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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신학  | 맘가는데로서평 2017.06.14 2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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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본 예배신학
부흥과개혁사 |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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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구약 신앙과 몇 가지 의식에 초점을 맞춰 시작하고이를 통해 신약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이 책에서 사용되는 방법은 성경신학이다성경신학이란 하나님과 성경적 계시를 성경 각 권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 강조를 두어 연구하는 방법이다성경신학은 성경 본문 배경을 검토하면서도무엇보다 성경 안에 발견되는 하나님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계시의 성격을 밝힌다예배는 매일같이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주제다예배를 인도하고 참석하는 이들 속에서 예배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회복되고이를 통해 하나님의 전체 계획과 그 백성을 향한 목적을 바로 볼 수 있을 때예배의 역동성과 진정한 의미도 회복된다.

 

  예배에서 정말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그것은 마음 자세일 것이다저자는 합당한 예배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신·구약 성경을 통해 체계적이고 통합적으로 답변하고 있다신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의 토대가 되는 구약 예배 요소와 개념을 1-2장에서 설명한다. 3-10장에서는 복음서부터 계시록까지의 신약을 중심으로 예배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구약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인 역사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고자연이나 초월적 현상 및 언약의 말씀과 명령을 통하여 인격적 관계를 맺으셨다인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예배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갔다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의 제도와 방법으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구약과 성경 밖의 자료에서 예배를 표현하는 주요 용어의 용례를 간단히 검토하고 있다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하는 다양한 방식을 설명한 후 합당한 예배란 찬양섬김경외가 제의활동과 함께 맞물려서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마태와 요한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가 설명한다구약의 예배 제도가 어떻게 대체되고 있는지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예수를 통해 설명한다모든 유대 절기를 대체할 분과 예배 대상이 왜 예수인지 구약과 연관 지어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성전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으로 대체되었다메시아를 통한 구원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예수로 말미암아 이제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예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예배의 가장 완벽한 형식이자 모범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제자들은 비가시적 성전인 예수에 대한 신학적 사고를 바르게 가지고 있었다가시적 성전 중심에서 비가시적 성전 중심으로의 이동은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화 되었다제자들의 예배에 대한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맞물림을 통해 신학적 틀이 체계화 되었다따라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적용하여 예배 드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예배 형식은 하나님과 공동체가 같이 맞물리는 진지한 노력과 발전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바울은 구약의 제사 개념을 통해 참 예배를 설명했다예수는 죽음으로 속죄를 위한 온전한 제물이 되어 구약 제사를 완성했고새 언약 아래서 새 성전이 되셨다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예배를 드린다히브리서는 합당한 예배란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과 가능하게 하신 방법을 통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히브리서처럼 고난 받으신 메시아가 영광으로 통치하는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춘다요한계시록을 통해 요한은 하늘의 환상을 보며 힘을 얻고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준다.

 

  부끄럽지만 예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다예배가 가지는 의미보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예배의 개념을 명확하게 잡지 못하고 있었다합당한 예배가 무엇일까책의 내용을 그대로 빌리자면합당한 예배는 하나님이 제시해준 방법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따라서 이 예배학 책은 다음과 같은 도움을 준다고대 사회와 구약 이스라엘이 이해한 예배 방식을 알 수 있다구약적 근거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신약 성경의 예배 관점 이해를 돕고오늘의 예배 자들에게 성경신학을 토대로 올바른 예배관을 갖도록 돕는다공동체 예배를 구성하는 리더들에게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예배의 개념을 이해하고 예배의 참 의미가 담겨 있는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가장 긍정적인 것은 저자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말하지 않고 성경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예배를 체계화 시켜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현대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성경적 예배신학 체계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구약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를 분리하지 않고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예배를 설명하고 있다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예배 가운데 강조되지 않는 단점을 드러내고 있다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희생의 복음으로만 설명하고 승리의 복음을 도외시하는 약점을 드러낸다.

