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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와 나의 탄생 : 햄릿과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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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 윤혜준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 : 2013년 02월 28일
  • 쪽수 : 208
  • 제품구성 : 전1권
  • ISBN : 978895462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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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위대한 순간] 오늘을 일군 문학, 역사, 철학의 의미 있는 정점들

‘위대한 순간’은 문학동네와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함께 펴내는 인문교양 총서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사건의 특수성이 역사와 맞물려 보편성을 획득하는 의미 있는 정점을 ‘위대한 순간’이라 명하고, 문학?역사?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그런 순간을 현재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이를 통해 과거의 빛나던 순간들의 의미를 독자들과 함께 음미하고, 다가올 시간을 위대한 순간으로 빚을 수 있는 인문정신의 토양을 일구고자 한다.

확신을 의심으로, 균형을 균열로 뒤덮은 시대의 대기를
자유로 호흡한 이들의 미완성 드라마, 바로크!


햄릿의 독백이 의심과 회의, 사유와 성찰을 거쳐
‘나’라는 새로운 중력을 여는 바로크적 순간,
몽테뉴의 에세이는 거울이 되고, 렘브란트의 가면은 표정을 바꾸며,
파스칼의 갈대는 흔들리며 자라난다.

햄릿과 친구들이 여는 근대적 주체 ‘나’의 계보

이 책은 근대적 주체 ‘나’가 탄생한 바로크를 무대로 햄릿과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사유와 예술의 여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려보인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은 자신의 친구들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바흐의 베드로, 렘브란트, 데카르트, 몽테뉴, 파스칼, 세르반테스, 밀턴, 피프스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경험한 17세기 서양 지성사와 문예사의 순간들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햄릿과 친구들은 기독교적 사유와 세속적 근대의 요소가 팽팽하게 맞서던 바로크의 시대적 긴장을 고스란히 겪어낸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안주해 손쉬운 대답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에너지를 동력 삼아 의심과 회의로, 사유와 독백으로, 또는 글쓰기와 자화상을 통해 ‘나’라는 새로운 근대적 중력을 열어낸다. 이들이 역사의 전환점을 통과하며 일구어낸 사유와 예술 저변에는 인간을 이상화한 르네상스의 미덕이 붕괴된 흔적이 남아 있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믿음과 구원이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이전되던 당시 사회의 풍경과 통증이 자리하고 있다. 햄릿과 친구들이 이러한 흔적과 통증 위에 세운 ‘나’는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끝까지 미완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존재의 근거로 긍정하고, 계속 변해가는 가운데 죽음의 순간까지 삶을 이어가는 근대적 주체 ‘나’의 계보를 구축해나간다.

종교와 세속이 빚는 불협화음의 서막, 바로크

바로크는 세속적 근대의 요소들 대부분이 태동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믿음과 영성, 영혼, 구원, 심판, 내세 등 기독교적 사유방식 또한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시대였다. 정치, 경제, 과학, 철학, 예술,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과감한 변화와 혁신이 진행되는 한편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개인적 신앙 체험도 열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바로크’의 가치는 서로 대립각을 이루는 이 두 축 간의 갈등 속에 놓여 있다. 나아가 이 갈등과 모순, 괴리를 봉합하지 않고, 대립의 양태를 그대로 사유하고 형상화하면서 ‘나’의 주관적 시각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와 입장, 전략 속에 놓여 있다.
파노프스키는 바로크 시대를 두고 “르네상스 유산에 생긴 균열과 갈등을 직시하고 극복하고자 한 용기 있는 시도들”이라고 말했다. 그 동력은 아마도 주관적 에너지, ‘나’의 역동성에 있을 것이다. 바로크의 ‘나’는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처럼 자신을 초월하는 힘, 바람의 동력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바람은 갈대 속에 살아 있다. 햄릿과 친구들의 지난한 여정은 갈대와 바람을 동시에 보고 듣는 이중성과 긴장의 유산을 체득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햄릿의 ‘독백’을 ‘변주’하는 창조적인 시도들

