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누가 ‘진짜’ 주인공인지가 헷갈렸다. 첫 번째 후보는 신문사 기자이자 소설가인 ‘나’. 하지만 곧, 그는 서술자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후보는 내가 그토록 인터뷰 하고자 했던 현대음악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 이 작품의 제목인 ‘슬픔의 노래’ 가 그의 곡이기에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세 번째 후보는 작품 중후반부에야 제대로 윤곽을 드러낸 박운형.

극단에 소속되어 연극을 공부하고 있는 인물이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은 구레츠키와 박운형 둘 다 ‘진짜’ 주인공이겠지 라는 나만의 결론을 내려버렸다.

 

하지만 이 둘이 주는 의미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구레츠키는 인터뷰 중 나왔던 그의 말처럼 ‘살아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예술가이다. 특정한 행동을 통한 움직임보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과거보다 현재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겠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과거의 슬픔은 곧 현재와 미래의 슬픔이라고. 다만 그 슬픔의 형태가 다를 뿐이라고.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설가, 영화감독(혹은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구레츠키와 같은 작곡가까지. 많은 예술가들이 과거의 슬픔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덮어두고 묻어두기에는 그 상처들이 주는 의미와 깊이가 너무 큰 것이리라.

 

박운형의 경우,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해 전체적으로 맑아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가만히 보면 잔주름이 많고 그늘이 느껴지는 얼굴’ 이다. 이 한 문장의 묘사를 통해 그의 성격(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물론 내면에 숨겨져 있을 법한 부분까지)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연극을 하게 되었냐는 나의 물음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우연이죠 뭐’ 라는 싱거운 대답을 했던 이유, 새벽녘 스탠드 불빛 속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던 이유, 아우슈비츠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처음 물었을 때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더듬고 얼굴까지 창백해졌던 이유. 이 모든 이유가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어 소설 결말 부분에서 드러난다. 꽤 궁금했었다. 이 사람 대체 왜 이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박운형이 무대에 서서 외치던 그 소리는 소설 속 나에게만 ‘귀가 아니라 살에 닿는 느낌’ 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현실의 독자인 나에게도 그랬다. 지나치게 생생했고 그래서 너무 ‘두려웠다’. “유 기자님의 노래는 소설 아닙니까?” 라고 했던 박운형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연극이었을까..

 

 

 이 작품은 1980년. 따스한 봄날이었던 5월의 광주 학살을 내면에 숨기고 있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도 물론 광주 학살에 대한 어떤 메시지일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이 책을 덮는 순간 어떤 영화가 떠올랐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극장에서 한 번 보고, 집에서도 몇 번을 더 봤었다. 영화 속 많은 장면들과 생생한 피아노 소리가 내내 잊혀지지 않아서였다. ‘폴란드’ 라는 공통 배경 때문에 혹시나 해서 영화정보를 찾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영화 역시, 바르샤바가 배경이었던 것이다. 1939년의. 휠체어에 앉은 유대인을 베란다 밖으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던지는 장면, 총으로 무자비하게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떠올랐다.

 

무자비한 공습, 집단살해와 처형. 그 처참한 역사가 소설과 영화를 모두 접한 내 뇌리에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일 것이다. 구레츠키가 말했던 과거=현재=미래의 슬픔이라는 이야기가 또 한 번 생각났다. 잊을 수도 없으며 잊어서도 안 되는 기억들..

 

 뜻모를 떨림을 남긴 ‘슬픔의 노래’ 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대화들이 꽤 많이 나온 소설이라 생각한다.

 

 아우슈비츠가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침’. 축복 받은 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언어의 아이러니라고, 박운형은 말했다. 내 생각은 아주 조금 다르다. 따뜻한 빛을 뿜어내는 종이학이 모이고 모여서 이곳은 앞으로 축복 받은 땅이 될 것이다.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미래에는 반드시, 현실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19살 때 그랬듯이 이 소설을 읽기 전에도.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괜시리 꿈을 꾸어 보게 되는 시기. ‘스무 살’ 이라는 설레는 단어.

 

 소설 속 주인공은 너무나 평범하다. 큰 기대가 자칫 실망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작가 김연수가 노렸던 바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평범함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분명 짜임새가 있고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서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단막극 형식으로 펼쳐졌다. 내 삶과 일치하는 혹은 많이 어긋나는,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상황들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쉽게 번 돈이라 쉽게 써버리게 된다는 과외 아르바이트는 스무 살 ‘다운’ 첫 번째 생각.

그렇게 큰 돈을, 또한 그렇게나 쉬운 방법으로 벌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스무 살 이전에는 말이다. 21살이 되면 또 달라지겠지. 차츰 냉혹한 현실을 깨닫고 삶에 있어 금전적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면.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운명의 힘을 믿게 되었다고 하는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그리하여 뜨뜻미지근한 관계였던 여자친구에게는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고. 삶을 살아가다가 문득 어떠한 감정에 휩싸이는 경우에도, 스스로는 한걸음 물러선 채 어떠한 힘의 손길을 기다리는 자세를 취한다. 스무 살이다.

 문학 평론책을 읽고 시를 쓰는 정신적 여유로움 속에서 경제적 궁핍함을 (어찌보면, 드디어?) 느끼게 된 그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들을 경험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어떤 ‘녀석’ 과 함께 했던 아동복지회 바자회 도우미 일이 어떠한 전환점, 새로운 사건과 변화를 만들어 주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아니다. 어쩌면 재진이라는 그 친구 역시 ‘스무 살’ 에 만나고 겪었던 많은 사람들 중 단지 한 명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26살이 된 ‘나’ 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6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주인공은 스무 살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의 소식을 하나둘 씩 듣게 되고, 혹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 나도, 그 사람들도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많은 것이 변화했다. 그것은 꼭 긍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전과는 다르게 너무 멀어져버린 사람들’ 의 느낌을 받게 되므로.

 스무 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 역시 나의 스무 살 시절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말처럼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21살이 아닌 ‘스무 살 이후’ 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 말에 동의하며,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지금, ‘스무 살 이후’ 에 속하는 삶을 살면서 말이다. 내가 스무 살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무언가가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