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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박완서 장편소설[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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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연작 자전소설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다”

2021년은 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꼬박 10년이 되는 해다. 그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박완서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연작 자전소설 두 권이 16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생전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는 모두 출간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 소설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이자 중·고등학생 필독서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독자들의 끊임없는 애정으로 ‘16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이 두 권은 결코 마모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완성한 고(故) 박완서 작가를 형상화한 듯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모티프로 재탄생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연작 자전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로,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 보낸 꿈같은 어린 시절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스무 살까지를 그리고 있다. 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와 이에 버금가는 기질의 소유자인 작가 자신, 이와 대조적으로 여리고 섬세한 기질의 오빠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족 관계를 중심으로 1930년대 개풍 지방의 풍속과 훼손되지 않은 산천의 모습, 생활상, 인심 등이 유려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더불어 작가가 1940년대 일제 치하에서 보낸 학창 시절과 6·25전쟁과 함께 스무 살을 맞이한 1950년 격동의 한국 현대사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고향 산천에 지천으로 자라나던 흔하디흔한 풀 ‘싱아’로 대변되는 작가의 순수한 유년 시절이 이야기가 전개되어갈수록 더욱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아름다운 성장소설로, 박완서 문학의 최고작이라 일컬어진다.

출판사 서평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1992년 처음 출간된 이래 30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박완서의 대표작

2021년은 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꼬박 1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박완서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연작 자전소설 두 권이 16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는 모두 출간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 소설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이자 중·고등학생의 필독서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독자들의 끊임없는 애정으로 ‘160만 부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이 두 권은 결코 마모되지 않고 자유롭게 의지를 펼치던 고(故) 박완서 작가를 형상화한 듯 생명력 넘치는 자연을 모티프로 재탄생했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 판에 실려 있던 문학평론가 고(故) 김윤식 선생, 이남호 선생의 작품 해설과 더불어 박완서의 뒤를 이어 현재 한국 문학을 이끌고 있는 정이현 작가, 김금희 작가의 서평과 정세랑 작가, 강화길 작가의 추천의 글이 수록되었다. 박완서가 우리 곁을 떠나간 지 10년이 흐른 지금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후배 작가들과 함께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어보길 바란다. 또한 소설의 시대 배경인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작가 박완서 사진이 엽서로 제작되어 독자들을 위한 깜짝 선물로 책에 포함되었다.


기억의 더미를 파헤쳐 한 폭의 수채화로 완성한
날카롭게 빛나는 성장소설의 진수

『그 많던 싱아…』는 연작 자전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로, 1930년대 개풍 박적골에서 보낸 꿈같은 어린 시절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스무 살까지를 그리고 있다. 박완서의 실제 고향이자 『그 많던 싱아…』의 도입부에 아름답고 정감 있게 그려지는 시골 마을인 개풍 박적골은 한국전쟁 이후 북한 땅으로 흡수된 지역으로 황해도 개성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뼈대 있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오빠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떠나며 홀로 남겨지지만, 손녀딸을 하염없이 안쓰러워하는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서 따뜻하게 자라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는 1930년대 개풍 지방의 풍속과 훼손되지 않은 산천의 모습, 자연에서 모든 유희를 구하는 그 시절 어린아이들의 천진한 놀이 모습 등이 박완서 특유의 기지가 엿보이는 유려한 필치로 그려진다. 풍부한 감성으로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문체의 매력을 소설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사소해 보이는 장면에서도 절묘한 비애와 아름다움을 뽑아내는 박완서만의 감성이 자라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박적골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최초로 맞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 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 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32~33쪽)

고향 박적골 산천에 지천으로 자라나던 흔하디흔한 풀 ‘싱아’가 작중 주인공 ‘나’의 싱그러운 유년기를 대변한다면, 소설의 중반부부터 펼쳐지는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의 빈곤한 생활과 인왕산 자락을 뒤덮은 ‘아카시아’는 그의 성장을 위한 뼈아픈 통과의례를 은유한다. 1940년대 일제 치하의 학교생활과 변소에 가는 일도 주인집 눈치를 봐야 하는 서글픈 서울살이 속에서 점차 세상을 깨달아가는 ‘나’의 모습이 펼쳐진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89쪽)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며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이제 1950년 한국사의 격랑에 휘말려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의 위기 상태로 치닫는다. 전쟁으로 무참하게 깨져버린 가족의 단란함, 그렇게 되기까지 엎치고 덮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매듭짓는 소설의 말미는 한국 현대 문학의 거목, 작가 박완서의 등장을 예고하는 프리퀄과도 같다.