 

 

  예배학을 공부하기 이전에는 예배의 순서나 형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하여 본 적이 없다그 말은 효과적인 예배에 대한 고민은 있었을 수 있지만예배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고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제 합당한 예배 구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예배의 순서와 내용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방식인지정통을 추구하는지 전통을 추구하는지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하여 예배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설교자로서의 고민이 이제 예배자로서의 고민으로 옮겨지고 있다지금부터 예배순서를 예배학의 관점에서 더 깊은 고민을 시작한다.





예배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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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 맘가는데로서평 2017.06.14 22: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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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07/08/10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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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생으로서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물론 신학생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교회 지도자가 숙지하여야 할 내용이지만 특별히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말하는 목회자와 신학생은 필독서이다. 책이 좋다고 하여서 이 내용을 모두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지혜대로 잘 받아들이라는 이야기 이다. 레슬리뉴비긴의 저서를 읽으면서 발견한 이승구교수가 뉴비긴의 신학과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리뷰를 써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리뷰보다는 이승구교수의 리뷰를 그대로 인용한다. 



레슬리 뉴비긴의 신학에 대한 고찰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대학생 때 친구의 권면에 따라 매일 점심 시간 전 30분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기독교적 이해를 추구하던 한 젊은이, 몇 년 후 기독교 사역(Christian Ministry)에로 헌신 하고, SAM의 지체와 간사로 활동하면서 선교사로 결단한 젊은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신학교에서 (영국에 슐라이어마허를 진지하고도 체계적으로 소개한) 죤 오만(John Oman) 밑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을 공부한 신학생, 그러던 중 로마서 공부를 통해 구속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확신하는 이가 된 젊은이, 그리하여 그 열정으로 가지고 1936년 인도의 선교사로 가서 효과적으로 사역하며 남인도 주교(Bishop of South India)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하며 또한 세계 교회협의회(WCC)의 여러 활동들을 감당했던 그 사람이 바로 레슬리 뉴비긴이다.

1974년 은퇴 후에는 인도에서 도보 여행으로 영국으로 돌아가(65) 버밍햄의 셀리 오크 선교사 훈련 대학에서 가르치고, 영국 교회의 여러 문제에 관여한 후 그가 발견한 문제를 지적하는 영국을 포함한 서구 교회에 대한 도전서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를 내었고[2], 프린스톤의 워필드 강좌를 하고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를 낸[3], 그러면서도 늘 검소하고 따뜻한 이웃 환대가로 노년을 보내고, 1998 1 30일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따뜻하고 겸손하면서도 용감하게 서구 기독교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던 인도와 영국 두 세계 모두에 대한 선교사라고 칭할 수 있는 이 영국인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1. 레슬리 뉴비긴의 공헌

 

    {종교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의 복음}에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의 문제점과 특히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36) 잘 드러내어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슬리 뉴비긴은 이런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가 지난 300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발전되어 온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2, 3, 4, 13). 지난 300여년 동안 서구 사상은 결국 사실의 세계(world of facts)와 가치의 세계(world of values)를 철저히 나누는 새로운 이원론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옳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사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뉴비긴은 잘 보여 준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 전통적 기독교 비판은 결국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 전통이라는 또 다른 신앙(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뉴비긴은 잘 보여 주었다. 그래서 뉴비긴은 기독교의 합리적 전통과 인본주의의 합리적 전통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뉴비긴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기독교나 기독교의 유일성이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옥스포드 대학교의 경제학자였던 데니스 먼비(Dennis Munby) 1960년 대 초반에 쓴 {세속 사회의 개념}(The Idea of a Secular Society)과 이에 근거해 나온 저작들에 전제된 "세속 사회"라는 개념이 신화(myth)라는 것을 잘 지적하여 내고 있다 (17).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강조와 그것의 사실성,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증언에서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뉴비긴의 강조는 모든 것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만 취급해 버리는 이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 매우 중요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그 한 부분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이 세상에 임하여 역사 가운데서 진행하여 가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으로 극치에 이를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 天國]와 교회, 그리고 선교의 의미를 잘 연결하여 쉽고도 바르게 설명하는 일을 뉴비긴은 잘 해 내었다(9, 10). 이와 연관해서 그가 선교는 인간의 의무감에서 나타나는 인간적 행동이나 우리 자신의 사업이 아니라, "기쁨의 폭발로 시작"하고(191),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192f.), "새로운 실재의 현존, 곧 능력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현존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195),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나누는 것"이고(205), 이런 선교의 중심에는 "단순하게 그[하나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과 그 분을 우리의 삶으로 섬기고자 하는 열망"이요(208), "감사와 찬양이 있고"(205),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행동으로 표출되는 송영"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귀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209).

