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적립 안내

최길숙의 시집『사랑은 시가 되어』. 저자 특유의 담백한 시어들로 일상의 이미지를 맛깔스럽게 담아냈다. 자신의 삶에서 고개를 들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상상력으로 시심의 시야를 펼치고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광부》, 《봄밤》, 《연인》, 《사춘기》 등 다양한 작품을 수록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시상의 전개,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한 시어들의 배치, 그 뒤로 자연스레 깔리는 이미지의 구현, 특히 지각적 이미지들의 입체화, 구상과 추상의 조화로움, 더불어 새로운 해석학에 기초한 낯설게 하기 등의 기법이 나긋나긋 각자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어, 시가 맛깔스럽고도 깔끔하고 또 선명하고 신선하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시어들을 동원해서 이야기식 뼈대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소박하고 투박한 시적 형상화를 이뤄나가는 솜씨가 멋스럽다. 때로는 호흡이 길게, 때로는 낙엽시 형태로, 때로는 이미지 시로 다채롭게 펼쳐 나가는 최길숙 시인의 표현 기법에 가을 은행잎의 눈부심을 선물하고 싶다.
앞으로도 쭉 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며, 제2, 제3시집에 도전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자유시, 산문시뿐만 아니라, 7.5조 시, 단형시조, 연시조, 동시, 가사 문학까지 장르 범위를 넓혀 반짝이는 창작의 여생을 보내리라 확신한다.
늘 겸손하고, 늘 따스하고, 늘 조용한 최길숙 시인, 말 한마디조차도 부드럽게 말하고 전하는 우아한 여인, 김밥이랑 소머리국밥 요리도 잘하는 손맛 좋은 다소곳한 숙녀, 성실과 끈기로 시 창작을 이어가는 진정한 여류시인, 최길숙 시인의 아름다운 여정이 먼 미래까지 당당히 지속될 거라 믿는다.
[최길숙시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中에서
-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도서 소개 - 평론

최길숙 시인의 시집 ‘사랑은 시가 되어’에 대하여

이 세상에 살면서 기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 자신에게로 다가올까. 그 중 가장 의미 깊은 기쁨은 뭘까.
오늘 필자는 마냥 기쁘고 행복하다. 왜냐하면, 여태껏 내가 알고 있는 시인들 중 가장 마음 착하고 따스하고 고운 시인들 중 한 사람이 첫 시집을 펴내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꽃활짝’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최길숙 시인이다.
최길숙 시인의 장기는 김밥 싸는 것이다. 이 세상 김밥 중에서 가장 맛있고 영양 듬뿍 담긴 김밥! 김밥만큼이나 앙증맞고 정겨운 시인 최길숙!
최길숙 시인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같다. 표정도 옷차림도 신발도 별로 변화가 없다. 신발의 뒤축은 언제나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닳아 기울어져 있다. 그걸 몇 번 지적했지만, 그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삐치거나 화내거나 멀리 도망가지도 않는다.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서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감싸준다.
도대체 이 세상 어머니들의 심성을 한자리에 모아놨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너그럽다. 그렇다고 하늬바람처럼 가볍지도 않다. 시 창작도 끊길 듯 말 듯 줄기차게 이어진다. 안 쓰고 있는 듯하면서, 언제나 쓰고 있다. 쓰고 있는 듯하면서 안 쓰고 있다. 그러면서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뀐다.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한 권의 시집으로 그녀의 시들이 묶어질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멋스럽다. 지상의 여러 동물들 중 왜 인간이 가장 멋질 수 있을까,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최길숙 시인은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자, 그러면 최길숙 시인의 시 세계는 어떠할까. 참 궁금하다.