박완서 문학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을 완벽하게 재현한
박완서 소설의 최고작

『그 많던 싱아…』는 이미 발표된 박완서의 여러 소설 속에서 파편적으로 드러나거나 소설적으로 변용되어 나타난 자전적 요소들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특히 제5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엄마의 말뚝 2」를 비롯해서 여러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소설적 탐구의 대상이 되어온 작가의 가족 관계(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와 이에 버금가는 기질의 소유자인 작가 자신, 이와 대조적으로 여리고 섬세한 기질의 오빠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족 관계)가 예리하게 묘사되며 작중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 많던 싱아…』의 작품 해설을 쓴 고(故) 김윤식 선생과 개정판의 서평을 쓴 정이현 작가는 이 점을 언급하며 이 소설이 박완서 문학의 모태 혹은 원형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이 작가의 전 작품을 골똘히 읽어 온 독자라면 『그 많던 싱아…』라는, 전대미문의 ‘기억력에만’ ‘순전히’ 의존한 이 작품은 이 작가가 조심스럽게 써 온 「엄마의 말뚝 4」임을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엄마의 말뚝 1」이 박적골에서 서울로 와 바느질품팔이로 현저동에 머문 기숙(己宿) 여사의 몸부림이라면, 「엄마의 말뚝 2」가 그다음의 이야기고, 「엄마의 말뚝 3」은 기숙 여사의 죽음을 다룬 것 아닙니까. (…) 작가 박씨는 결코 (4)라는 번호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4)의 번호를 헌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김윤식, 「작품 해설」 중에서

김윤식 평론가의 분석처럼 『그 많던 싱아…』는 「엄마의 말뚝」 연작을 장편으로 확장시킨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작가에게 그 시절의 기억을 소설로 온전히 복원하는 것이 필생의 과제였음을 짐작케 한다.
- 정이현,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으며」 중에서

생전에 작가는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말했다. 소설의 후반부로 가면 ‘나’와 가족들은 아버지와도 같던 숙부와 오빠마저 없는 세계로 내던져진다. 강인한 어머니와 영리하고 생활력 강한 올케,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리라 다짐하는 ‘나’가 소설의 말미 한국전쟁 직후의 텅 빈 서울에 남겨진 채로 작품은 일단락되며,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이야기의 바통을 넘긴다.

『그 많던 싱아…』는 순진한 이상주의로 좌익에 가담했다가 결국 의용군으로 끌려가 반죽음이 되어 돌아온 오빠, 동네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온갖 문초를 당한 ‘나’,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는 숙부 등 작가 박완서 개인의 내밀한 가족사를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그 어떤 자료보다 소상히 보여주는 증언문학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성장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새겨보는 눈부신 성장소설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어두웠던 시절을 생생히 고발하는 이 소설은 가히 박완서 문학의 최고작이라 할 만하다.

홀로 목격한 자의 책무는 증언하는 것이다. ‘나’의 기억을 글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의 소제목은 ‘찬란한 예감’이다. 그토록 처절한 현실 속에서 감히 찬란하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예감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삼 인간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누구도 쉽게 정의 내릴 수 없겠지만 두 가지만은 확실하다. 하나,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인간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찬란한 예감이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라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나는 되뇐다. 그리하여 우리가 박완서라는 작가를 가질 수 있었으니.
- 정이현,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으며」 중에서

장편소설 『나목』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오만과 몽상』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서 있는 여자』 『미망』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기나긴 하루』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혼자 부르는 합창』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 있는 날의 소망』 『한 길 사람 속』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어른 노릇 사람 노릇』 『두부』 『한 말씀만 하소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기행문 『모독』

추천사

박완서 선생님이야말로 읽고 쓰는 사람들의 시작이며 나아갈 길이다. “나의 생생한 기억의 공간을 받아 줄 다음 세대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누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다”는 생전의 말씀이 여전히 얼마나 유효한지 전할 수만 있다면 저 너머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다. 오늘도 새로이 읽히고 있습니다, 하고 말이다.

