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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모비딕 : 예술, 존재,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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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김동규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3년 02월 28일
  • 쪽수 : 22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462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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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위대한 순간] 오늘을 일군 문학, 역사, 철학의 의미 있는 정점들

‘위대한 순간’은 문학동네와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함께 펴내는 인문교양 총서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사건의 특수성이 역사와 맞물려 보편성을 획득하는 의미 있는 정점을 ‘위대한 순간’이라 명하고, 문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그런 순간을 현재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이를 통해 과거의 빛나던 순간들의 의미를 독자들과 함께 음미하고, 다가올 시간을 위대한 순간으로 빚을 수 있는 인문정신의 토양을 일구고자 한다.

현대철학의 위대한 순간, 하이데거

그는 실존에 기반한 지상의 철학을 꿈꾸며
낡고 오래된 철학의 신전에서 걸어나왔다.
그리고 ‘존재’라는 이름의 신성한 향유고래를 찾아
예술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서양 현대철학에서 위대한 순간은 하이데거이다.
나는 위대한 순간을 한 명의 철학자 이름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라는 이름은 단지 특정 개인에게 귀속된 호칭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한 인간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철학사에 남겨진 일종의 기호이다.
한 철학자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서양 철학사를 뒤흔든 사유의 대격변,
엄청난 규모의 철학적 사건을 환유로 치환한 기호이다.”

유령에 사로잡힌 자, ‘철학의 햄릿’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서양철학 전체를 담아낼 만큼 웅대한 사유를 펼친 철학자다. 그의 삶과 철학은 서양 문명의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각인된 사건이 되었고,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출간된 1927년은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을 가르는 기점이 되었다.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리쾨르, 푸코, 데리다, 레비나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 책을 출발점 삼아 현대적 사유를 펼쳐나갔다. 또한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아렌트의 정치철학, 실존철학과 현상학, 가다머의 해석학, 철학적 인간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의 거의 모든 지적 흐름의 원천에는 하이데거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 전체를 회고하며 비판을 수행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세계대전, 모든 것이 돈으로 교환 가능한 자본주의 체제, 과학기술문명의 폐해를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닌 서양철학의 뿌리에서 성장한 열매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지금과 다른 존재이해, 망각된 과거의 존재이해를 다시 불러오지 못한다면 현 시대의 난관은 돌파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존재이해를 비판의 준거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햄릿처럼 과거의 유령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근원인 아버지의 아버지, 근원 아버지의 유령에 귀를 기울인 철학자다.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 예술

신화와 이성은 원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플라톤 이후 둘은 대립관계에 놓였고, 서양철학은 로고스의 역사로 이행했다.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써내려간 이 역사는 어쩌면 말소의 역사요 왜곡의 역사다. 그러나 예술의 토양이 신화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나 그 흔적이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유를 전회하며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심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찾아야 했다. 신화의 흔적, 예술은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왜곡된 존재이해를 극복하는 수련장이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신성한 학문이었으며,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는 지상의 신전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한 자유의 현기증

하이데거에게 실체화된 ‘나’는 없다. 하이데거의 ‘나’는 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스스로 변형되면서 자신을 창작할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자유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흰 캔버스나 글이 쓰이지 않은 백지, 커서만 깜박이는 빈 문서파일처럼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텅 빈 자유다.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한 현기증 나는 자유다. 또한 그 자유는 죽음을 각오하고 기존의 강고한 ‘나’를 깨트려야만, 자기 인생 전부를 걸고 모험해야만 가까스로 열리는 자유다. 그리고 이런 현존재의 자유에서 비로소 존재의 풍요롭고 진실한 모습이 드러난다.
하이데거식 미래는 끝이 존재하는 유한한 미래, 불가능성 앞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님’으로 침윤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 결국 그것은 텅 빈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 미래를 선취한다는 것은 예측불허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 불가피한 존재론적 불안을 경험하는 것, 그 불안의 동요 속에서 자신을 창조적으로 형성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국 존재를 포용하는 시간적인 존재로서 텅 빈 자신이 되는 것을 뜻한다.

