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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불타는 늪 정신병원에 갇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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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사과
  • 출판사 : 알마
  • 발행 : 2020년 11월 05일
  • 쪽수 : 228
  • ISBN : 979115992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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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뉴욕 산책자의 광증과 망상이
근대성을 사유하는 단단한 문장들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기이한 에세이의 탄생

원본이 없는 완벽한 인공의 세계, 뉴욕의 정신을 탐구하다

자본의 최정점에 선 도시 뉴욕에서의 삶을 신랄하게 뜯어보고 성찰한 ‘문제적 작가’ 김사과의 에세이. 뉴욕은 겉으로는 현란한 소비문화의 천국이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원본 없고, 실체 없이’ 비어 있다. 작가는 이를 ‘사방이 하얗고 부드러운, 창문 없는 방’인 정신병원의 독방으로 규정한다. 독방의 바깥은 랭보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묘사한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도시 파리와 같고, 그곳의 소시민들은 현혹된 채 절망과 환멸이 기다리는 도시의 늪으로 빠져든다.
팬데믹이 모든 것을 뒤덮기 바로 얼마 전, 어쩌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에 작가는 뉴욕에 살았다. 이 도시의 소시민 혹은 이방인들처럼 작가는 그곳에 머물며 뉴욕의 음악, 패션, 음식, 쇼핑 등 소비문화를 욕망하고 감탄하고 조소하다 번뜩이는 통찰로 텅 빈 미국의 실체를 발견한다. 그곳의 인간은 총알이 발사된 후 박히기 전까지의 (아직 누구의 잘못도 없는) 윤리적 진공 상태 같은 ‘미국적 평화’ 안에서, 마치 수족관 속 사나운 면상의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피라냐 떼의 일시적 마비 상태 같은 모습으로 산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우아해 보이는 미국의 소시민들은 “머저리 같아 보이는 촌놈에게는 즉시 사나운 시선을 내리꽂는”다. 작가가 단언하건대, ‘이 촌놈’이 자신과 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는 냉정한 사람들로 미국이 가득 찬 것은 트럼프가 도착하기 전의 일이다.
작가는 뉴욕에서 느낀 바를 최대한 날것으로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어떤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글쓰기를 선보인다. 쇼핑을 얘기하다 느닷없이 뉴욕의 뮤지션이 등장하는 반사회적인 엽편소설이 튀어나오고, 과잉된 감정은 오탈자를 용인하며, 비판적 성찰은 예리한 유머와 뒤섞여 나오다가 이 도시를 굴러다니는 환멸과 절망을 비추고 그 이미지들이 점멸하는 시구들로 글을 맺는다. 모순의 도시 뉴욕을 산책하며 겪을 수밖에 없는 광증과 그로 인한 망상이 근대성을 사유하는 단단한 문장들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기이한 에세이가 탄생했다.

