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 님을 처음 만난 것은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에서였다. 세상에 가득한 사랑에 대해서, 그 사랑의 각 단계에 대해서 세상의 고전들이 묘사하고 있는 바를 들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였다. 아주 흔하고 일반적인 상황도 인문 고전의 조명을 받으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여자의 문장>(2016, 한귀은 지음, 홍익출판사 펴냄)은 그 시선을 넓혀서 '여자의 삶' 전체를 책과 함께 바라본다. 책 표지에 있는 부제 '책 속의 한 문장이 여자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라는 말은,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간서치'였다고 고백하는 저자처럼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공감할 만한 문구일 테다.

그 '여자의 삶'은 행복, 관계, 위기와 회의, 사랑과 이별, 나이 듦, 여자의 물건, 숙명이라는 일곱 파트로 나뉜다. 가장 먼저 나오는 '행복'을 보자. 편안과 안정, 성취와 소유가 아니라 저자는 '실험'이라는 단어로 행복을 규정한다. '삶에도 행복이 필요하다'라는 설명이다. 같은 이름의 꼭지에서는, 어렵거나 불안한 상황이 닥쳤을 때 '체험 학습'을 하듯 실험해보라고 권한다. 너무 진지해서 그 문제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 학습처럼 조금은 가볍게 다가가면서 자신을, 또 상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내용과 관련된 문장으로 어느 책의 어떤 대목을 꼽았을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었고, 낙타는 사자가 되었으며, 사자는 아이가 되었는가를'이라는 문장을 이야기한다. 강박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진정한 내 모습을 찾는 데는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작은 실험을 하라는 권유다.

저자가 인용하는 것은 책만이 아니다. <꽃보다 누나> 같은 케이블 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밀회> 같은 TV 드라마,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같은 노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영화까지 다양하다. 이런 다양함은 여섯 번째 파트인 '여자의 물건'에서 극대화된다. 베개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저자와 니체의 두통을 이야기하고, 담배 이야기에서는 대학생 시절 시를 쓰고 담배를 피우던 아름다운 여학생의 추억이 버지니아 울프에게로 넘어가서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한다.

사랑하고 행복하고 위기를 겪고 회의하고 이별하고 아이를 키우고 나이 드는 삶. 그런 단계들에서 책과 함께할 수 있다면 삶은 참 풍요로울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28살이던 1845년에 월든 호숫가로 가서 통나무집을 짓고 2년 2개월간 자급자족하며 생활했다. 그때 쓴 <월든>은 한때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세계의 고전으로 널리 읽힌다. <당신이 숲으로 와준다면>(2016, 김용규 지음, 그책 펴냄)을 읽으면서, 그런 숲 속 철학자가 우리에게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숲을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배경으로 있는 표지는 숲에서 초록색이 옮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초록색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초점은 숲이 아니라 그 안을 날아가는 새에게 맞춰져 있다. 자유로운 존재.

<당신이 숲으로 와준다면>의 저자인 김용규 님은 많은 것을 내려놓고 가족 없이 혼자서 숲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을 짓고 '백오산방'으로 이름 붙인 다음, 명이나물 농사를 짓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강연을 다니고, 글을 쓰고, 숲 학교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더 많은 재산,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높은 지위를 좇는 세상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서는 것은 보통 결심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말처럼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라는 말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나라에서 말이다. 

이 어려운 결심을 하고 숲으로 들어갔지만, 그의 마음에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음의 지주가 되어준 스승님과의 이야기가, 이제 그 자신이 스승이 되어 사람들을 이끄는 바탕이 되는 성장과 교대의 순리를 보게 된다.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는 것, 숲에 사는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돕고 순환하며 살아가는 것이 글에서 잘 드러난다. 눈이 와서 길이 막히면 길을 트기 위해 눈을 끝없이 치우면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으로 삼는 것, 어떤 애벌레는 잎을 군데군데 갉아 먹고 어떤 애벌레는 가장자리부터 먹는지 궁금해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자연의 신비에 대해 다시 한 번 배우는 것, 도토리 하나가 싹을 틔워 거대한 참나무 숲을 이루듯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생태적 각성을 하는 것. 숲에서 배울 것은 대단히 많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삶과 절대 떨어져 있지 않은 죽음, 안락함 대신 '들개로 사는 시간'을 택한 그의 이야기에서, 나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자유와 강인함과 풍요를 본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주시는 숲의 푸른 바람을 느낀다. 이제 좀 숨이 트인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하면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유명한 톰 리플리가 자동적으로 떠오를 정도로, 범죄와 추리 소설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30살이던 1951년에 에드거상 신인상을 받았고, 이후 여러 나라에서 탐정소설과 추리소설에 관한 상을 받았으며,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 50인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단다. 추리소설의 최고봉에 올랐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캐롤>(2016,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그책 펴냄)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초판은 1952년에,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과 'The Price of Salt'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저자 수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쓰인 지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성과 여성의 사랑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그 얼마나 앞서 가는 작품이었나 싶다. 남성과 남성의 사랑 이야기는 그리스 시대부터 묵인되어왔지만, 여성과 여성의 관계는 여전히 용인되기 어렵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다른 작품과 너무나도 다른 <캐롤>을 보자. 이달 초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책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여성과 여성은커녕 남성과 남성의 사랑조차 허용하기 어려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프랜켄버그 백화점은 크리스마스 대목을 맞아 붐비고, 테레즈는 이제 일주일째 7층 인형 코너에서 일하고 있다. 무대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하지만 경력이 없는 그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생계를 위해 이 백화점에 근무할 수밖에 없다. <캐롤>의 첫 장면은 프랜켄버그 백화점의 직원 식당이다. 테레즈는 혼자서 초조하게 점심을 먹으며, 백화점의 규칙을 담은 사규집을 들춰본다. 15년, 25년 근속할 마음도, 자신도 없는데도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테레즈의 코너에 캐롤이 온다. 테레즈는 '회색으로 무채색이나 불꽃이 일듯 강렬'한 캐롤의 눈동자에 붙들리고, 캐롤은 테레즈에게 다가와 딸아이에게 보낼 인형을 고른다. 그것이 테레즈와 캐롤의 시작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조합에? 테레즈가 캐롤에게, 캐롤이 테레즈에게 어떻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차근차근 다가가고 긴장하고 안도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허전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남녀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선정적인 부분 하나 없이, 생활에서 벗어나 '사랑밖에 난 몰라' 하지 않고 살면서 사랑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사랑은 삶의 희망이자 버팀목이다. <캐롤>을 읽으며 다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