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하셨습니다.” 소설의 첫 구절. 당직 수련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지극히 무덤덤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이 한 문장의 말은 화자인 ‘나’와 겹친 채 머물러 있다.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한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울지 않는다. 동요 하지도 않는다.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올 것이 왔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에게 있어 아내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 아니,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휴대폰이 배터리가 없어 ‘죽는’ 소리와, 아내가 숨을 거둘 때 심전도 계기판이 들려 주었던 ‘죽는’ 소리를 같은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결코 중요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런 하찮은 소리’ 에 불과하다. 그 뒤로도 빈소에서의 일, 회사 업무 등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 내내, 화자의 감정은 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3 이라는 번호가 붙은 단락에서, 나는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화자가 바뀐 줄로만 알았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갑작스런 어떠한 인물의 내면의 감정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주인공, 화자는 한 명이었다. 앞에서 쭉 마주해왔던 ‘나’. 아내는 잃은 나. 내 눈은 여전히 그의 생각들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이렇게도 감성적이고 구구절절 가슴 시린 듯한 문체로 바뀌어 버린 것은.

 

사실 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없다. 있다면 단 한 가지, 아내의 죽음뿐이다.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사건과, 주인공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서술의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서술들 속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화자의 두 가지 모습인 것 같다. 아내의 이야기를 할 때와 추은주의 이야기를 할 때 판이하게 다른 어투를 보면서 이 상반됨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추은주에게, 감히 겉으로는 비춰보이지 못할 애틋한 감정을 느끼면서 ‘나’ 는 혼자의 생각으로만 그 감정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 소설의 제목 ‘화장(火葬)’. 한글 옆에 한문이 적혀 있다. 제목의 뜻을 잘 파악하라는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책을 끝까지 읽은 뒤 내가 했던 생각은 한 가지였다. ‘화장(化粧)’ 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도 제목을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눈에는 한없이 여리고 고와보였던, 그리고 또 한없이 애틋했던 추은주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신경숙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었음에도, 사실 작가가 택한 소재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여 장에 달하는 소설을 끝까지 읽은 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데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 와 ‘당신’ 으로 표현되는 두 인물. 편지를 쓰고 있는 자 그리고 편지를 받게 될 자. (결국 받지는 못했지만) 이 두 사람이 주는 미묘한 느낌에 편지글 형식의 문체가 더욱 더 묘하게 와 닿았다.

시종일관 한 마디 한 마디를 망설이는 듯한 화자의 목소리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현재의 감정, 과거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 속의 망설임이 여과 없이 나에게까지 침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떠나 버린 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여자를 동경했다. 그 여자처럼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훌쩍 커서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여자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은 떳떳하지 못한 음지 속의 그림자이며 밝거나 환하지 못한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다. 결국 ‘당신’ 과의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한 마음과 발걸음이 그랬을 것이다.

 

풍금이란 뭘까? 나도 초등학교 4~5학년 때까지는 교실에서 풍금을 사용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추억일 뿐이다. 그 교실 한 구석은 이제 풍금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있던’ 자리일 뿐이다.

신경숙씨가 말하고자 하는 풍금은 과연 누구일까? 처음에는 화자의 어머니일거라 막연히 추측했었는데, 한편으로는 그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어머니와 비교하자면 여자는 풍금보다는 화려한 서양의 피아노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린 시절 화자의 기억 속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아주 조금 달랐다. 눈물에 분이 밀려나 얼룩진 그 얼굴. 어쩌면 지금의 ‘나’ 는, 웃을락 말락 했으나 결국엔 한숨을 포옥 내쉬고만 여자의 얼굴을 풍금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어느 쪽이든, ‘있던’ 자리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지만.

불륜이라는 소재가 주는 약간의 불편함이 묻혀 버렸다.

안녕. 이라는 짤막한 마지막 한 마디에..

 

그리고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겨, 서문을 한번 더 읽었다. 암컷 앞이 아닌 코끼리거북 앞에서 우아한 날갯짓을 하며 사랑을 고백했던 그 수공작새. 그리고 ‘그 시기’ 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 오리. 그 여자와 화자가 겹쳐 보인다. 수공작새와 오리가 겹쳐 보인다.

이 소설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정한 ‘존재’ 란 무엇일까?

30페이지 남짓한 이 단편소설은 최초의 초점을 해고에 맞추고 있다. 그것은 소속감 부재의 상태이다. ‘내’가 회사에서 해고 당한 후의 온갖 생각과 감정들에 온전히 작품을 내어주고 있다. 오죽하면 은행나무와도 눈이 맞았을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행이라는 공을 따라갔던 나는 이제 무언가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앞에 있던 목표물이 사라진 상황, 부재.

 

그 뒤 초점은 페루로 옮겨간다. 아니 어쩌면 한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초점이 움직이면서 소설은 보다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존재’ 의 문제를 찌르고 있다. 담배, 뒤퐁 라이터, 그리고 마추픽추 칵테일까지. 남자와 나 사이의 수많은 존재들은 나에게 통증을 가져온다.

처음 까페에 들어갔을 때 잔을 비우면 자리를 뜨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을 지우게 되는데, 여기에는 통증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힘은 또 다시, 옛날의 ‘그’ 에게 전화하게 되는 힘을 전달해 준다.

 

이 모든 일은 마치 처음부터 준비해 왔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너무나 고요하고 자연스럽게 장면들이 전환되고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나 역시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자체에만 몰입하게 되었는데,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는 그 자연스러움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문점은, 바로 제목에 관한 것이었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라는 짤막한 한 문장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처음에는 막연히 주인공이라는 존재에 대한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이 왔고, 마지막에는 까페 이름과 그림 제목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소용돌이에 휩싸인 땅. 그 땅 위에 발을 붙이지 못한 채로 서 있는 존재. 그리고 이 그림을 봤을 때 철렁하던 나의 아랫배. 이것은 또한 서랍 속 새들로까지 이어진다.

소설 속 주인공 ‘나’ 는 지극히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해고 당한 모습은 결코 현실과 멀지 않다. 그래서 좀 더 거리낌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스스로의 선택이었지만) 모습, 까페에서 그와의 대화 속에 변해가는 마음까지. 마치 나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인 것처럼 확실하고도 간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화와 작가의 서술이 구분 되지 않는 (“ ” 가 없는) 서술 방식 역시 이러한 몰입을 좀 더 수월하게 해준 것 같다. 따뜻한 봄, 무겁지 않은 봄바람이 불 때 조금은 묘한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