수심이
꾸불꾸불
걸어온다

양어깨에
봇짐 하나
지고서

속을 헤집어 보지 않아도
눈에 본 듯 뻔한
속앓이

갖가지 사연
차곡차곡
담아 온 맘 보따리들

꼭꼭 숨긴 채로
허술한 일상의 봇짐만
펼쳐 놓는다.
- [광부]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광부로서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있다.
수심이 꾸불꾸불 걸어온 삶, 이제 남은 건 양어깨에 진 봇짐 하나뿐. 속을 헤집어 보지 않아도 눈에 본 듯 뻔한 속앓이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 그동안 죽도록 고생만 하고, 손에 쥐여진 행복이나 보람은 쥐꼬리만도 못한 인생, 이제 남은 건 병든 몸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사연 차곡차곡 담아온 맘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도 없다.
들어 주는 사람도 없고, 위로해 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속앓이 보따리는 꼭꼭 숨긴 채로 허술한 일상의 봇짐만 펼쳐 놓고 있다.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는 인생, 살아온 삶의 과정 자체가 시련과 역경인 인생, 처절히 뼛속 깊이 파고드는 허무와 수심, 그리고 회한만이 너울거리는 인생, 이제 흐를 눈물조차 말라 버린 인생, 그 인생을 손에 들고 서 있는 시적 화자가 애처롭다.
이처럼 최길숙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고개를 들어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 상상력으로 시심의 시야를 펼치고 있다. 이게 바로 시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세상은 혼자가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타인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인 것이다.

산길 돌고 들길 지나
언제부턴가 자리잡은 마을회관 들어서면
무궁화꽃이 목젖까지 내주며 환하게 웃는다

나가 놀아라
나가 놀아라

쫓겨난 미운 새끼들 모여들어
무궁화꽃이 피었다고 외쳐댄다
한 녀석이 키보다 클까 말까 한
아담스런 나무 뒤에 살금살금
숨었더니 꽃들이 난리가 났다

나는 안다
나는 안다

고자질하고 싶어 까르르 까르륵
숨이 넘어갈 듯 큰 잎보다 더 크게
알 리 없는 술래는 이리저리
먼지만 날리고 있다

미운 새끼들 하나둘 떠나고
이번엔
갈래머리 까까머리 술래잡기
우렁찬 함성 소리 해맑은 나라
해질녘이 되어서야 겨우 하루를 접는다.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산길 돌아 들길 지나면 나타나는 마을회관, 거기 자라고 있는 무궁화가 꽃피는 시절에 동네 아이들과 놀았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가 놀고 싶은 심정이 술래잡기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자유롭게 자라고 싶은 시적 화자의 내면이 무궁화꽃 밑으로 모인다. 쫓겨난 미운 새끼들이 모여 무궁화꽃이 피었다를 외쳐댄다. 술래 몰래 한 녀석이 아담스런 나무 뒤에 숨었다. 그러자 무궁화꽃들이 소란을 떤다. 나는 안다고. 어디에 숨었는지 안다고. 고자질하고 싶어 까르륵 까르륵 숨이 넘어갈 듯 소리친다. 그런데도 술래는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먼지만 날리고 있다.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흩어진 뒤에도 갈래머리와 까까머리의 우렁찬 함성은 하늘을 치솟는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마을의 골목은 조용해진다.
어릴 적 한 정경을 그림 그리듯 이미지로 그려내는 솜씨가 멋지다. 서술 위에 이미지 구현을 이뤄나가는 시적 형상화가 세련되어 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산길, 들길, 마을회관, 무궁화꽃, 목젖, 환하게 웃는다, 아담스런 나무 뒤에, 살금살금, 큰 잎보다, 먼지만 날리고 있다, 갈래머리, 까까머리, 해질녘)와 청각 이미지(외쳐댄다, 고자질, 까르르 까르륵, 숨이 넘어갈 듯, 더 크게, 우렁찬 함성 소리)의 조화로움이 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시상의 흐름을 자연스레 끌어가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여름 방학 맞은 아홉 살
여자아이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곳간에서 제일 작은 호미 하나를
꺼내 들고
할매 따라 종종걸음으로 길을 나선다