목차

다시 책머리에
작가의 말

야성의 시기
아득한 서울
문밖에서
동무 없는 아이
괴불 마당 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오빠와 엄마
고향의 봄
패대기쳐진 문패
암중모색
그 전날 밤의 평화
찬란한 예감

작품 해설 -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지금 다시 박완서를 읽으며 - 정이현(소설가)

본문중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어린 나에게 가장 큰 낙이었다. (…)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총알처럼 동구 밖으로 내달았다. 단 한 번도 착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열렬하게 매달린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은 다듬이질이 잘 돼 늘 칼날처럼 차게 서슬이 서 있었다. 그리고 송도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곧 오냐, 오냐, 내 새끼, 하면서 나를 번쩍 안아 올렸고, 그의 품은 든든하고 입김은 훈훈했다. 할아버지의 입김에선 언제나 술 냄새가 났다. 나는 할아버지의 훈훈함과 함께 그 술 냄새 또한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내려놓고 나서 두루마기 주머니에서 먹을 것을 주섬주섬 꺼내 손에 쥐여 주는 것을 잊으신 적이 없었다. 노란 편지 봉투에 싼 미라사탕 아니면 잔칫상에서 염치 불구하고 집어넣었음직한 약과나 다식 따위였다. 그런 것들을 맛보느라 할아버지 손목을 놓고 깡충깡충 앞장서 뛸 때는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한테 눈꼴이 시다는 핀잔을 들을 지경이었다.
_ p.19-20 「야성의 시기」

유리창 밖에는 전송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할머니는 제일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 초라함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란 얼마나 신기한가.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말갛게 바라볼 수가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안겨 ‘아이고 내 새끼.’ 하고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따라 울고 싶었다.
나는 온몸으로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얼굴만 얼음장에 눌리듯 사정없이 퍼졌을 뿐 한 치도 할머니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기차는 크고 구슬픈 소리를 내지르고 나서 움직였다. 전송객도 따라 움직이다가 점점 안 보였다. 나는 할머니도 따라 움직였는지 그냥 서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펑펑펑 눈물이 마구 나왔다. 눈물이 안 나오는데도 소리 내어 운 적은 많아도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는데 엉엉 소리를 내지 않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_ p.51 「아득한 서울」

다 잘했지만 내가 제일 싫은 건 주소를 두 개 외는 거였다. 엄마가 처음 가르쳐 준 주소는 마땅히 기류계를 옮긴 사직동 주소였다. 나는 그까짓 거 금방 외웠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엄마는 갑자기 내가 길을 잃었을 때 그 주소를 대면 큰일이다 싶었나 보다. 현저동 집 주소도 외울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번지에다 호수까지 달린 긴 거였지만 나불나불 뭐든지 암기를 잘할 나이였으니 그 또한 어려울 게 없는데도 엄마의 걱정은 좀 지나쳤다. 필시 주소를 속여서 입학원서를 낸 게 양심에 걸리는 순박함 때문이었겠지만, 두 주소를 금방 외자 이번엔 또 시험을 칠 때 헷갈려서 잘못 말할까 봐 근심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순전히 당신이 안심하기 위해 나를 들볶았다.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너 어디 살지? 느이 집 어디야? 넌 지금 길을 잃은 거다.” 그러면 난 현저동 주소를 대야 했다. 반대로 “느이 집 어디냐? 넌 지금 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물어보면 사직동의 가짜 주소를 대야 했다. 엄마는 내 가 행여나 이 두 개의 주소를 헷갈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 엄마는 저 맹추한테 괜히 주소를 두 개씩 가르쳐 주었다고 들입다 후회를 하면서, 시험 날짜까지 현저동 주소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잊어버리란다고 잊어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엄마가 그럴수록 그 주소는 내 머릿속에 눌어붙었다. 사직동 주소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그 후에 거친 수많은 집의 주소를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현저동 46번지의 418호란 내 최초의 주소는 여태껏 안 잊어버리고 있다.
_ p.61-62 「문밖에서」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_ p.89 「동무 없는 아이」