마지막으로 뉴비긴이 복음 해석자로서의 회중을 강조하며 예수님께서 만드신 믿음의 공동체는 찬양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이고, 이웃의 관심사에 깊이 있게 관여하는 공동체, 성도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 서로 첵임지는 공동체, 희망의 공동체라고 잘 제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높이 사게 된다(18 ). 이런 그의 책을 우리 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2. 레슬리 뉴비긴의 논의에서 아쉬운 점

 

   그런데 뉴비긴은 기독교 신앙의 정당한 변호를 하려고 하면서 "성경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은 우선 이야기, 즉 자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하면서(32f.), (오늘날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대개 그리하려 하듯이) 이를 명제적인 진술과 좀 대립시키면서 논의한다.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인상은 기독교적 이야기에서 명제를 도출해 내는 모든 시도를 다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체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는 것이다(32).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정확히 그런 시도를 하였던 헤겔 같은 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서 기독교 이야기로부터 얼마든지 명제적 진리들을 이끌어 내고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적 신학은 계속해서 그런 작업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기독교 이야기 가운데서 바르게 기독교적 명제를 이끌어 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 그런 명제적 진술을 하는 것이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 자체도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명제를 도출해 내고 그것에 근거해서 신학적 토론을 하고 있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이제부터 신학적 논의는 전혀 명제화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기사 신학(narrative theology), 이야기 신학(story theology) 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기사(narrative)와 명제를 대립시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시도로 보인다. 이는 뉴비긴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런 성향을 지닌 모든 이들의 공통된 문제이다.

 

 둘째로, 뉴비긴이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전통들 가운데서 "어느 전통이 믿을만한 것인가를 미리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될만한 외부 기준도 없다. 만일 내가 기독교 전통 안에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전념한다면, 그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결단이 된다"(128f.)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아쉬움이 크다. 물론 뉴비긴은 폴라니(Michael Polanyi) {인격적 지식}(Personal Knowledge)의 논의를 따르면서 우리의 이런 결단과 헌신은 "보편적 의도"를 가짐으로 단순한 주관성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하며(129, 207), 또한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임을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 한다(129). 그는 또 다른 곳에서도 그는 "두 가지 전통의 활력과 온전성을 비교하는" 것이 남아 있다고 하며,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라고 말한다(125 참조).