벌써 오늘이 엿샛째
마지막 품앗이날
애써 만들어 놓은
일상의 굴레 안으로 걸어간다

깊은 산중 방학은 심심하다
자연이 놀이터이고
곤충들이 동무일 뿐

돌아오는 길
조막손에 쥐여 주는
동전 두 닢
땡그랑 땡그랑

오르막길
내리막길
험한 길에서는
땡그랑
땡그랑 땡땡

내 마음을 아는지
나비들도 앞서 날아가며
땡그랑 땡땡
땡그랑 땡땡.
- [산골 아이.1]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품앗이하던 때를 떠올리고 있다.
여름 방학 때 아홉 살배기 소녀는 곳간에서 작은 호미 하나를 꺼내 들고 할머니 따라 품앗이하러 간다. 산중 방학은 너무 심심하다. 자연이 놀이터이고, 곤충이 동무일 뿐, 무료한 일상의 굴레만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소녀는 품앗이 가는 할머니를 따라 일터로 갔다가 오후 늦게 돌아오곤 했다. 엿샛째 품앗이, 마지막 날 소녀는 품앗이 끝나고 할머니랑 돌아오면서 동전 두 닢을 선물 받는다. 조막손에 들어온 동전이 즐거운 듯 땡그랑 땡땡 소리를 낸다. 이 소리에 나비들이 앞서간다. 땡그랑 땡땡, 즐거운 마음이 뒤따라간다.
이처럼 청각적 이미지가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절제미와 이미지로 시상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기법도 시의 특질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시의 묘미, 시의 맛이 이야기 속에 곁들여 있어, 감칠맛이 난다. 이게 최길숙 시인의 시가 그만큼 독자의 감성 깊숙이 파고드는 요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신
있기에

온갖
떨림 안고

내가
있다.
-[연인] 전문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앞에서 언급한 시들과는 달리 아주 짤막한 낙엽시 속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당신은 존재 이유가 되고 있다. 당신이 있기에 인생이 있고, 당신이 있기에 살아가는 가치가 있고, 당신이 있기에 그나마 고달픈 삶을 견뎌내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은 곧 시적 화자인 것이다.
당신의 부재는 곧 시적 화자의 부재가 되어 버린다. 그 어떤 이유도 그 어떤 여생도 당신 없이는 의미가 없다. 시적 화자에게는 오로지 당신이 필요하다. 마치 공기처럼 시적 화자의 삶과 의지와 꿈에는 당신이 있어야 한다. 당신만 곁에 있으면, 시적 화자는 온갖 떨림 안고 살아갈 수가 있다. 잔잔한 설렘, 은은한 기쁨, 잔물지는 감동이 모두 당신으로부터 나온다. 당신이 있기에 시적 화자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시의 특질을 충족시켜 놓는다. 낙엽시 속에 커다란 줄기, 융융한 의미가 흐르고 있다. 이게 시의 멋스러움이 아니겠는가. 최길숙 시인은 이미 시의 특질을 터득한 것일까. 이처럼 짤막한 시 속에 독자에게 안겨줄 감동의 세계를 어찌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신비스럽기만 하다.

가는 길 잊었나요
밤새워 졸았나요
왜 아직 못 갔나요
무엇이 그리 아파
구름에 기대어 앉아
여지껏 상념에 잠겼나요.
- [낮달.1]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낮달을 바라보고 넋두리를 남긴다.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하소연하듯 퉁명스럽게, 아니 애절하게 묻고 있다.
가는 길 잊었냐고 묻는 내면에는 제발 가는 길을 잊어 버려, 곁에 오래도록 남아 있어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왜 아직 못 갔냐고 물으면서, 부디 애틋해서 사랑해서 못 잊어서 못 갔다고 말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나 있다. 무엇이 그리 아파 그랬냐는 대목에선, 사랑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제발 많이 아파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사랑했는데, 지독히 사랑했는데, 영원히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이의 가슴이 아파서, 많이 아파서, 지독히 아파서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라도 상대방이 아픔을 느껴야 시적 화자는 다소나마 위로를 받을 모양이다. 구름에 기대어 앉은 낮달처럼 여태껏 상념에 잠겨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어 주기를 바라는 시적 화자의 애달픔이 절절절 묻어나 있다.
이처럼 시는 가장 절제된 시어로 가장 많은 감성과 의미와 얘기를 담아야 한다. 그래야 시의 특질은 더욱 빛이 날 것이다. 시가 산문과 달리, 인류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런 시의 표현 기법을 터득한 시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건들건들
늘
이상해

마주치기 싫은지
요리조리
피하는 눈

늘
수상해
너의 세계

풀어라
대화 보따리
들어줄게

애인도 아니면서
콩닥콩닥
가슴 뛰게 하는 아들아.
- [사춘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사춘기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로서 걱정이 앞선다. 아들은 사춘기라서 그런지 건들건들 늘 이상하다. 행동도 상식선에 벗어나 있고, 생각도 그렇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기 싫은지 요리조리 피하는 아들, 뭔가 수상해 보인다. 하는 짓도 그렇고, 하는 말투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않고 꿀먹은 벙어리다. 참다못해 엄마가 하소연해 본다. 제발 내게 다 풀어라, 대화 보따리 다 풀어놓아라, 다 들어줄 테니까. 하지만, 차마 이 말을 입 밖에 뱉어내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인다. 언젠가는 말하겠지. 언젠가는 속내를 털어놓을 날이 오겠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분명 애인도 아닌데, 어찌 저토록 아들은 엄마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설레게 하고 걱정을 끼치는가. 도무지 모르겠다.
마치 이야기식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독자의 감성에 깊이 파고드는 시적 형상화가 돋보인다. 시적 형상화의 다채로운 기법을 만나는 기쁨이 여기에 펼쳐져 있어 좋다.

