·19
여름 사유·21
죽음을 사는 일·24
바닥에 걸린 액자·27
조용한 생활·28
시간 밖에서·30
첫눈이 내리면 꽃집·31
레몬의 강·34
월식·36
이면들·37
집으로 가는 길·39
흐르는 의자·42
설해·44

2부 - 유형

연신내·47
유리나무·49
부수현상·52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56
애틋하게 눈부시게·58
순수의 시대·61
더 자랄 수 있는 시간에 대한 환상·62
근사한 일·64
수성못 달빛·67
이별을 사는 길·70
사랑과 역설 － 닭백숙 집 주차장·72
패밀리·74
기호화독본·75
정애·76
꽃구경·79
지금이라는 옆모습·80
클리셰·83

3부 - 유형지

그 여름을 훔치다·87
보편-사·89
안개와 기척 사이로·92
끈·94
처서·96
어느 날 30초·98
낯선 시간 속으로·99
백화 1·102
백화 2·103
백화 3·105
백화 4·108
서해·112
구름사막을 걷는 일·113
음역·118
그 다음이 궁금해·120
구름은 귓불이 두껍고·122

4부 - 연기

이후·127
범사 － 아산·129
새들의 분화·133
내 걸음의 방식·136
제비꽃다발·138
유리창에 유리가 있고·141
새로운 이해·144
걷는 사람
－ 어둠을 깨우는 불빛, 거기가 누군가의 자리라면, 불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집은, 먼저 걸어온 울음이 주인이다·146
그 여름이 보낸 시·148
모르지 마세요·150
여름의 질문·153
덧없어서 아름다워서·154
멈춘 가지 끝에서·156
바람을 기다려·158

해설 | 정과리(문학평론가)
이별의 정한을 사랑의 근미래로 옮기는 일

그 미소, 소국 안에서 하얗다

주름진 미소가, 눈썹 사이 흰 바다가, 흐름과 흐름 속으로, 거기 그렇게 하얗게 웃고 있을 때, 소국이 어둠을 털어내듯, 그 미소를 끌어안고, 노랗고 촘촘하게 스크럼을 짜고 있다

어느 손은, 미소 안에 숨겨놓은 결의처럼, 스크럼을 뚫고, 꽃잎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망가뜨리고, 짓이기면서, 아흔아홉의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더 이상 향기가 되지 못하는 꿈을
줍고 다시 주워 그 미소 아래 일일이 널어주는 소국

그날, 비가 그리 오더니, 바닥에 하얀 액자가 무성히 피어났다
-「바닥에 걸린 액자」 전문(본문 27쪽)


친구는
봄이면 잘 보이지 않았다

맨날 산으로 가서 약쑥을 뜯었다

집엔 아픈 아버지

날마다 핏물을
댓 사발씩 토해내는 아버지

그때는 몰랐다

아홉 번째 자정
아홉 번째 횡단

친구는 친구를 모르고
나는 삶을 몰랐다
-「순수의 시대」 전문(본문 61쪽)


봄이 묘꾼처럼 왔다,
천만년 동안의 상처를 잊고 비밀통로를 타고 왔다, 지상이 피 흐르는 상처를 노래한다, 봄은 나무 속에서 정령 속에서 즈음 속에서 세상의 말들을 연두 팔다리에 매달고 희망의 무덤을 세우고 있다, 잎도 썩고 그늘도 썩고 바람도 썩은 부패의 날들에게 옆구리를 내어주며, 근심과 고통의 마디를 이어, 세계를 둥글게 완성해 나가려는 듯, 봄이 귀를 묻고 눈을 감고 왔다,
어떤 봄은 나의 예지몽으로 오는 들꽃의 장례이며, 마지막으로 웃을 때 튀어나올 침방울이다,
-「패밀리」 전문(본문 74쪽)


까치가 운다
느티나무 잔가지에 앉아

나무는 울음에 맞춰 몸 흔든다

울음이 가지를 누르면 하늘이 올라간다

울음을 먹고 자라는 이파리

까치의 울음은
나무가 살아가는 힘이다
-「클리셰」 전문(본문 83쪽)


내가 밟고 있는 여름의 그늘에는
하늘이 머물고 바람이 머물고 슬픔이 머물러 있다

저 많은 머무름이 고요에 들 수 있는 거는 여름의 나무가 꽃잎을 잃고 속도를 잃고 흔들림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년이 가도 그늘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누구도 저마다 없음의 무게를 짊어지고 사랑의 한낮을 건너고 있기에 그렇다는데

지금 그늘의 힘으로 걸음을 옮기는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저 여름의 오른손을 잡고 가벼이 오르내릴 수 있게 되는 걸까
-「여름의 질문」 전문(본문 153쪽)

피아노 치며, 비포장길 달려요, 산을 부르고, 예당호에 잠겨요, 뱃놀이하는 당신을 보내주고, 미끄러지는 맨발에 붙잡혀요, 흰 살결 부서지는 물결 되어보고, 물방울 터지는 소리 되어보다, 웃음 여미는 정적에 들어요, 한낮의 어둠 주머니에 넣어, 낯선 별 그리고, 당신의 눈빛도 놓아주어요, 호수에 햇살이 무너지면, 이제 그만 집에 가자 툴툴 일어서고, 아프면 푹 자고, 자고 나면 모르게 다 낫기로 해요, 아무도 모르게 구름의 닻 올려, 피아노를 닫고, 민머리 희망에는 얼씬도 말고, 돌아올 곳은 두지 않기로 해요, 그리고

기다려요,
기다려요,
-「바람을 기다려」 전문(본문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