 결국 이것은 뉴비긴이 일종의 "종말론적 검증"(eschatological verification)을 생각하면서, 그때까지는 모든 전통들의 대조 가운데서는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모든 경험에 대해 더 비중 있는 일관성과 인지성을 줄 수 있는 합리적 전통"으로 드러나는 것, "어떤 전통이 활력과 온전성을 가지 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자신도 모르게 전제하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게 한다. 그는 물론 뒤에서 우리의 결단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결단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로 앞의 진술을 보완한다(129). 만일에 그가 진정 이 후자의 보완하는 말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보여 주신 계시가 있고, 그 계시에 충실한 반응만이 믿을만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것을 "외적 기준"을 제시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주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계시"라고도 말하지만(277), 그것을 그런 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까지는 나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그는 세속적 인본주의, 국가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교 등을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강하게 논의하는 제10장에서의 논의(특히 200, 201)의 요점을 잊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는 계시를 말하는 기독교 전통도 다른 합리적 전통과 나란히 선다고 말하면서 알라스데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함께 강조하기를 "이런 경쟁적 주장들의 유효성에 대해 판결을 내릴만한 중립적인 재판석은 없다"(109)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로, 그가 때때로 복음 전도(선언적 기능)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는 행동을 우선 순위에 두는 것(봉사적 기능)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과 그에 대한 그의 조화의 시도는 좀 애매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교회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도 무시해 버리는 선교 개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221). 그러면서 이런 것이 " 그 개념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잘못 사용한 경우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비판하는 이들과 여전히 그런 극단적 오용을 주장하는 이들을 앞에 놓고 그것이 "현재 기독 공동체를 철저히 분열시키는 선교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221, 222) 과연 정당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뉴비긴의 논의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결국 그가 말하는 100년 전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 학교에서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을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다"고 배우고, 그것이 별들의 운행만큼이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36)이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다원주의자들에 의해서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개인적 의견으로 여겨진 것에 대항해서, 뉴비긴의 논의의 결과로, 아니면 적어도 그의 논의 안에서는 이것이 다시 자명한 사실로 회복되었는가에 대해 물을 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그렇다'라고 말하기에는 무엇인가 모호한 점이 그의 논의 속에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뉴비긴이 제시하는 기독교가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믿고 신봉하던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에 대해 뉴비긴 자신이 과연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말하려는 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특히, 그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분은 어떤 사람은 영광을 받게 하고,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138, 141)라고 단언할 때 이런 점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물론 선택은, 뉴비긴이 잘 강조하는 바와 같이, "특권적 신분으로서의 선택"이 아니다(139).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비난과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국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140, 141)고 시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비긴이 바르트와 같이 "예수님은 나중에야 세상에 나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 분을 위하여 우리와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그 분이 인간의 본질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실 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준다"(142)고 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함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논의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물론 그는 "우리가 로마서에서 공부한 말씀은 보편 구원론적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145). 그러나 그는 또한 가장 엄격한 자기 훈련의 요구가 고전 9:27 같은 말씀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복음의 전체적 성격이 긴장을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145). 그는 이로부터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합리적 보편 구원론을 거부하며(145, 146), 또한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못 받을 것인가를 따지는 일에 휘말리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도록" 한다고 말한다(145). 그러나 그는 왜 "우리는 누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분명히 어떤 구별을 말하고 있다"고 단언하지 못하는가? 바로 이런 곳에서 뉴비긴의 기독교와 정통 기독교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다.

 

 

3. 한국에서의 종교 다원주의 논쟁에서 유의할 점

 