부스스 일어나
커피 한잔으로
지친 마음 달랜다

잠자던 옛것들
하나씩 꺼내
펼쳐 놓으며

명주실처럼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지만

차라리 안고 갈까
그 남자
그리고 그 여자

커피향에 젖어
배시시
자리에 도로 눕는다.
- [일상]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느 날 자다가 부스스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는 커피 한 잔 타서 마신다. 지친 마음을 달래고 싶어 차분한 마음으로 차향에 젖는다. 그러다가 잠자던 옛것들을 하나씩 꺼내 펼쳐 놓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무엇이 꼬였나, 어떤 어리석음이 개입되었나. 수치스러운 면은 없었나. 피해갈 수는 없었나. 그냥 묵인하면 안 되었나. 일단 꺼내 놓은 추억들은 명주실처럼 계속 풀어져 나온다.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다. 이렇게 계속 풀어져 나온다면, 해결할 길이 없는 건 아닐까. 따질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면, 차라리 안고 가는 건 어떨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남자, 그 여자, 지금 이렇게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고 부스스 일어나게 한 그 남자, 그 여자, 어찌할 것인가. 뾰족한 혜안이 없다면, 차라리 안고 가든가, 아니면 덮고 가든가 해야 한다. 상념에 잠길수록 몸과 맘이 더욱 무겁기만 하다. 가라앉히듯 몸을 다시 눕힌다. 커피향에 젖어 배시시 눕히는 몸뚱이가 오늘따라 무겁기만 하다. 인생의 쌉싸름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고 돈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감성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고, 그 전율이 등줄기를 훑고 가게 만드는 힘, 이게 최길숙 시인의 시 속에는 담겨 있으니 웬일인가.

만나는 순간
환희로 몸부림치며 부르는
달의 노래.
- [봄밤]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도 짤막한 낙엽시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겉으로는 봄밤이 그려져 있다. 봄밤은 만나는 순간 환희로 몸부림치며 부르는 달의 노래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찰되었고, 그렇게 묘사되었다.
추상(환희)과 구상(몸부림, 달의 노래)의 조화로움이 이미지 구현의 길로 시를 안내하고 있다. 시각 이미지(만나는 순간)와 근육감각 이미지(몸부림치며)와 청각 이미지(부르는 달의 노래)의 입체화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이 더욱 선명히 그려지도록 해놓고 있다. 그려놓은 세계는 봄밤인데, 독자의 감성에 전달되는 건 시적 화자의 내면이다.
시적 화자는 봄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환희로 몸부림치며 행복해 하는 달의 노래가 된다. 이게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속성과 만나는 이미지, 이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하는 사랑의 환희, 그 멋스러움, 지극히 아름답다.
왜 시는 인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여태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 이게 바로 이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겨지는 감성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닐까. 그 아름다움이 안겨 주는 은근한 향기가 인류에게는 필요한 건 아닐까. 그 어떤 것으로도 보완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허기,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미적 가치, 그 아름다움, 그 은은한 향기, 이 소중함 때문에 인류는 시를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건 아닐까.

바짓단 둘둘 말아 올리고
재잘대며
골뱅이 줍던 곳

돌멩이 반으로 갈라
소반 만들어
소꿉놀이 했던 곳

학교에서 옥수수빵
급식 받아 나눠 먹으며
배고픔 잊고 놀았던 곳.
- [동강]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비록 시 속에서나마 현대 문명의 싸늘한 세계에서 벗어나 시골로 내려간다. 거기서 바짓단 둘둘 말아 올리고 쉴 새 없이 재잘대며 골뱅이 줍던 때를 떠올린다.
정겹다. 게다가 돌멩이 반으로 갈라 소반 만들어 소꿉놀이 했던 정경을 배치해, 독자들의 감성을 추억 속으로 빠뜨린다. 어찌 순수의 세계로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옥수수빵이 급식으로 나오던 시절, 그 빵을 나눠 먹으며 배고픔을 잊고 놀았던 모습이 휘그르르 옛 시절의 풍경에 잠겨 눈물겹게 한다. 왜 그리도 배고픈 시절이었을까. 왜 우리 조상들은 그런 배고픔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했을까. 무엇 때문일까.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나? 방향 설정이 잘못된 나라 때문이었을까?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 나라의 가난이 뒷배경으로 깔리면서,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은 독자의 가슴에 아련한 향수를 안겨 준다.
가난했어도, 배고팠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의 행복이 오늘날 시적 화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아닐까. 아무리 좋은 현대 문명이라 할지라도, 삭막함만 있다면 따스한 정이 없다면, 그건 행복한 인생이 아닐 테니까. 정겨운 대화가 있고, 따스한 행복이 있는 세상, 그런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시적 화자의 심경,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심경은 아닐까.