삶의 철학, 지상의 철학, 유한성의 철학

하이데거는 근대적 존재이해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역사화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이해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파생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삶의 세계, 생활세계, 지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이데거는 절대적 진리로 공언되는 과학적 인식을 다시 지상의 삶으로 호출해 그 허구성과 편파성을 폭로하면서 유한성의 철학을 천명했고, ‘세계-내-존재’의 의미 속에 삶으로의 귀향을 새겨넣었다.
하이데거는 평생 ‘존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했다. 특히 예술 속에서 ‘존재’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았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는 괴물이라고 했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이름의 얼굴 없는 거대한 괴물에 맞서 초인적인 힘으로 사투를 벌인 에이해브 선장을 닮았다. 그것은 서양 문명, 그리고 이미 그 문명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우리 자신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싸움의 승패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투의 과정을 통해 성장판을 얼마만큼 열어내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울 때에는 괴물과 닮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목차

프롤로그: 현대철학의 위대한 순간

1장. [존재와 시간]의 예술철학적 단초
산길
오푸스 마그눔
철학하는 햄릿
화두
쿠라 신화
공포와 불안
유한성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의 의미
도구
일상의 우리, 다스만
죽음 앞에서의 결단
진정성의 교두보, 양심
시간적 존재
도식적 요약

2장. 시와 죽음
시와 언어 그리고 죽음
불가능의 가능성
세계형성과 시 창작
시와 죽음
죽음을 모험하는 시인
3장. 예술가와 양심
낯선 목소리
헤르메스 시인
사이존재인 시인
결핍과 밝힘
자기 목소리의 낯섦
‘아님’으로 창조되는 자기 목소리
예술과 도덕의 동근원성

4장. 죽음의 눈
해석의 묘지
시인과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꿈
죽음과 존재
존재의 눈
죽음의 눈
5장. 하이데거의 미학적 기여
전회와 예술
미학 비판
전통 예술론
진리의 장소, 예술
예술작품의 불가해성
예술과 과학
현대미학의 이론적 단초
예술과 철학의 사이

에필로그: 철학의 모비딕

본문중에서

1장. [존재와 시간]의 예술철학적 실마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이 글이 제시하는 길은 예술철학의 길이다. 후기 철학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예술철학의 지평 속에서 하이데거 철학, 특히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을 재해석하는 것이 이 글의 지향점이다.
(/ p.24)

하이데거 전문가들은 통상 하이데거 철학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존재와시간]을 기점으로 하는 전기 철학과 이후에 전개되는 후기 철학으로 말이다. 사유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전자는 인간이라는 존재자에서 존재로, 후자는 존재에서 존재자로 향한다고 말할 수 있고, 그런 방향에 걸맞게 전자는 인간의 존재방식, 즉 던져짐과 던짐(피투와 기투), 이해, 시간성, 자유와 죽음, 불안 등에 초점이 맞춰지고, 후자는 언어, 시, 예술, 존재역사 등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방향 전환을 두고 사람들은 ‘전회Kehre’라 부른다.
(/ p.25)

[존재와 시간]을 저술했던 38세의 젊은 하이데거를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떠오른다. 실존적인 문제로 고뇌하는 햄릿. 결국 가혹한 운명을 예감하고 행동하기를 주저하면서도, 어느 순간 과감히 결단하는 그 비극적 영웅. ……두 사람이 부딪힌 동일한 문제는 ‘존재’이다.
(/ p.32)

하이데거는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바라보고자 한다. 이런 그의 시도는 철학적 혁명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전통 철학자들은 존재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곳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를 기점으로 현대철학자들은 더이상 존재를 언급하지도 않든가, 아니면 항상 시간과 더불어 존재를 사유한다.
(/ p.36)