 무엇보다 먼저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나 또 어떤 점에서는 인도 사회와도 달리, 기독교가 어느 정도 이 땅에 선포된 상황 가운데서는 이미 우리가 종교적으로 다원적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뉴비긴도 말하고, 다른 많은 이들도 말하듯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곳이었다"(254). 그 초대 교회의 상황과 한국에서는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헌신하도록 하는 기연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사회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단에 근거한 신앙의 선택을 의미했던 것이고, 때로는 그 결단에는 큰 희생이 동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한국 상황에서는 종교 다원적 상황은 서구에서 최근에 겪고 있는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로의 변이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서구인들 가운데 일부는 이 책에서 레슬리 뉴비긴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런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에 직면해서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정신사적 작업에 근거해서 이데올로기적인 종교 다원주의나 내포주의를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결론인양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뉴비긴을 포함한 여러 비평가들이 잘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 종교 다원적 현상과 (2) 종교 다원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종교 다원적 현상은 불가피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핍박을 받지 않으면서 또 강제 받지 않으면서 참되게 신앙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해서 서구의 종교 다원주의자들이나 내포주의자들은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나아 갈 길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를 유일한 진리요 바른 신앙으로 선택했던 한국 등의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의 기여할 바가 있다고 여겨진다. 유교나 불교나 도교의 도리를 다 살펴보고, 그들이 제시하고 삶의 길을 정진하며 그 안에서 힉(John Hick) 등이 동료 종교인들에게서 발견하는 성인적(聖人的) 삶의 길을 열심히 걷다가도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의 계시에 부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의 자신들의 노력과 구원에의 열망이 참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진정한 해방(liberation)과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선언하며 다른 이들도 이 유일한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일을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이것이 종 교 다원주의적 상황 가운데서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둘째로,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대하는 배타주의(exclusivism)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우리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그 다양한 배타주의적 입장 중에서 어떤 태도가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장 충실한 것인지를 물으면서,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 비판에서는 다양한 배타주의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어떤 사상을 우리 자신의 사상으로 가져야 하는 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와 내포주의에 반발하는 배타주의에는 크게 나누어서 (1)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와 (2)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 그리고 (3)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주의적 배타주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선택된 사람이고 인간 예수만이 버려진 인간이고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부정되고 다시 긍정된다고 하므로, (1)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만인 구원론적 정향의 결론에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2)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긍정되나 그 구원에서 자기 스스로를 배제할 사람이 있고 그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로 나아간다. 때로 뉴비긴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분에 대한 나의 신뢰가 내가 그 분의 신뢰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배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146). 그리고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대개 최종적 구원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여 말한다(인간 편에서의 불가지론). 뉴비긴의 비슷한 강조를 보라: "그러나 궁극적 결론은 홀로 재판장이 되시는 분이 판결을 내리는 종말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111, cf. 125, 286, 287, 290, 296); "이런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어떤 제한을 두거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의 영역 밖에 있다고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고자 하는 어떤 유혹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146). 이 때 뉴비긴은 끝까지 예수를 주와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포함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뉴비긴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며, 그것이 중심적 질문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음을 단언"하면서 논의하고 있다 (285f.).

 그는 바르트와 크래머에게 동의하면서 "정말로 신중한 신학자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구원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287). 그래서 뉴비긴은 자신의 입장을 규정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가 유일한 진리임을 긍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적이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는 배타주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295).

 이에 비하면,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나[보편 구속, universal atonement], 타락한 인간 중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구속을 믿은 이들은 구원함을 받고, 가기 스스로 이를 저버린 이들은 구원함으로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제한 구원, limited salvation). 이를 정통적 알미니안적 배타주의라고 언급한 이유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내포주의를 주장하는 클락 피녹 등은 자신들의 내포주의가 알미니안적 해석에 충실한 것이라고 지나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정통적 개혁주의적 배타주의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궁극적으로 구원 받을 이를 위해 구속을 이루셨으므로(제한 구속, 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결코 무()로 돌아 갈 수 없고 반드시 효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반드시 유효한 결과를 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튼튼하고 믿을 만한 구속을 이루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타주의나 특정주의 입장을 주장한다고 해서 다 같은 사상이라고 하기 어렵고, 이런 크게 다른 배타주의적 입장 가운데서 과연 어떤 것이 성경에 일치하는 것인지를 잘 살펴서, 우리는 성경에 일치하는 일관성 있는 사상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들에게 최종적으로 부과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는 어디까지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나가려고 하는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묻는 이들에 반해서,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해석하는 우리의 해석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각자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으로!"를 외치거나 논의하면서도 결국은 기독교의 온전한 진리성에 충실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나만을 위한 진리, 우리 집단만을 위한 진리, 마지막 까지는 그 진리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라,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이다. 그 진리는 물론 나의 삶 가운데서 주체적으로 살아져야 하는 주체적 진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 대한 주()------------------------------------------

1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이 글은 Le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World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SPCK, 1989), 허성식 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IVP, 1998)에 대한 서평 중심의 논의로 쓰여진 것이다. 탁월한 번역에 감사를 드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번역과 음역의 문제는 본문 가운데서 논의하는 중에 시사될 것이다.

