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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케이드는 프랑스 barrique에서 온 말로, 길을 막기 위해 세운 장애물들을 의미한다. 1832년 6월 봉기를 묘사한 레 미제라블의 아베쎄의 벗들을 비롯해, 다양한 창작물에서 사용하는 바리케이드는 혁명과 저항을 상징한다. 평화 운동, 생태 운동, 페미니즘 등의 운동, 즉 라클라우 등이 주장하는 ‘연대’, 혹은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역시 이 투명한 바리케이드에 속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는 대규모 집회나 시위에서 경찰이 사용하는 차벽이 대표적인 바리케이드이며, 2008년의 컨테이너 방벽은 명박산성, 2020년의 경찰버스 차벽은 재인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투명한 바리케이드’가 거대 담론이 붕괴한 이후의 다양한 저항 운동 사이의 연대를 가리키는지는 미지수다. 시에서의 ‘투명한 바리케이드’는 거대 자본과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모르는 적을 상대로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전선에 나선 익명의 다중을 가리킨다는 게 적절하겠다.
정지윤의 「투명한 바리케이드」에서 ‘조여오는’ 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제 활동을 제로섬 게임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교육, 정치적 불평등, 공정으로 포장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경제 불평등을 심화하는 부의 집중, 대다수 사람을 배제하는 동시에 극소수에게도 해를 끼치는 계층 체제, 포퓰리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적대감에서 비열한 경쟁심과 오만한 업신여김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은 다양하고도 거대하다. 그리고 적이 거대하고 다양해진 것만큼이나 앞에서의 저 ‘익명의 다중’에 속하는 사람들도 광범위하게 늘어났다. 예로써 역사상 최초로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왔고,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는 “방종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지만 늘 치열한 경쟁 가운데 긴장하고 지친 상태”로 삶을 영위한다. “털실로 코를 꿰듯/한 땀씩”(「스펙」) 스펙(spec)을 쌓아간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엘리트 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학교에서의 경쟁이 직장에서의 경쟁으로 바뀌었을 뿐, “과도하고 치열하게 헛된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계층을 오해, 갈등, 불화는 물론 야전(공공연한 전쟁, open warfare)에 휘말리게 한다.”라는 대니얼 마코비츠의 지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 방향성을 상실한 ‘바리케이드’는 “서로를 가두는 투명한 그물망들”(「물거미」)로 부조리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력
ㅡ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정지윤 시인의 시조집 『투명한 바리케이드』가 시인수첩 시인선 76번째로 출간되었다. 정지윤 시인은 시조와 시, 동시를 쓰고 있는 멀티미디어 시인이다. 정지윤 시인은 2014년에 《창비어린이》에 동시 「소금」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오랜 사색과 사물을 바라보는 세심함이 만들어 낸 밀대가 밀리지 않을 많을 만큼/소금이 왔어요//오늘은 간이 잘 맞는 날이에요”와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했다는 심사평을 받은바 있다. 또한 정지윤 시인은, 2015년에는 《경상일보》에 시 「걸어가는 나무」로 신춘문예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시인의 시 「걸어가는 나무」는 “산만하지 않고 간결하며, 내면적 깊이가 있었다. 특히 대상과 내면의 등가적 유추가 섬세하며, 이미지가 청신하여 신뢰감이 갔”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2016년에 정지윤 시인은 《동아일보》 에 시조 「날, 세우다」로 신춘문예 두 번째 당선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이 작품은 삶의 현장을 노래하되, 고된 삶의 값싼 비애나 연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는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는 희망”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시인은 그 후 3 권의 작품집을 발행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작품집은 네 번째 작품집이다. 시조집으로 두 번째에 해당되는 『투명한 바리케이드』에서 시인은 “실감이 사라져가는 현대의 공허한 삶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딜레마를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시인은 2023년 《시인수첩》 겨울 호에 실릴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찾는 것은 제도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나의 하루는 일상과 크게 멀지 않은 ‘평범함’ 속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내가 응시하는 현장은 체제가 정당성을 내세워 부당하게 일상을 침범하거나 왜곡하는 곳이다. 나에게 ‘바라다봄’ 즉 ‘응시’는 곧 견디는 순간이다. 나의 ‘견딤’ 속에는 응시와 그것이 내부에 응축시킨 힘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힘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폭넓은 공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인은 “언어의 덩어리(시)들 속에서 삶의 무게와 동일한 질문과 감동을 만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질문이 곧 답이자 존재의 발현인 시”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일상의 삶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와 극적 상황의 총체가 아직 ‘불가사의’한 상태로 뒤엉켜” 있음을 발견하고 그 뒤엉켜진 불가사의한 삶에서 시의 결을 길어올리는 듯하다. 시가 곧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면서 저주받은 양식”이라고 인식하는 이번 작품집을 통해 독자들은 정지윤 시인의 바리케이드의 삶이 드리운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시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응시하는 ‘견딤’과 ‘응시’의 내부에 응축된 시의 힘이 이번 시집을 견인해 가고 있다. 독자들에게 이번 시집은 ‘폭넓은 공감’의 시간을 다감하게 전이시켜 줄 것이다.


