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희곡집]

처음 이 희곡집을 읽을 때 글의 난해함으로 인해서 별로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분명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을 것인데.

 

다 같이 모여서 하나하나 희곡을 찬찬히 읽어 가면서, 이 작가분을 분석한 논문들과 비평가들의 글들을 모아가면서, 이 작품집에 담겨있는 모든 희곡들이 '죽음'과 '실존'이라는 키워드로 묶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희곡을 이해해 갈 수 있었다.

 

'실존'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인간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듯. 매 순간 '빨간약'을 선택했던 인간의 삶을 난 옅볼 수 있었다. 우리는 '죽음'을 많은 시간 잊고 살고 있다. 이것이 내 문제가 될 일은 아직 먼 시간 뒤의 일이고, 단 한번 겪을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경험이 없기에 이 문제는 분명히 모두 겪어야 함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매 순간 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 죽음의 공포와 내 지금의 실존에 대해서, 분명 찾아지지 않을 답에 대해서 매진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것은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죽음 이후를 아는 자는 단 한 명도 없기에 그것은 증명되지도 못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지금을 온전히 산다는 것과,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전히 미지에 대한, 영원히 지금에 존재할 수 없다는 공포를 수반하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분명 맞딱뜨려야 한다. 죽음을.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사고의 자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 지금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단지 알지 못하고, 지금에 순응하는 것이 몸과 마음에 평안을 제공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사르트르도 카뮈도 실존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지 이야기 했고, [구토]와 [이방인] 이라는 소설 속에서 그 과정과 상태를 묘사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윤영선 선생님에게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나 느껴졌다.' 라고 했다.

죽음과 실존에 대해서 매 순간 빨간약을 선택한 한 작가의 치열한 삶을 조금이나 옅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러한 고통 속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원전을 멈춰라]

세상을 살다보면 사회와 권력의 상관관계 속에서 거대한 음모론을 만나게 된다.
세상을 지배하는 커다란 손이 있고, 우리는 그것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되기는 한다.

이 책에도 원자력 발전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음모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자력 발전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손길에 대해서 막상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을 사실 잘 믿을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책의 이야기가 최악의 비관론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의 일부만이 사실 일지라도 이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나와 너의 죽음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느껴졌기 때문에.

 

'죽음의 재' 라고 표현되어진 원자력의 부산물들. 이 재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세상에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결국 이 재가 세상을 덮고 인간들 모두가 이 재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때, 인류는 어떤 변화를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전멸 하던가 아니면 진화 하던가.

 

그리고 그것을 조정하는 거대 자본들의 음모.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조금만 알게 되어도 이 이야기의 그럴듯함에 마음이 쏠린다.
인간이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런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깊어지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음모론이 맞을지도 모른다.

 

원자력은 그 태생의 순간 이 어마어마한 에너지 때문에 과학자에게 윤리성에 대한 책임을 부여했다. 원자력이 태어난 순간 부터 과학과 윤리 그리고 인류의 생존에 대한 책임이 과학자들에게 생겨났다.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거대한 에너지의 존재. 이것은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이 힘을 과연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가?

인간의 욕망은 이 힘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인류는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의 말미에 이 두 질문만이 내 뇌리에 남는다.

[숲]
선잠을 자다 어슴푸레 하게 깨어난다. 꿈은 아직 나를 잡고 나는 반쯤 꿈과 현실의 경계에 걸쳐 있다. 두어번 눈을 깜빡이고 숨을 서너번 들이마시고 나면 나는 점차 현실로 돌아오고 꿈과 나를 연결하던 잠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는 숲.
우리는 세계를 이야기 할때 온누리 라는 표현을 썼던것 같다. 너와 나와 우리가 곧 세계라는 뜻일까? 이 나라 선조들은 세계를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이해했던 것일까? 너와 내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그곳이 곧 세계이고 세상이라고. 영어로는 earth 곧 대지. 지구를 그들은 대지라고 부른다. 민족마다 나라마다 언어마다 세상을 뜻하는 말은 다르다.

 

숲이 세상의 중심이고 곧 세계인 사람들. 그들에게서 숲을 앗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세상을 파괴하는 것일 것이다. 숲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냥 사라짐으로 그 흔적조차 남겨 놓지 않음으로 도리어 그 존재했음을 증명 하는지도 모른다. 숲을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날 난 숲을 찾아간다. 그 숲은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게 가꾸어지고 보기 좋은 나무들로 선별되어진 숲이다. 우리는 가끔 그곳으로 숲을 찾아간다. 파괴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인공적인 그곳으로 난 자연을 찾아간다.

 

숲과 나무와 사람과. 르귄은 그들이 한 곳에 모여 싸우지 않고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