뮈토스[신화]와 로고스[이성]는 언어의 두 가지 모습이고, 로고스처럼 뮈토스도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다. 그런데 플라톤 이후 서구 철학의 역사는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다시 써내려간 로고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말소와 왜곡의 역사이다. 철학자 셸링의 말처럼, 신화는 예술의 토양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에 대한 또다른 이름일 것이다.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지금까지의 역사를 가능케 했으면서 또한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자 근원이다. 하이데거가 ‘전회’를 말하면서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요컨대 신화와 예술은 희미하게 남은 ‘존재의 흔적’을 담고 있다.
(/ pp.39-40)

불안을 응시하는 자는 자기로 복귀한 자이다. 그는 번잡하고 두려운 외부 사물들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기 속으로 침잠한다. 불안 속에서 참된 자기를 만난다. 이처럼 불안 속에서 한 개인의 고유성과 개별성이 도드라진다. ……극도의 차이, 그 차이의 극대화는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자유로울 때에만, 개별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불안은 철저히 개인의 불안이고 자유롭기에 찾아오는 ‘자유의 불안’이다. 불안은 나약한 병자들의 증후가 아니라, 도리어 자유인의 증표다. (49)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 분석을 이 용어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존재를 밝히는 현존재이자, 세계-내-존재이다. 하이데거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단 이 말은 유한성의 철학, 지상의 철학을 표방한 말로 이해된다. 인간은 세계 속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지상을 뜻한다. ……하이데거의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고 지상의 세계이며, 차안의 생활세계이다.
(/ pp.51-52)

시간은 텅 빈 자기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를 지나가버렸거나 장차 도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빛났던 자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기를 끊임없이 만나려 하는 욕망, 그것이 시간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소유물이다.
(/ pp.82-83)

2장 시와 죽음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 자체가 본질적 의미에서 시”이며, 시는 “언어의 근원”이다. 일상적인 언어, 즉 존재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평준화된 언어와는 달리, 시는 “순수하게 말해진 것”이자 존재를 밝히는 근원적인 말이다. 후기 하이데거가 존재의 언어를 경청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언어로서 시인의 언어를 꼽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죽음과 언어의 관계는 큰 무리 없이 죽음과 시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다.
(/ p.92)

인간은 불가능의 영점인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래적인 (자기)존재에 도달할 수 있고, 죽음을 모험해야만 무의 베일에 가린 존재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언어는 인간이 죽음과 만나는 공간, 곧 죽음의 사원이다. 그리고 죽음을 향한 더 큰 모험을 통해 그 신성한 죽음의 사원에 도달한 자가 바로 시인이다. ……그가 죽음의 사원에서 듣는 시는 ‘침묵의 시’이고, 이전 세계를 무화시키는 ‘아님의 부름’이며, 그래서 새롭게 다시 창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가능한 노래’다. 결국 창조적인 시인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험스러운 죽음의 사원에서, 즉 언어 속에서 죽음을 선구하는 본래적인 현존재에 다름 아니다.
(/ p.119)

3장. 예술가와 양심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사유가’와 ‘시인’에 대한 언급은 그의 후기 저작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많은 면에서 시인과 사유가는 초기 [존재와 시간]에서 언급되는 본래적 현존재의 보다 구체적인 인간상이며, 동시에 탈근대적·탈형이상학적 인간의 미래상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여기서 시인은 예술가의 본명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본질은 시”이기 때문이다.
(/ p.126)

하이데거의 양심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양심과 크게 다르다. 그가 보기에 양심의 일차적인 의미는 신학적·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독특한 본래성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양심은 “각자”의 양심이고, 유일무이하고 본래적인 자기의 목소리다. 진정한 자기가 내는 목소리, 그것이 바로 양심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인간은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고, 일상의 거대한 힘에 함몰되어 살 수도 있다.
(/ p.126)

시인이 전령의 신 헤르메스로서 인간과 신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 플라톤과 횔덜린 그리고 하이데거는 일치한다.
(/ p.129)