이차대전을 맞은 것도 괴불 마당 집에서였다. 일본 사람들은 대동아전쟁이라고 했다. 무언지도 모르고 신이 났다. 우리는 그 전부터 이미 호전적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일본은 벌써부터 지나사변이라 부르는 전쟁(중일전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중국을 ‘짱꼴라’, 장개석을 ‘쇼오가이세끼’라고 부르면서 덮어놓고 무시할 때였다. 동무들하고 싸울 때도 짱꼴라라고 놀려 주는 게 가장 심한 모욕이 되었다. 아침에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하고 나서 군가 행진곡에 발을 맞춰 교실에 들어갈 때면 괜히 피가 뜨거워지곤 했는데 그건 뭔가를 무찌르고 용약해야 할 것 같은 호전적인 정열이었다.
짱꼴라한테는 줄창 이기고 있다고만 들어서 적으로는 시시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더 큰 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쇼오가이세끼에다 ‘루스벧또’, ‘짜아찌루’가 무찔러야 할 악의 괴수로 추가되고, 매일매일 승전의 소식이 전해졌다. “깨어졌다 싱가폴, 물러서라 영국아.” 하는 노래를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불러 단박 유행을 시켰고, 남양군도를 하나하나 함락시킨 걸 뽐내고 자축하기 위해 밤엔 등불 행렬이 장안을 누볐다.
_ p.141-142 「괴불 마당 집」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엄마가 느닷없이 나에게 모진 말을 했다. “툭하면 울기 잘하는 년이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을 안 흘리냐 안 흘리길? 저깐 년을 그렇게 귀애하시다니, 기르던 강아지도 그만큼 귀애했으면 며칠 끼니라도 굶겠다. 그저 딸년이고 손녀고 계집애 기르는 일은 말짱 헛일이라니까.” 엄마는 말만 그렇게 모질게 했을 뿐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눈길도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것처럼 뜨악하고 냉랭했다. 그때부터 나는 울기 시작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온몸이 탈진할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했다. 할머니와 숙모들은 내가 그동안 참았던 설움을 폭발시킨 줄 알고, 속 모르는 말을 한 엄마를 나무라며 나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내 울음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모욕감 때문이었다.
_ p.149-150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사색이 돼 있었다. 드디어 오빠에게 징용 영장이 나온 것이었다. 와타나베철공소가 군수공장이 됐기 때문에 징용은 안 나가도 된다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는 오빠를 어디로 도망시키고 우리 식구도 다 야반도주를 하자고 했다. 엄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와타나베철공소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배급 통장 없이는 어디 가서 밥 한 끼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이었다. (…) 군수공장이라 매일같이 야근을 하는 오빠는 자정이 가까워서나 들어왔다. 엄마는 불안을 용케 감추고 오빠가 저녁밥을 다 먹고 난 후에 비로소 징용 영장을 내놓았다. 오빠는 염려 말라고만 말하고 무덤덤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어른한테 절대로 걱정을 안 시키는 오빠의 습관적인 말투인지 정말 그렇게 자신이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도망을 가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 밤을 밝혔다.
_ p.175-176 「오빠와 엄마」

마침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일 년을 바라볼 무렵이었다. 좌익을 탄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절을 신생독립국가의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는 삼팔선을 넘어 월북을 하거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오빠처럼 이상주의적인 얼치기 빨갱이에겐 보도연맹이라는 퇴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빠가 회유에 의해서 거기 들게 되었는지 강압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집안 식구하고 의논하고 결정한 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안 건 오빠의 술주정을 통해서였다.
비록 취중일망정 오빠는 전에 없이 유치하고 졸렬하게 굴었다.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마치 엄마 때문에 좌익 운동에서 발을 빼고 엄마 보란 듯이 보도연맹에도 가입한 것처럼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렸다. 엄마는 이렇게 온갖 주접을 다 떨다 잠든 아들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생전 안 하던 술 처먹고 우는 버릇을 왜 했을꼬.”라는 말밖에 안 했다. 아들이 자는 머리맡도 지나가 본 적이 없는 엄마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큰 욕을 한 셈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본인보다도 엄마가 더 전향의 후유증 같은 걸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_ p.249 「그 전날 밤의 평화」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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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박완서(朴婉緖) [저] 신작알림 SMS신청 작가DB보기
생년월일 19311020

저자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도시의 흉년','목마른 계절','욕망의 응달','오만과 몽상','서 있는 여자','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미망(未忘)','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 있으며, 소설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배반의 여름','엄마의 말뚝','꽃을 찾아서','저문 날의 삽화','한 말씀만 하소서','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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