 

2 The Otherside of 1984: Questions to the Churches (Geneva: WCC, 1983), 이는 서정운 총장의 번역으로 {서구 기독교의 위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7)로 소개되었 다. 3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London: SPCK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6)


 





다원주의사회,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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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비밀  | 맘가는데로서평 2017.06.14 22: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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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 하나님 나라의 비밀
새물결플러스 | 201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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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 나라의 비밀

저자: 스캇 맥나이트

      영국 노팅엄 대학 철학박사

      미국 노스파크 대학교 종교학 교수

      노던 신학교 신약학 교수

      : 신약학자로서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다. 세계성서학회, 신약연구협회 회원이며, NIV 적용주석』시리즈 갈라디아서와 베드로 전서를 집필했다.

 

논지: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에 배웠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모두 재 점검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은 성서학자, 신학자, 종교사회학자까지 망라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저자는 성서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와 작동방식을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찾아내는 도전을 주는 책이다.

 

 

   1. 스키니진 스타일의 하나님 나라

   스키니진 스타일 접근법에서 사용되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를 정의하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는 선한 사람들이(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간에) 공동선을 위해 공적 영역에서 행하는 선한 일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서는 공동선을 위한 일을 결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스키니진 스타일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공동선을 위한,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행동"으로 이해한다.

 

  2. 정장바지 스타일의 하나님 나라

  정장바지 스타일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때때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온갖 종류의 치유들 안에서, 그리고 공적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구속의 순간들"로 축소시켜왔다. 정장바지 스타일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인가? 즉 하나님 나라는 나라인가, 백성인가, 혹은 영토인가? 그들의 진술은 이렇다. 첫째, 하나님나라는 현재인 동시에 미래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통치인 동시에 영역이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을 보다 나은 장소로 만들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시키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

 

  3.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방식이 있다. 그러나 나는 A-B-A'를 제안한다. 플랜A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통치하시는 것이었다. 플랜B는 이상적으로는 다윗이 통치하고 다윗 이후에는 이스라엘 왕이 통치하는 것이었다. 수정된 플랜A'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통치를 세워나가신다. 즉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수정된 플랜A'의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다. 이제 하나님은 왕이신 예수 안에서 통치하신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서 살아간다. 왕이신 예수 곧 구주를 통해 용서가 제공된다. 예수의 이런 통치는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가 실천해야 할 세가지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제안 한다. 첫째, 우리는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들이 아니라 성서 전체를 설교할 필요가 있다. 3년마다 교회가 성서 전체의 각 부분들에 노출되어야 한다. 둘째,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성서를 읽도록 권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성서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대해서 가르친다.

 

  4.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전적으로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 신학을 뒤따라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신학은 우리가 말해야 할 이야기, 즉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다. 오늘 우리는 예수로부터 왕이신 자신에게 복종하여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라는 그 이야기가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들게 하여서 그 이야기에 참여하라는, 세상에 그 이야기를 전하라는, 그리고 왕이신 그분의 왕권을 축소시키려는 온갖 우상숭배적 이야기들에 도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우리의 복음이 대항문화적이라면,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 역시 모든 면에서 대항문화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제국의) 권력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다. 왜 그런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 예수는 로마 황제를 지지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권력을 해체하고 있었다. 참된 권력은 참된 왕이요 참된 황제이신 하나님께 있다. 그리고 예수는 오직 그 하나님께만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플랜A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백성에 대한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5. 하나님 나라는 백성이다