햄릿은 존재와 구원, 죽음, 내세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종교개혁 이후 ‘나’의 고뇌와 번민을 ‘독백’의 형태로 표현하고 사색한다. 의혹과 불안이라는 근대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오르페오의 ‘독백’은 신들과의 계약에 대한 회의와 의혹으로 넘쳐난다.(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 유리디체가 정말로 뒤에서 따라오는 걸까 내내 의심하던 오르페오는 결국 그 의심 때문에 유리디체를 잃고 만다. 한편 데카르트에게는 이러한 의심이 ‘나’를 확인하는 긴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내가 의심하는 순간, 의심의 능력을 갖춘 ‘나’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이러한 ‘나’는 물론 완벽한 이성적 주체는 아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허상이고 허위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햄릿의 독백을 글쓰기의 형태로 이어간다. 그가 발명하고 명명한 새로운 글쓰기 방식인 ‘에세’는 ‘나’의 불명확함, 불안정성, 가변성, 모순 등의 바로크적 증상을 글로 추적하는 탐색의 시도이다. 글로 쓴 자화상, 몽테뉴의 [수상록](원제는 ‘시도’라는 뜻의 ‘에세essai’)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글은 없듯,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 어떤 것도 결정판이 아니다. 그가 그린 자화상들은 시간의 흐름을 얼굴의 변화 속에 담아내면서도 지나친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 자기비하가 개입할 수 없는 균형과 거리를 유지한다. 렘브란트 자화상이 갖는 미학적 가치와 도덕적 의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헌신을 다짐하는 금욕주의자 파스칼의 「회상록」과 세속적인 삶의 활기를 기념하는 쾌락주의자 피프스의 일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당대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참여관찰자’ 피프스의 일기가 햄릿이 말한 “세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면, 파스칼은 절대자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비춰본다. 예술, 사교, 교양, 야심, 권력, 사랑, 신화 등 르네상스가 추구하고 찬미한 인간의 자족성과 존엄성에 대해, 그는 햄릿처럼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갈대에 불과함을 생각한다.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는 생각의 한계에 대한 사유야말로 이성의 궁극적 단계이다.
또한 개신교 음악가 바흐는 복음서에 기술된 예루살렘이라는 ‘먼 나라’의 ‘먼 과거사건’과 지금 현재 ‘나’의 대조적 연결점을 다양하게 구축한다. ‘불쌍히 여기소서’ 아리아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곧장 ‘나’의 이야기로 전환시킨다. 이 아리아에서 용서를 비는 주체는 옛 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 베드로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탄원하며 노래하는 ‘나’가 된다. 이 ‘나’는 ‘나는 불완전하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바로크적 ‘주체 공식’을 따른다.

지금 그리고 여기의 바로크

바로크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름이다. 그것은 과거 서양의 한 시대, 한 국면의 특수한 조건이 만들어낸 문화, 예술, 사상의 경향과 구조를 지칭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 일회적인 역사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는 것은 인간성과 인간조건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상황 또한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욕망과 기술, 도전 등 ‘르네상스적’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그 모순과 폐해를 목도하는 바로크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바로크와 ‘나’의 탄생]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고전적 순간들을 담아낸다. 햄릿과 친구들이 제시하는 바로크의 순간들 속에는 대립과 갈등을 오락을 통해 회피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가 스며 있다. 이들이 창조적인 형태로 변주한 햄릿의 독백은 바로크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기자는 권유이자, 사회가 요구하는 끝없는 자기 발전을 추구하느라 ‘나’를 돌볼 틈도 없는 현대인의 피로와 정신적 허기에 건네는 따뜻한 위안이다.