출판사 서평

“뉴욕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에서는 완곡한 왜곡이 느껴졌다.
그것은 혹시 정치적 올바름의 맛이 아닐까?”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에 휩싸인 집으로 뉴욕의 이미지를 규정하며 19세기 랭보가 쓴 착란과 절망의 시를 호출하는 첫 번째 글을 넘기자마자,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대낮의 뉴욕 도서관과 패션 잡지를 한 장 한 장 찢어 만든 것 같은 거리 풍경으로 바뀐다. 정키 소굴 로워이스트빌리지부터 “진정한 도시남녀들의 전시장, 유행의 패싸움장”인 첼시, 과거 마약중독자들의 치료소였던 이스트빌리지의 영기靈氣 가득한 집까지 거처를 옮겨 다녔던 경험을 풀어놓으며, 철저히 신분에 따라 살아야 할 동네를 정해놓은 뉴요커들의 동네 구획을 소개한다. 관념적인 그들의 원칙에 따르면 ‘자유로운 아시안 여류 소설가’로 분류되는 자신은 응당 파크슬로프 같은 곳에 살아야 한다는 식이다.
윌리엄스버그에 살면서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미국’을 발견한다. 작가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려, 뉴욕은 전 세계인들의 원본 없는 ‘파생실재’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윌리엄스버그의 한 카페에서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면 진짜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마실 수 없다. 아몬드밀크나 라이스밀크, 소이밀크가 있을 뿐. 그곳은 현란한 인공 정원의 세계다. 직접 가보는 것보다 구글맵에서 실체를 더 잘 볼 수 있는 곳.
보잘것없다고 알려진 뉴욕의 식문화에서도 텅 빈 소비문화의 한 단면을 발견한다. 일례로 작가는 고급 백화점 지하에 푸드코드 대신 향수 가게가 들어찬 광경에 의아해한다. 도시문명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진열되어 있어야 할 백화점의 지하에서 번듯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을 보고는 능청스럽게 가설을 세운다. “뉴욕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에서는 완곡한 왜곡이 느껴졌다는 힌트를 따라서. 그것은 혹시, 정치적 올바름의 맛이 아닐까?” 거기서 작가는 풍요로움을 종합하는 것, 즉 총체적 풍요가 불가능한 것이 그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미국의 청교도적 윤리를 생각한다. ‘완벽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허공’에 떠 있는 뉴욕의 마천루를 떠올리면서. 일찍이 앤디 워홀이 말했었다. 뉴욕에서는 음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파는 경향이 있다고. 워홀을 인용하며 작가는 옐프Yelp 어플리케이션에 올라온 레스토랑 댓글을 읊어준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식사 경험이었습니다.” 식사는 모르겠고, 식사 경험이 위대한 미국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작가가 거닌 곳들은 원본이 없는 땅, 그래서 완벽한 인공의 세계를 축조할 수 있는, 허공에 뜬 성채로서의 미국이다. 그곳에서 “탄생의 순간부터 주도면밀하게 어떤 것들이 도려내진 것 같은” 잘 자란 미국 중산층들의 “매끈한 결여”에서 미국의 미학을 본다. “그 부지런한 결여에서 파생되는 이해도 자각도 설명도 불가능한 슬픔이 미국적 감상주의의 핵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팔에서 주기적으로 전해져오는 고통 같은 것.”(본문에서)

“거울 속 가짜 석양, 단 한 번도 활짝 피어나지 못한
스스로의 정신이 아득해져가는 광경을 지긋이 바라본다.”

앞서 1, 2부에서 현실 세계로서 뉴욕이라는 공간을 발로 움직이며 소비문화를 다룬다면, 3부에서는 좀 더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신을 들여다본다. 단순히 어느 한 진영의 문제가 아닌 미국 정치의 근본 문제와 더불어 소셜미디어를 포함한 거대 미디어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만드는 2020년대식 파시즘적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히피 세대부터 그들의 자식 세대인 밀레니얼들이 어떤 정신 상태에 빠져 있는지를 세대론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살아남았다, 오롯이 혼자서. 그게 밀레니얼들이 가진 유일한 믿음이자 존재의 이유다. 생존은 밀레니얼들의 유일한 업적. 탄생의 순간부터 펼쳐진 무자비한 배틀로얄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 주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고독하게 살아남았다는 이 멜랑콜리한 느낌. 그 기묘한 정서가 그들을 마비로 이끄는 것이다. 그들은 예감한다. 영원히, 끝없는 인간 사냥이 펼쳐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냥터에서 자신은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이 또한 함께한다.”(본문에서)
밀레니얼들에게 내려진 ‘꿈을 실현하고, 정신을 고양시키고, 끝없이 경험하라’는 긍정주의 강령들이 히피 세대의 망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인식은 흥미롭다. 평화와 사랑, 자연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것들은 모두 정신병원에 갇힌 채 약에 취해 만들어낸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비전을 많이도 팔아치웠고, 그들의 자식들은 선대가 약에 취해 상상해낸 라이프스타일 속에 스스로를 구겨 넣는다.
다소 무거운 주제와 개념들은 현란하고 광폭한 이미지들과 리듬에 취한 언어로 해체되어 각 장이 마무리될 무렵 한 편의 시와 같은 구절들 속으로 모여든다. 현대의 도시를 거니는 광인의 주술처럼, 혹은 예언처럼 미국의 탄생부터 두 번의 세계대전을 지나 지금 밀레니얼이 감각하는 대도시 뉴욕의 실체를 그려낸다.