새하얀 눈이
내립니다
그대는 가고 없는데

사득 사득
조용한 몸짓으로
내려앉습니다

그대는
이미
가고 없는데

자욱 자욱
그리움이랑
함께 쌓입니다.
- [애상]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겨울 한가운데 서 있다. 사랑하는 그대는 가고 없는데, 마음도 가슴도 추억도 사득 사득 조용한 몸짓으로 내려앉고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모습, 되돌릴 수 없는 추억, 이제는 정리해야 할 과거가 되어 버렸다. 그대는 가고 없는데, 저리 눈이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대는 가고 없는데, 모든 게 다 정리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사랑도 꿈도 희망도 다 사그라져 버린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자욱 자욱 그리움이랑 함께 눈이 쌓이고 있질 않은가. 아직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 모든 게 다 퇴색되고 색바래 버렸는데, 그리움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저리 펑펑 쏟아지는 눈발과 함께 다시 내리는가.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사랑은 정리될 수 없는 대상일까. 잊었다 하지만, 죽순처럼 다시 솟구쳐 나의 하늘을 지배해 버리는 것일까. 사랑이 남긴 그리움은 어찌 이리도 지독한 후유증을 남긴단 말인가. 이렇게 시적 화자가 시를 쓰는 것도 그 그리움 때문이었단 말인가. 시를 쓰게 하는 동기도, 시인이 되게 한 것도, 어쩌면 이 사랑 줄기에서 뻗어 올라온 그리움 때문이라는 말인가. 누가 속시원히 대답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땅의 진정한 가치,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랑의 최고 가치를 대신할 수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최길숙 시인의 시 세계를 탐색해 보았다. 그 어디서나 시의 특질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산책하고 있는 시적 화자를 만나 볼 수 있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시상의 전개,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한 시어들의 배치, 그 뒤로 자연스레 깔리는 이미지의 구현, 특히 지각적 이미지들의 입체화, 구상과 추상의 조화로움, 더불어 새로운 해석학에 기초한 낯설게 하기 등의 기법이 나긋나긋 각자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어, 시가 맛깔스럽고도 깔끔하고 또 선명하고 신선하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시어들을 동원해서 이야기식 뼈대를 세워놓고, 그 위에 소박하고 투박한 시적 형상화를 이뤄나가는 솜씨가 멋스럽다. 때로는 호흡이 길게, 때로는 낙엽시 형태로, 때로는 이미지 시로 다채롭게 펼쳐 나가는 최길숙 시인의 표현 기법에 가을 은행잎의 눈부심을 선물하고 싶다.
앞으로도 쭉 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며, 제2, 제3시집에 도전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자유시, 산문시뿐만 아니라, 7.5조 시, 단형시조, 연시조, 동시, 가사 문학까지 장르 범위를 넓혀 반짝이는 창작의 여생을 보내리라 확신한다.
늘 겸손하고, 늘 따스하고, 늘 조용한 최길숙 시인, 말 한마디조차도 부드럽게 말하고 전하는 우아한 여인, 김밥이랑 소머리국밥 요리도 잘하는 손맛 좋은 다소곳한 숙녀, 성실과 끈기로 시 창작을 이어가는 진정한 여류시인, 최길숙 시인의 아름다운 여정이 먼 미래까지 당당히 지속될 거라 믿는다.
- 봄비가 촉촉이 내려 뿌려 놓은 꽃씨들을 깨워
일으켜 세우는 오월 아침에
한실 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동화작가, 화가, 사진작가)

최길숙 시인의 제1시집 출간을 축하하며_박덕은
작가의 말
祝詩_박덕은

1장 - 내게 다시 그대가 오면
2장 - 운수 좋은 날
3장 - 사랑 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