4장. 죽음의 눈

시인 김수영이 하이데거 철학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국내의 몇몇 학자들이 벌써 그 시인과 철학자의 연관성을 살펴본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작품은 김수영의 시 [눈]이다. 나는 이 작품을 파격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기존의 대다수 작품해석 방향에 따르면, 작품의 제목이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으로 읽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보는 눈目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눈을 보는 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시의 3연에 등장하는 ‘죽음’ 때문이다. 종전의 해석은 이 중요한 시어를 놓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란 시어를 진지하게 해석하고 김수영에게 미친 하이데거의 영향을 고려한다면, 눈은 하이데거적 의미의 존재의 눈 또는 죽음의 눈으로 해석된다.
(/ pp.155-156)

서양 지성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규정짓는 하이데거는 그 망각이 이루어진 시점을 시와의 관계 단절이 일어난 시점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서양철학사에서 시와의 결별 사건이 존재망각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62)

살아 있는 존재의 눈은 죽음을 망각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존재의 눈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죽음의 망각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우리를 줄곧 바라보고 있던 존재의 눈을 응시한다는 것이요, 우리가 그 눈에 눈맞춤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응시한다는 말이다. 결국 살아 있는 존재의 눈은 인간에게는 죽음의 눈을 뜻한다. 불가능성의 눈이다. 그 죽음의 눈과 눈맞춤으로써 죽을 자인 인간은 그동안 집착해온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순간적으로 눈을 깜박이듯 말이다. 다시 뜬눈으로 인간은 시시각각 고유하게 일어나는 존재를 여실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존재의 눈에 대고 뱉는 시인의 ‘기침’, 즉 시는 바로 이런 진실의 언어이다.
(179-180)

5장. 하이데거의 미학적 기여

후기 하이데거는 ‘철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에서 예술을 만났다. 그는 예술을 깊이 사랑하고 존중했다. 예술 속에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론적으로 예술을 다루는 학문, 곧 미학을 경멸했다. 그럼에도 이후 많은 미학자들은 그의 예술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 철학은 여러 분야로 확산되었지만, 특히 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그 기여가 두드러졌다. 지독한 독설이 도리어 약이 된 경우다.
(/ p.183)

하이데거가 보기에, 미학은 전통 형이상학이 예술을 포착하는 특수한 이해 방식이다. 하이데거의 눈에 비친 미학은 예술을 감성의 지평에서 다루고 감성의 논리를 찾는 학문으로서,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마련된 학문이다. ……예술은 전통 형이상학의 지적 호기심과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근사한 사례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미학을 비판하는 주요 이유이다. 한마디로 말해, 하이데거는 예술을 위해 미학을 비판한다.
(/ pp.189-190)

한마디로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진리의 작품으로의 정립”이다. 이것은 기존 미학 체계나 개념틀을 해체하고 예술작품 자체에 주목하며 하이데거가 내린 결론이다.
(/ p.194)

고흐의 신발 그림 속에서 하이데거는 시골 아낙네를 떠올린다. 들녘에서 일하는 그녀의 삶과 그녀를 둘러싼 자연을, 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신발이란 도구를 생각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도구를 유용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한다. 고흐 그림을 통해 도구는 이제 “신뢰성”의 관점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과 만날 때 도구를 사용한다. 이때 도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는 곳이고 자연 속에서 거주할 수 있게 하는 친숙한 공간을 뜻한다.
(/ p.195)

이렇듯 작품 속에서 도구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도구 존재의 진리(비은폐성)가 작품 안으로 자신을 정립한 것이다. 작품에서 진리가 일어난 것이고,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일어나는 진리에 들어선 셈이다.
(/ p.196)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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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 철학,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리고 하이데거를 비롯한 독일 현대 철학, 미학을 주로 연구해왔다. 현재는 서양의 멜랑콜리 담론 연구,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멜랑콜리 미학], 옮긴 책으로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이 있다. 그 밖에 [기억과 상상의 불협화음], [탈근대담론의 ‘차이의 선’에 관한 계보학적/윤리적 연구: 크리스토프 멘케를 중심으로], [니체 철학에서의 고통과 비극], [서양 이성의 멜랑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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