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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전체 삶을 조망할 수 있는 시집이다.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 첫 시집에 부여하는 의미는 남다르다. 우리의 삶이 다층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만큼 황상희 시인이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의미 부여는 남다르다. 우선 그의 시가 대상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노래하는 궤적을 벗어나 불안과 억압, 거듭 태어남이란 다소 낯선 주제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의 문맥과 결을 들춰서 내포하는 의미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그가 구체화 시킨 노래의 볼륨마다 불안과 억압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나는/그물 속에 퍼덕이는 물고기/방 안에 갇힌 시계”-「습도계」- “불화하는 말들이 자라고 자라서/한 편의 시가 된다는 자각들”-「입술」-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고 불안해서 시를 썼고 지금도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쓴다.’라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있다.

황상희 시인의 많은 시편들에서 보았던 타나토스적 속성 “나는/그물 속에 퍼덕이는 물고기/방 안에 갇힌 시계”-?습도계?- “불화하는 말들이 자라고 자라서/한 편의 시가 된다는 자각들”-?입술?-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고 불안해서 시를 썼고 지금도 불안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시를 쓴다”라고 했던 것들이 자아 방어, 억압을 벗어나 이제는 “다 턴 들깻단 태우던 저녁/모락모락 타는 연기”로 승화시키고 있음을 본다. 김승옥이 그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무진에 자욱하게 내린 안개를 통해 삶의 불확실성, 혼돈, 유배 의식 등을 상징화 하면서 해와 바람을 그리워했다면 황상희는 들깻단을 태우며 연기를 통해 내면화된 불안과 억압을 해방하려고 조심스럽게 한 권의 시집을 펼쳐 놓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튼 이 한권의 시집으로 그의 전체 삶을 조망하고 일람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시 편편마다 배어 있는 삶의 지난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앞으로의 시쓰기는 또 다른 살이의 이행으로 독자와 만나길 기대한다. 앞으로의 삶은 부디 평안하시기를…….

1부 아버지의 섬

첫사랑 - 17
습도계 - 18
입술 - 19
산후풍 - 20
지하철 - 21
나무속으로 - 22
아버지의 섬 - 23
골목길 - 24
국철을 기다리며 - 26
귀의 말 - 27
아이들의 집 - 28
그 말 - 29
나비 - 30
감꽃 - 32

2부 봄, 나무로부터

시간은 뱀처럼 길다 - 35
어떤 실험 - 36
방아깨비에게 - 37
나무 - 38
뱀 - 40
시간이 흐르는 나무 - 41
봄, 나무로부터 - 42
개암나무 - 43
그림자나무 - 44
혼자 사는 나무 - 45
안개 - 46
꽃마리 꽃 - 47
대장동 들길에서 - 48
우물 - 49

3부 제비쑥

북촌 한옥마을 - 53
꽃잎을 보고 - 54
이끼 - 55
제비쑥 - 56
어머니 - 58
지하철을 타면서 - 59
겨우살이 - 60
공포의 순간 - 61
길 위의 집 - 62
동행 - 63
파란 시간 - 64
봄 소풍을 다녀와서 - 65
돌 고르기를 하다가 - 66
시집을 읽다가 - 67

4부 나무였으면 좋겠다

아버지와 아들 - 71
굳은살 - 72
산길을 걷다가 - 73
겨울 눈 - 74
봄밤 - 75
처음이었다 - 76
해바라기 씨 - 78
마당 깊은 집 - 79
차별 없는 곳에서 살았으면 - 80
강아지풀 - 82
진눈깨비 - 83
바구미 - 84
나무였으면 좋겠다 - 85
수박 - 86

해설 / 주병율(시인) - 87

첫사랑




실험실은 온통 먼지로 배가 부르다

천정과 벽이 자욱하다

한쪽 구석에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는 생각들
단단히 닫힌 약속들

아홉 개의 실험대가
표류하다 다시 목적지를 찾아가는 배처럼 항해하고

공중엔 가벼운 에테르 냄새

눅눅한 공기와
축축한 습기가 밴 의자들이 하루하루를 저어가는

벽과 벽 사이 구석구석 피어나는 슬픈 곰팡이

온몸이 가려운 것을 어쩌랴
생활이 오래 젖어 드는 것을 어쩌랴


습도계




나는
그물 속에 퍼덕이는 물고기
방안에 갇힌 시계
점
점
포박 아닌 포박과
눌림 아닌 눌림에
번쩍, 눈을 뜨고 다시 뜨고
물 입김 가득한 유리관 속에
지쳐, 앉아 있으면
온통
너에 대한 박제된 생각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