목차

프롤로그: 뜻, 말, 벗

1막. 유령
1장. 고개 돌린 그 순간: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2장. 의심의 확신: 데카르트의 [명상]

2막. 독백
3장. “나 자신을 드러내려”: 몽테뉴의 [수상록]
4장. 독백의 사유화: 핍스의 비밀일기

3막. 개혁
5장. “숨김없이 그대로”: 렘브란트의 자화상
6장. 무릎 꿇은 ‘나’의 희열: 파스칼

4막. 복수
7장. 지옥에서 만든 무기: 17세기 전쟁과 문학
8장. 통곡하는 베드로: 바흐의 [마태수난곡]
에필로그: 지금, 여기의 바로크
바로크 시대 연대표

본문중에서

프롤로그

이 책은 근대적 주체, 곧 ‘나’의 탄생 시기인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과 그 ‘친구’격인 책과 그림, 음악을 소개한다. 독자는 각 작품 속 특정 ‘순간’으로 바로 안내될 것이다. 그 ‘순간’들은 서구 근대의 단면과 실상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 ‘순간’들은 지금, 여기까지도 파장이 미치는 지속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 p.9)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크 시대’의 ‘나’의 원형은 종교개혁이 만들어낸 ‘홀로 선 나’이다. 그 점에서 종교개혁은 ‘바로크’의 원천이자 시발점이다. 그렇지만 종교개혁 그 자체가 ‘바로크’인 것은 아니다.
(/ p.15)

‘바로크’란 갈등과 모순, 괴리를 봉합하지 않거나 못하며, 대립의 양태를 그대로 사유하고 형상화하여 ‘나’의 시각에서 주관적으로 해결하는 태도, 입장, 전략을 지칭한다.
(/ pp.17~18)

1막. 유령

재주는 신과 같으나 인간 오르페오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약점 많은 인간, 갈대와 같은 존재이다. 일단 그리스 비극에 늘 등장하는 고정 죄목인 ‘오만’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크의 논리를 움직이는 것은 적절한 조화와 발전이 아닌 극과 극, 전부 또는 전무의 대립이다. 문제는 자만심 그 자체가 아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도전이 오르페오의 내면에서 솟아오른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그리 앓지 않았던 비교적 새로운 질병인 의혹과 불안이 결정적으로 그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파멸시킨 의혹의 ‘유령’이 오르페오를 엄습한다. 오르페오는 17세기 초에 부활한 바로 이 의심이라는 ‘근대’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유리디체는 과연 있을까? 유리디체가 따라오고 있다고 과연 믿어도 되는 걸까? 혹시 뒤에 따라오는 것은 헛것, 유령이 아닐까?
(/ pp.38~39)

데카르트에게는 이러한 의심이 ‘나’를 확인하는 긴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내가 의심하는 순간, 의심의 능력을 갖춘 ‘나’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이것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쓸모 있는 논리일 수 있다. 그러나 오르페오는 ‘나’의 존재가 아닌, ‘나’에게 가장 필요한 ‘남’, 유리디체의 존재를 의심한다.
(/ p.39)

이른바 ‘데카르트적 주체’나 ‘코기토’는 결코 자족적이고 완벽한 이성적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신이 인식하는 바가 허상이고 허위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능력일 뿐이다. 그밖에 ‘코기토’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유한한 존재가 근본적 의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회의하는 존재의 ‘있음’뿐 아니라 그러한 회의의 전제가 되는 보다 완벽한 초월적 질서에 대한 개념이 그의 안에 내재해 있음을 증언한다.
(/ p.56~57)

햄릿은 존재와 구원, 죽음, 내세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해야 하는 종교개혁 및 그 이후 시대 ‘나’의 고독과 번민을 독백의 형태로 표현하고 사색한다. 여기서 독백은 해결까지는 아니어도 그 부담은 해소하는 기능을 한다. 문제제기와 해답의 모색이 대답으로 이어지지 못해도 그 과정 자체가 ‘대안’은 될 수 있는 세계는 몽테뉴의 [수상록Essais]이나 새뮤얼 피프스의 [일기]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글쓰기로 구축되어 있다. 이들 또한 독백하는 햄릿의 ‘친구들’이다.
(/ p.72)