알마 인코그니타(Alma Incognita) 시리즈
문학을 매개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특별한 모험을 떠납니다.

오카다 도시키
《우리에게 허락된 특별한 시간의 끝》 (오카다 도시키 지음, 이상홍 옮김, 2016년 8월)
《비교적 낙관적인 케이스》 (오카다 도시키 지음, 이홍이 옮김, 2017년 7월)

에르베 기베르
《유령 이미지》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2017년 3월)
《빨간 모자를 쓴 남자》 (에르베 기베르 지음, 안보옥 옮김, 2018년 6월)
《내 삶을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에르베 기베르 지음, 장소미 옮김, 2018년 11월)

우밍이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2018년 3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2018년 5월)
《저항의 멜랑콜리》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2019년 5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오블리비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신지영 옮김, 2019년 10월)
《끈이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2019년 11월)

김사과
《바깥은 불타는 늪/정신병원에 갇힘》 (김사과 지음, 2020년 11월)

* 계속 출간됩니다.

목차

첫 번째 편지

I
바깥은 불타는 늪
도서관 실패기
도시는 나의 것
윌리엄스버그에는 우유가 없다
카지노 도시

II
You Only Live New
Pillow Talk
DHL과 나
청교도의 저녁 식사
그랜드센트럴마켓에서 훔치기

III
내전 전야
우산 속 세계
2020년대의 파시즘
밀레니얼들을 위한 레퀴엠
아메리칸드림의 분열증과 망상증
Is There Anything Good about America?

마지막 편지

본문중에서

Dear Doc,
선생님, 어느 좌절한 겨울밤, 호텔 방 서랍에서 불교 경전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에서는 우리의 세계를 불타는 집에 비유하였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하나의 집. 앙상하게 타들어간 채로 신기하게도 버티고 서서 새빨간 불길을 뿜는 집.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길 속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한 집 한 채. 그것은 진부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래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불타는 집이고, 우리 인간들은 정신이 팔려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인 것입니다. 저는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불교에 귀의하려는 것이었을까요?
물론 예상하신 바대로 저는 불교에 귀의하는 대신 랭보의 책을 펴들었습니다. 빌어먹을 악습인 것이죠.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보들보들하던 어린 천재가 19세기 파리라는 지상 최고의 속세, 최신식으로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오래된 집에서 겪은 환멸과 좌절을 적어내려간 그 대담한 산문시는 의기소침해진 도시인에게 차선의 위안이었습니다.
이 예민한 프랑스 꼬마는 악마적인 서구 문명을 늪에 비유하더군요. 한번 발을 집어넣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점점 더 빠져들게만 되는 끔찍한, 뭔지 아시죠?
_〈바깥은 불타는 늪〉, 24~25쪽

나에게는 적당히 창의적인 변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일 스마트한 전략은 변명을 건너뛰고 무지막지하게 저 어퍼… 뭔가를 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치광이 유부녀들, 사이코패스인 그녀들의 남편, 교육이라는 이름의 고급 학대를 당하는 아동들의 실태… 그 모든 문제의 시작은 물론 경쟁심 넘치는 아시안 문화의 침투로서, 동아시아의 전체주의적 문화에 대한 짤막한 개괄, 처참했던 산업화와 무력했던 민중, 악몽의 원자력발전소, 동굴을 빼앗긴 박쥐들, 북극곰, 으으 중국… 하지만 구겐하임은 좋은 미술관이라고 생각해!

빙고.