  나라는 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위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 나라를 정의나 구속적 통치 역학으로 축소시키는 일반적인 태도에 즉각 도전한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 및 하나님 나라의 사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요점을 제시한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곧 왕이 다스리는 백서이다. 예수가 한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면 일련의 변화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정의나 구원으로 축소되면, 분명히 그 단어에 생기를 주는 이야기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의 말은 우리가 새로운 백성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6.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 있는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구속의 원리' '통치의 원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라'의 개념은 '백성'이다. 그것을 증명해 보겠다. 요한계시록1:6 '나라'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나라인 동시에 교회이다. 이 편지를 쓴 요한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1:9)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예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주 예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라는 말은 '교회 밖에는 하나님 백성이 없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전자의 교회는 '지금의 교회' 즉 이 땅에 존재하는 실물 교회를 말한다. '아직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비 물질적인 나라 '천국'을 의미한다. 땅에 있지만 천국에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7.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다

  첫째, 교회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거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교제 혹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 역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왕이신 예수 아래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지역 교회의 교제를 형성하고 그 안 에서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이 세상에서 자유민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째, 지역 교회의 교제라는 상황 속에서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공적 영역에서 사랑에 의해 고무되어 '선한 행실' 혹은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덟째,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제자들이 그들의 소명에서 선교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홉째,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 사회복음, 그리고 해방신학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게 하기 위한 중요한 통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목적이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통로 이상은 아니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선한 일'이라고 포장된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다 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의 교화edification에 끼치는 영향으로 판단한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으나, 복음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이 아니다.

 

  8. 하나님 나라의 왕

  참으로 하나님은 왕이시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아들, 메시아, , 즉 왕이신 예수를 통하여 다스리신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하여 증거된다. 십자가에 달린 왕이신 예수가 십자가와 상관이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왕이신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교회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부르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예수를 제시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요 구주이신 왕 되신 예수께 항복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행을 행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예수가 알려지기 전까지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 아니다.

 

  9. 하나님 나라의 구속의 분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그것과 더불어 정의가 실현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며 지혜와 거룩함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의와 사랑이 완성되고 모든 적들이 없어지고 동물과 인간 사이의 긴장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구속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 사역에는 '사탄'이라고 불리는 영적 세력과 악한 권세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경우들이 들어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속은 영적이고 우주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구속은 통전적 구속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구속된 자들, 즉 구속되고 있는 자들과 구속될 자들의 교회라는 상황 속에서 통전적 구원을 제공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구속된 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런 종류의 구속을 제공하지 않는 그 어떤 사명도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 아니다.

 

  10.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 교제다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 백성, , 그리고 율법이다.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전 한 가운데 모세의 율법이 있었다. 율법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징을 이룬다.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예수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며 그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구속된 백성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도덕'에 달려있다. 예수의 도덕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진술은 마가복음 8:34절에 등장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이다. 두 번째는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 의는 선행의 삶을 의미한다. 의는 예수의 말을 순종하는 것을 요구한다. 의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만 하나님이 우선임을 의미한다. 마지막이 사랑이다. 이상의 세 가지 단어 "십자가, ,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교제의 특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정의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십자가와 의와 사랑이라는 특징을 지닌 공동체로서의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다. 또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예수께 바치고 "맘몬숭배", 즉 물질에 대한 숭배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11. 하나님 나라는 희망이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요소 4가지가 있다. 첫째 성도의 교제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교회의 성대한 교제가 있을 것을 희망한다. 둘째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심판은 하나님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와 잘못된 것을 끝장내시고 옳은 것을 세우시는 것과 상관이 있다. 그 심판은 징벌과 갱신을 포함한다. 셋째, 그 심판으로 인해 세상은 정의가 충만한 완전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이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인하여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희망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명 안에서 기쁨으로 가득 찬 영광에서 산다.

 

  12.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논지들

  1.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백성과 관련이 있다.

2. 하나님 나라는 왕, 통치, 백성, , 율법의 복합체 이다.

3.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 적이다.' 교회 역시 종말론 적이다. 즉 현재이자 미래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대한 교제다.