2막. 독백

몽테뉴는 엄밀히 말하면 바로크 시대 인물은 아니다. 1533년에 태어나 1592년에 사망했으니 칼뱅보다는 한 세대 뒤 사람이지만 데카르트(1596년생)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몽테뉴가 이 책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그가 ‘나’의 불명확함, 불안정성, 가변성, 모순성 등의 바로크적 증상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바로크적’ 저자이기 때문이다.
(/ p.74)

피프스의 일기는 철저히 ‘나’만의 세계를 지향한다. 생전에 그가 일기를 쓴다는 사실이 완벽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는 점, 남들이 쉽게 알 수 없는 속기로 일기를 썼다는 점, 일기를 더이상 쓰지 않은 후에도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고이 보관했다는 점 등이 이를 증언한다.
(/ p.91)

피프스의 일기 쓰기는 공적인 ‘나’로부터 사적인 ‘나’를 떼어놓는 행위이다. 나아가 그의 일기 속에서 사적인 ‘나’ 안에 있는 또다른 ‘나’가 외국어의 형태로 분리된다. 글을 쓰는 ‘나’는 이 모든 ‘나’들을 같은 지면에 통합하고자 한다. 일기 쓰는 기록자 ‘나’는 교회에서 엉뚱한 짓을 한 행위자 ‘나’를 하느님 앞에 세워놓고 용서를 빈다. 과연 이러한 발언에 진정성이 있는가? 일기는 글쓰는 이의 성향과 상관없이 그 형식에 있어서 자기의 삶을 기록하고 반성하는 자기성찰의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정서와 통하는 면이 많다.
(/ p.98)

햄릿을 하필이면 비텐베르크 대학생으로 설정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왕자 햄릿보다 신분이 아래인 레어터스는 중세와 근세 시대의 대표적인 대학도시 파리에서 공부하고 있다. 정작 햄릿이 역사가 짧은 북부 독일의 소규모 대학에 다닌다는 점은 그의 지위나 격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비텐베르크 교수진 중에는 마르틴 루터가 있었다. 그는 이 대학을 거점으로 종교개혁을 추진했고, 독일 대학 중에서 이 비텐베르크만이 거의 유일하게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쾰른이나 프라이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등 다른 저명한 대학들은 모두 가톨릭 편에 섰었다. 햄릿과 비텐베르크를 연관지은 것은 작가가 햄릿을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을 받은 인물로 설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분명한 표시다.
(/ p.106)

3막. 개혁

종교개혁은 바로크의 원천이다. 바로크는 르네상스처럼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있는 그대로, 원죄로 인해 망가져 있을 수밖에 없는 일그러진(‘바로크’한) 존재로 그린다. 개혁종교는 이러한 인간이 자신의 망가짐과 일그러짐을 인정하고 하느님 앞에 엎드릴 때 은총으로 일순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다. 렘브란트가 그린 인간들의 모습은 이러한 이중성을 구현하고 있다.
(/ p.119)

‘나는 불완전하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을 이상화한 르네상스와 대조되는 바로크의 인간관을 요약하는 명제이다. 나는 불완전하므로, 미완성이다. 따라서 나는 계속 변하는 가운데 나의 삶을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간다. 글로 쓴 자화상,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글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의 그 어떤 자화상도 결정판이 아니다.
(/ p.120)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헌신을 기억하고 다짐하는 금욕주의자 파스칼의 「회상록」과 세속적인 삶의 활기를 기념하는 쾌락주의자 피프스의 일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당대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참여관찰자’ 피프스의 일기가 햄릿이 말한 “세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면, 파스칼은 절대자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비춰본다고 할 수 있다.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과 세계의 구도는 지극히 바로크적이다. 절대자 하느님과 중재자 예수 안에서의 환희 정반대편에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타락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불행이 자리잡고 있다. 그 사이를 메울 어떤 인위적 방법도 주어져 있지 않다. 예술, 사교, 교양, 야심, 권력, 사랑, 신화 등 르네상스가 추구하고 찬미한 인간의 자족성과 존엄성에 대해, 그는 햄릿처럼 깊은 회의를 표명한다.
(/ p.133)

