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저녁때 방영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침 7시 50분에 시작되어 8시 25분에야 끝난다. 나는 출근을 좀 늦게 하는 편이지만, 시작하는 부분만 조금 보고서 출근길에 나서야 하니 매번 아쉽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 동안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면, 난생처음 보는 그들이 괜히 친숙하고 애틋하다. 그런데 5일분을 모으면 3시간 남짓 되는 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제작진과 출연자가 들이는 시간은 20일 이상이란다. 그렇게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수많은 시간이 모여 이 감동적인 프로그램이 태어난다. 그런 <인간극장>의 방송작가였던 고수리 작가가, 누구나 '가장 평범한 주인공'일 수 있는 사람을 향한 다정한 시선으로 써낸 글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2016, 고수리 지음, 첫눈 펴냄)이다.

저자는 몇 년간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해봐야겠다'(9쪽)고 생각하고 방송 판에 막내 작가로 들어왔단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를 읽고 있노라면, 이렇게 쓸 말이 많고 이렇게 좋은 글을 지닌 저자가 어떻게 작가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 '고작가'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의 아픈 기억들이 저자의 글에서는 달빛에 비친 풍경처럼 아련해진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날에는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피난을 떠나야 했는데, 엄마는 그것을 '밤의 피크닉'이라고 부르셨단다. 좁은 차에서 밤을 새우려니 춥고 피곤하고 두려웠지만, 어려움을 지내고 난 지금은 추억이 된다. 결국 부모님이 이혼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속셈학원과 주점을 운영하고, 저자는 전남 익산으로 전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남동생도 어딘가에서 따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겪었단다. 그렇게 전학하기 전 친구들과 함께 보낸 송별식의 따뜻한 기억이 편지와 함께 여전히 남아 있고, 혼자서 꿋꿋이 살아가며 아이들을 키운 어머니의 강고함은 저자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으리라.

어디서나 빛나고 우수한 태양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달빛처럼 느리고 약한 존재로서 쓸쓸함과 외로움이 그의 글 여기저기에서 묻어나지만, 그 덕분에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더 따뜻한 눈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듯하다. 부담스럽지 않게 밤길을 비춰주는 달빛처럼 말이다.

이제 전업 작가이니, 달빛 같은 담백함과 깨끗함을 지닌 그의 글을 더 자주 만나기를 바란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는 조카를 축하하며, 이제 중학생인 딸내미를 얹혀 유럽 여행을 보내주었다. 패키지 여행이고 많이 길지 않아서 돈 외에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었다. 이렇게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패키지가 아니라, 일정과 경로, 숙소까지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자유 여행이라야 진정한 여행일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외국 여행에 대한 정보가 적어서, 요즘은 반대로 정보가 너무 많아서 헤매기 일쑤다. 그렇게 준비할 정성과 노력과 시간이 내겐 없었기에, 아이들을 패키지 여행으로 보낸 것이다. 이번 여행으로 오랜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보고 외국을 둘러보았으니, 적어도 여행에 대한 공포는 없겠지 위안할 따름이다.

그런데 <엄마 떠나길 잘했어>(2016, 박민정, 변다인 지음, 마음의숲 펴냄)는 41살 엄마와 17살 딸이 본격적으로 1년간 세계를 자유롭게 다녀온 기록이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협찬을 받아 풍요롭게 럭셔리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싼 데서 자고, 맛있는 음식은 기대하지도 마. 너 다이어트도 할 겸 하루 두 끼만 먹어"라고 다짐을 받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예산 숙소에서 밥을 해 먹으'려고 전기 쿠커를 들고 다니며, 딸아이가 초콜릿을 사 달라고 졸라도 매번 사주지 못하는 긴축 여행을 보여준다. 한두 달도 아니고 무려 1년이나 되니 긴축할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었다.

이 책은 러시아로 시작해서 브라질까지 유럽 일곱 나라, 중남미 여덟 나라를 여행한 기록이다. 엄마의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가 함께 나와 있어서, 여행을 함께하는 두 사람에게 세상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지는지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엄마는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책임이 있어 보였고, 딸은 통역과 그림을 맡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고 느꼈다. 둘이어서 부딪힐 때도 많지만, 둘이어서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이들의 모습이 좋았다.

참 다양한 위기에 부딪혀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이미 두 차례나 세계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를 믿고, 엄마는 아이를 끌어줄 수 있었겠다.

학원 다니느라 잠잘 시간도 부족한 고등학생이 책가방 대신 배낭을 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보다는 부담이 적었겠지만, 아이를 잘 끌어주고 보살피는 책임이 있으니 이렇게 긴 여행을 마음먹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이 여행한 동안 세상은 이들을 기다리지 않고 학교는 학교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움직였겠지만, 이들은 1년 동안 멈춰 있던 것이 아니라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다. 인생에서 엄마과 1년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중한 경험이니, 다인 양이 참 부럽다. 이 책에는 유럽과 중남미만 나왔는데, 조만간 아시아와 아프리카도 나오겠구나 기대한다. 부러워하면서 지켜본다.

돈은 모으기는 참 어렵지만 날리기는 순식간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2016, 이은대 지음, 슬로래빗 펴냄)의 저자도 그랬다. 대기업에서 10년간 일하면서 집도 사고 차도 샀지만, 회사를 나와 사업한 지 6개월 만에 모든 것을 날렸다. 채무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알코올에 빠졌고, 빚을 갚지 못해 결국 교도소에 다녀왔다. 출소한 후 막노동을 하며 산 지 2년이 가까워진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악몽과 같은 상황을 거쳐온 것이다. 자살을 생각했던 그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글 쓰기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일기와 독후감 쓰기가 숙제였다. 일기를 써서 제출하면 담임 선생님이 검사 도장과 함께 코멘트를 달아주기도 했다. 아이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요즘은 일기 제출을 거부하는 일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다닐 때는 그랬다. 일기는 이론상으로는 매일 글을 쓴다는 점에서 참 바람직한 습관인데,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이라는 외부 시선이 개입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적지 못하기도 한다는 단점이 있다. 글은 자신에게 정직해야만 상황 정리와 자기 반성과 자아성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의 저자는 저처럼 혹독한 상황에서 글쓰기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를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새신랑의 심정'(4쪽)으로 글쓰기를 소개한다. 그 자신의 삶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힘이 되었는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마음과 관점과 생활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살기 위해 글을 선택한 절박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글쓰기는 참 정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구의 눈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세상을 관찰하고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을 뚜렷하게 그려내는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를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힐링 방법이 있지만, 글쓰기는 힐링과 문제 해결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유명한 <시크릿>에서도 무의식의 힘을 부각해서 꿈을 이루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글쓰기로 데뷔하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삶의 행복을 누리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힘겨운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허황된 미래에 홀리지 않고,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만들어서 미래를 만들어나가려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글쓰기에는 비법이 없으니 매일 꾸준하게 쓰고, 글쓰기를 방해하는 핑계들을 이겨내라고 한다.

글을 잘 쓸 자신은 없다. 그래야 할 절박함도 아직은 없다.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쓰다 보면 나를 들여다볼 용기가 생길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