나는 오늘도 까다로운 뉴요커의 얼굴 잔근육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솔직히, 뭘 하고 있는 걸까?
토플 말하기 시험 만점을 받고 싶은 걸까?
몇 번의 가상 영어 말하기 시험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뒤로 나는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운타운으로 향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_〈도시는 나의 것〉, 43~44쪽

날이 좋아지자 근육질의 다람쥐가 테라스를 찾아와 소중한 나의 베고니아 화분을 죄다 파헤치고 도토리를 파묻어놓았고, 밤에는 옥상의 약쟁이들이 그 화분 위로 오줌을 발사했다. 나는 울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맨해튼을 포함하여, 내 눈앞에서 난잡하게 파헤쳐지고, 능멸당하는 듯했다. 감전사한 쥐들의 저주가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 것일까? 거대한 다람쥐가 내 방에 침입하여 소중한 빈티지 캐시미어 스웨터를 박박 찢어놓는 악몽에 시달렸다. 한편, 어김없이, 주말이 찾아왔고, 형편없는 음악, 형편없는 맥주와 형편없는 절규, 형편없는 춤, 오줌, 형편없는 마약에 전 기타 연주가 이어졌다.
젊은이들의 광란이란 원래 이다지도 서글픈 것인가?
마치 IMF 구제금융 시절의 영국 같군. 그런데 돈 냄새는 왜 이렇게 진동하는지.
이 가엾은 젊은이들은 왜 이스트빌리지 한 구석에서 이렇게 몹쓸 방식으로 젊음을 불태워야 하는가?
다시 월요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싸늘한 침묵 속 쌓이는 택배상자들.
그 짓의 반복. 또 반복. 더 이상 세는 것을 포기한 반복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뉴욕을 손에 넣은 대가로 너무 많은 자원을 탕진했으며, 헤로인 중독과 탈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이다.
_〈도시는 나의 것〉, 55~56쪽

뉴욕에 차고 넘치는 인간들 또한 회복 불가능한 규모의 손실, 즉 무지막지한 ‘투자’의 결과물들이다. 2미터 남짓의 생물체 하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될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 아찔해진다. 눈앞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저 모든 존재들에 매달린 가격표를 상상해봐도 역시. 광기 어린 축적, 어리석은 탕진, 불가능해 보이는 부채의 규모로 인해 블랙홀처럼 졸아붙은 신기한 인간 존재들이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할인마트의 철 지난 추석 선물세트랄까, 싸구려인 나는 번번히 놀라고 좌절하게 된다.
_〈카지노 도시〉, 69쪽

트럼프가 당선된 뒤 화를 내는 인간들을 보면서 황당했다. 리버럴들의 뻔뻔한 위선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하여 현란한 뉴스 창을 닫은 채, 잊힌 옛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신 나간 독일의 철학자이거나(니체, 《도덕의 계보》), 나폴레옹을 그리워하는 프랑스 촌사람이기도 하고(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혹은 담담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을 말하는 영국의 엘리트일 때도 있었다(존 그레이, 《가짜 여명》).
(…) 결과적으로 이방카를 조롱하는 교양 있는 뉴요커의 생존 여부는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려는 권력자들의 허영심에 달려 있다. 최고의 수전노가 사랑하는 애인의 방을 꽃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는 행복해하듯이, 이 냉혹한 권력자들은 약간의 사람들이 와인 잔을 든 채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을 관대하게 허용해주는 변태적 허영심이 있다. 그 허영심의 본질은, 혹은 그 한계는 어디일까? 요즘 세계의 권력자들은 비열한 어릿광대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지 궁금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원래 권력을 가진 인간들이란 사람들이 타락하는 광경을 보고 싶어 하는 변태들인가?
궁금하지 않은가, 타락과 광기의 한계가 어디인지? 그렇다면 뉴욕으로 오라.
자신의 영혼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궁금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이 놀라운 인간 도박장은 환영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 단, 영혼은 남겨둔 채 떠나야 한다.
_〈카지노 도시〉, 71~73쪽