극과 극의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하는 파스칼은 인간을 ‘믿는’ 르네상스적 논자들을 향해 조롱조로 반문한다. “인간이란 참으로 하나의 키메라 아닌가! 참으로 신기한 존재! 괴물 같은 혼란의 극치, 모순덩어리면서도 기적 같은 존재! 모든 사물을 다 판단하면서 땅에 기어다니는 아둔한 벌레, 진실의 보고이자 불확실함과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자랑이자 쓰레기가 아니던가.”
(/ p.135)

4막. 복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가 무인도 생활 26년 만에 충직한 하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머스킷 총 덕택이었다. 하느님이 아닌 인간을 경배하는 모습, 그의 손에 든 머스킷 총에 놀라 부들부들 떨며 발아래 납작 엎드린 ‘야만인’, 이 광경은 바로크의 긴장이 와해되면서 새로운 ‘인간’ 중심 르네상스가 ‘계몽주의’란 이름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총 든 ‘나’들의 자연 정복과 세계 정복의 역사 속에서 머스킷 총을 비롯한 “저주받을 혐오스런 도구”들의 악마성에 대한 인식은 빠른 속도로 퇴화했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와 지옥의 연관성을 망각한 영혼들은 이미 한 발은 지옥에 들여놓은 상태나 다름없다.
(/ pp.168~169)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라이프니츠의 ‘다양성 속의 통합’ 개념을 예시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 작품에서 통합은 선명한 대립과 강렬한 대조 속에서의 통합이지 단순한 다양성의 조화는 아니다. 이탈리아적 요소와 독일적 요소가 맞서고, 합창단과 독주자들이 서로 대항하며, 심지어 같은 합창단이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치다가 이내 예수의 고초를 슬퍼하는 코랄을 부르기도 하니 역할과 입장이 극에서 극으로 전환된다. 오케스트라 안에서도 통주저음과 고음악기 간 충돌과 경쟁이 전곡에 걸쳐 지속된다. 말하자면 [마태수난곡]은 바로크의 정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구현하고 있다.
(/ p.183)

에필로그

‘바로크’적 상황 또한 역사 속에서 반복된다.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의 투지와 야망, 욕망, 기교, 기술, 도전, 도발 등 ‘르네상스’적 업적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그 폐해와 모순, 잔해와 파괴를 목도하는 ‘바로크’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근대 문명의 폐해와 재난에 대해 ‘해체’의 현란함은 대응책이 될 수 없다. 이 책 [바로크와 ‘나’의 탄생]은 바로크에 태동한 ‘나’의 기원을 밝혀보자는 계보학적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바로크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되새기자는 권유이다.
(/ p.191)

파노프스키는 바로크도 이러한 ‘르네상스 문명’에 포함된다고 본다. 바로크는 ‘르네상스 문명’의 단계 중에서 유일하게 르네상스의 “내재적 갈등”을 은폐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이를 직시하는 가운데 그 모순을 “주관적 에너지”로 전환시켰던 국면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추적해본 바로크 시대의 주관성의 양태는 이렇듯 ‘나’의 시점에서, ‘나’의 입장에서 르네상스의 유산에 생긴 균열과 갈등을 인지하고 이를 “주관적 에너지”로 변형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이다.
(/ p.193)

저자소개

생년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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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수 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프랑스어 부전공)를 나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버펄로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영문학과 비교문학, 사상사 등을 가르친다. 방문학자 자격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런던 대학에 각각 일 년씩 머물렀으며, 이 책 [바로크와 ‘나’의 탄생]은 그때의 산물이다.
지은 책으로는 학술서 Metropolis and Experience: Defoe, Dickens, Joyce(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Physiognomy of Capital in Charles Dickens(International Scholars Publications),[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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