사유와 인식의 리얼리티

정지윤의 시는 사회의식을 반영한 기존의 서정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기존의 서정이 소외계층에 대한 연민으로 몸을 떨거나, 나는 곧 타자이고 타자는 곧 나라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타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면, 정지윤의 시는 아(我)와 타(他)의 구분 자체를 소거함으로써 시대적 진단에 따른 시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때 드러나는 서정은 상황에 대한 격한 분노 대신 감정을 차분히 억누르는 어조에서 빚어진다. 일상적 삶의 경험을 포괄한 사회적 관심에서부터 시대의 급속한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냉철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는 시. 그의 시는 객관적 현실의 주관적 재현을 통해 서정성과 시대 의식의 균형을 도모한다……. 중략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또한 그 사회를 추동하는 자본과 시스템은 완전히 단절하거나 탈출할 수 없는 세계이자 리얼리티로서 우리 앞에 실존한다. 정지윤 시의 미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투명한 바리케이드』를 계기로,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치열하게 인식하고 사유한 시조집을 가지게 되었다.

- 신상조 문학 평론가의 시집 해설 중에서

가버린 것들이
가까이 다가와

등을 떠미는 오후

살아남은 가지들
하늘 뒤에 남는다

멀고 먼 밖으로
숨소리 차오른다


2023년 가을

정지윤

시인의 말·5

1부 | 나 홀로 피어납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랜섬웨어·15
인셉션·16
다시는 못 볼 것처럼·18
아무도 웃지 않았다·20
뿔을 세우다·22
나무들은 높이를 수정한다·24
재개발 지구·25
피다·26
생존 게임·28
샐러리맨·30
투명한 바리케이드·31
스펙·32
이주민들·34
패스워드·35
집·36

2부 | 어느 날 서로 몸 바꿔 찾아온
꿈 하나

꽃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39
초록의 내부·40
실패의 날들· 42
기타와 함께·44
누구세요·46
멀수록 가까운·48
거울이 나를 본다·49
이별이 넓어진다·50
꽃은 멀다·52
당신의 그림자·54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56
다 사라진 것은 아닌·57
상자의 여자들·58
낯선 초대· 60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앞에서·61

3부 | 그물로 가득 찬 세계 출렁이는 너와 나

낯선 곳에서·65
겨울 이데올로기·66
지금·68
사막이 봄을 낳는다·70
밥의 법·71
당근마켓 1·72
기억은 시간이 아니다·73
물거미·74
광복절 귀환·75
궁남지 가시연·76
탑·78
그때는 맞고 지금은·80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82
숲의 명상·84
내시경·85

4부 | 꽃피는 나의 봄날은 태어나지 않는다

채움의 방식·89
일요일에 이별에게·90
겨울, 저수지·92
그리움의 안전지대·94
착각의 방·95
선택의 딜레마·96
검은 바다·97
描한 울음·98
폐광 혹은 지하도·99
격리된 낙원·100
바이러스 킹덤·102
동지·103
해남, 다시 잎을 내놓는 나무들·104
끝없는 시간 속에서·106
고비, 고비·108

해설 | 신상조(문학평론가)
사유와 인식의 리얼리티·109

바람도 하나 없이 깃발이 흔들릴 때
기차가 휘어지고 내 몸도 휘어진다
나무들 빠르게 출렁이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보이는 게 전부인 얼굴들 손을 꽉, 잡는다
꿈일까 현실일까 주사위를 던져볼 때
늘 같은 숫자가 나온다면
모두 뛰어내리자

교복 입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켠 채로
미궁의 바닷속을 헤엄쳐 다닌다
어두운 소용돌이 속으로
아이가 또 뛰어내린다

그제야 다 보여서 알 수 없는 물속 세계
내 귀와 눈과 입을 망치로 두드린다
팽이는 쓰러지지 않고
돌고 있다 끝없이


「인셉션」 전문


하필, 모란이
또 붉게 피었습니다

빗소리 어두운데
미친 듯 흔들리는 잎들

대책은
아직 없습니다

오래 서서 맞는 비

창백한 병실 벽엔
어떤 색을 칠해야만

덩굴 속 숨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올까

스스로
그린 벽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들

아무 표정 없이
축축한 저 건너편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은 오지 않고

나 홀로
피어납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다시는 못 볼 것처럼 」 전문



대학 찰옥수수
빈틈이 전혀 없다

비슷한 얼굴들이
단단히 줄지어 있다

뜨거운
밥솥에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 몇,
분명히 있었을 텐데

옥수수를 삶으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파트
불빛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