4.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이고,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이다. 이 둘은 동일하지는 않으나 같다. 이 두 가지 용어는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

5. 교회는 역사를 통해 콘스탄티누스의 유혹을 받아 왔다.(윤리화, 세속화, 장치화)

6. 사회복음, 해방신학 등 하나님의 선교가 정치적 영역의 포지션에 서는 잘못된 믿음을 따라 작동되기도 한다.

7. 그리스도는 세상을 살기 좋을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진 않았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왔다.

8.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모양을 닮는다. 십자가가 있는 예수여야만 한다.

9.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수가 구속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오직 구속을 얻은 사람만 하나님나라 일을 할 수 있다.

10.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성서가 '세상을 어떻게 정의하는 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1. 심판은 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

12. 하나님 나라 백성은 십자가를 닮은 의와 사랑의 삶이라는 특징을 지닌 교제를 나눈다.

13.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교회는 지역 안에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선한 일'을 하면서 세상에 개입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따라 산다.

14.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이다.

15. 하나님 나라의 일이 방생하고 행할 수 있는 장소는 지역교회뿐이다.

 

 

책에 대한 평가와 적용:

  내가 어떤 스타일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판단해 보면, 스키니진 스타일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맞다 나는 청바지 진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메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 것은 아마도 내가 스키니진 스타일 이었기 때문에 가능 했는지도 모른다. 스캇 맥나이트 교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읽으면서 '교회'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이제 곧 사역의 일선에 서야 하는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공부가 끝나면 먼저 기도부터 하자. 그것만 계획에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기쁨이었다. 교회에 대하여 생각을 더 심도 있게 하는 뇌관이 되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 나라' 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교회'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먼저 성도에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이었다.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 보다 더 좋은 공부 방법은 없다. 어떻게 적용하고 가르치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 책에서 '교회 밖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라는 부분이 충격적 이었다. 먼저 카피부터가 원색적이고 짜릿하다.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 백성이라는 해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통하여 완전하게 설득되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하나님 나라' '예수님 나라'된 자로서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요한의 고백이 감동이 되었다.

 

 그러면, 예수님의 환난과 예수님의 참음은 무엇인가? 그것을 나는 마태복음 25 34-49절의 말씀으로 이해를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지역교회로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교회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작은 소자'를 섬기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작은 소자가 '제자'를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성도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장하면 된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웃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적용하여 예배를 통하여 성도에게 이렇게 전달하였다.

 

 "여러분, 교회는 지역적인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동백두레교회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계시록 1 9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환난, 예수의 고난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네가 그 같이 하라' 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렸던 내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여러분들,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여러분이 했던 일이 있습니다.

 

천국 재판정에서 왕이 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러분 이웃의 환난이 예수의 환난입니다. 우리 형제의 고난이 예수의 고난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분의 외로움이 예수의 외로움입니다. 이웃의 배고픔이 곧 예수의 배고픔 입니다. 행하는데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집 앞에 슈퍼가 있으면 차를 타고 멀리까지 가지 마시고 그 슈퍼를 이용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주인을 사귀고 섬겨주십시오. 같이 살아야 하는 이웃입니다. 시내의 유명 헤어 디자이너 찾아가지 마시고 가까운 미용실에 가십시오. 그리고 그 이웃과 사귀십시오.

 

사실 저는,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것보다 이웃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실천하기 위해 아프리카 난민에게 매월 3만원을 보낸다 가정해 보겠습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3만원을 여러분 옆을 지나가는 동네 배고픈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는 것에 쓰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저는 교회란, 이웃을 위해서,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해외의 그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역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먼저 살피시고 섬겨주십시오. 옆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천국 열쇠를 소유한 사람들 입니다. 세상에서 힘내시고, 고개를 들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복 드립니다."[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나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를 주는 책이었다. 다시 한번 수 차례 정독하고, 정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1] 20160619일 동백두레교회 설교문 인용


 





하나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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