나는 미국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정반대다. 미국인들의 고지식함에 번번히 감동한다. 그들은 택배를 세 번이나 잘못 보낸 아마존에 전화를 걸어 항의할 때도 절대 화내지 않는다. 말도 안 되게 지치게 만드는 미국의 복잡한 병원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도 절대로 화를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저 참고 또 견딜 뿐.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접한 미국인들은 항상 약간은 호소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온갖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하는 눈물겹게 전투적인 자세.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제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도착하지 않는 택배, 사라져버린 음식, 자꾸만 파손되어 나타나는 물건들 앞에서 나에게 허용된 것은 맹목적 믿음 속 진지한 호소뿐. 전화기 속 녹음된 목소리 너머, 채팅 창에 뜨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문장 너머 과연 진짜 인간이 존재하는 걸까?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저 믿음으로 호소해야 한다. 착한 개와 같은 맹목적 긍정주의와 함께 전진해나가는, 언제나 넘실거리는 파산의 가능성에 두근대며, 이 엉망진창의, 끊임없이 사들여도 도무지 쌓이지가 않는 이상한 모래성의 소비 세계를 죽을 때까지 헤쳐나가는 것은 미국인들의, 아니 과연 미국인들만의 운명인 걸까?
_〈DHL과 나〉, 109~110쪽

나는 새로운 가설을 세워보았다. 뉴욕에서 먹었던 모든 음식에서는 완곡한 왜곡이 느껴졌다는 힌트를 따라서. 그것은 혹시, 정치적 올바름의 맛이 아닐까?
아하, 뉴욕의 고급 백화점에서 푸드코트가 불가능한 이유를 알겠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풍요로움을 종합하는 것은, 총체적 풍요란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알겠다.
뉴욕에서 완벽한 풍요는 불가능하다.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빌어먹을 청교도놈들!
그리하여 뉴욕의 마천루들은 그 어디보다 완벽하게 올바른 방식으로 허공에 뜬 채 활활 타오르게 된 것이다.
고약한 동부의 가식자들, 주홍글씨의 후예들!
_〈청교도의 저녁 식사〉, 119쪽

트럼프의 당선에 호들갑 떨던 많은 사람들은 저 세련되어진 오바마의 미국, 그 멋진 무대에서 살아남은 배우들이다. 적당히 쿨한 사람을 연기하는, 타락한 부자와 권력자들을 경멸하는, 누구보다 정의로우며 동시에 우아한 소시민들. 주말이면 광장에 서는 파머스 마켓에서 유기농 채소를 구입하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다듬어진 언어로 인종차별과 테러리즘을 걱정하는, 하지만 식당에서 나와 길에서 마주치는 답 안 나오게 머저리 같아 보이는 촌놈에게는 즉시 사나운 시선을 내리꽂는… 좋았겠지? 저 야만적인 촌놈들이 선거에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과 완전히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없다고 믿거나 혹은 없애버리기를 바라는 냉정한 인간들로 이 도시가 꽉 채워진 것은 단언컨데 트럼프가 도착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_〈내전 전야〉, 142~143쪽

응, 걔는 요가 레깅스를 샀으니까, 곧 새 러닝화가 필요하겠지. 구글 광고판에 새로 나온 나이키 러닝화 광고를 띄우자.
음, 걔는 브라운대를 나왔으니까 채식에 관심이 많을 거고, 그렇다면 금요일 밤에 틀림없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겠지.
아아 우린 너를 알아.
완벽하게 알아.
그러니까 너를 위해 우리가 가장 좋은 결정을 내려줄게.(블루베리라고 말해.)
그 새로 나온 러닝화를 사.(블루베리라고 말하라고.)
그리고 넷플릭스를 켠 다음… (블루…)
그러고 나서… (베리…)

아 쫌 말하라고!

늦게나마 솔직히 털어놓자면, 중학교를 졸업한 지가 언젠데 갑자기 어설픈 중2병 일진들에게 둘러싸인 느낌, 정말이지 그런 몹쓸 기분이다. 하지만 내 기분 따위와 상관없이 저 블루베리 일진들은 여전히 세상 모든 것을 안다며 자신만만하다. 하지만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모르게 된 진짜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 무슨 입장인지 궁금하다. 브

저자소개

김사과 [저] 신작알림 SMS신청
생년월일 1984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했다. 2005년 《영이》로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0 영 ZERO 零》 《N. E. W.》 《풀이 눕는다》 《천국에서》 《미나》, 소설집 《더 나쁜 쪽으로》 《영이》, 산문집 《설탕의 맛》 《0 이하의 날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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