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이 연필을 잡는 손 힘을 기르고 숫자를 익힐 때 점 잇기를 많이 시켰다. 예전에 잠깐 학습지 방문 교사를 할 때 이 단계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간단한 직선 그리기에서 시작해서 곡선 그리기, 교차하는 선 그리기 등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 대견했다. 그런 교재는 주의력이 워낙 짧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알록달록한 배경이 있다. 그래서 점을 이어 선을 긋지 않아도 어떤 그림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점잇기 & 컬러링북 : 세계 불가사의 편>은 커다란 종이에 숫자만 1부터 1,000까지 빡빡하게 쓰여 있을 뿐이어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A5 메모 패드와 비교하면 이 책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이 무려 1,000개나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크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이 숫자는 점을 잇기 위한 도움일 뿐, 그림에서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 아주 조그맣다. 100개 단위로 색을 달리해서 표현했지만 노안이 시작된 내게는 다음 숫자를 찾는 것이 꽤 큰 일이었다.

책에는 총 20가지 불가사의가 실려 있다.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으로 시작해서 영국 스톤헨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미국 그랜드캐니언, 멕시코 치첸이트사까지 인공 건물과 자연까지 다양하다. 정말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그중에서 감을 잡을 수 없는 작품을 골랐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선을 그어야 하니 책은 한 장씩 떼어내기 쉽게 점선 처리가 되어 있다.

되도록 반듯하게 선을 긋고 다음 점을 찾으면서 점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니 큰 틀을 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1,000까지 다 잇고 나서 한 걸음 떨어져 보니 풀이 무성한 곳에서 작은 배를 저어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나와 있었다. 남미의 아마존이었다. 컬러링까지 하면 더 멋진 작품이 되겠다.

1부터 1,000까지 손을 떼지 않고 그릴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 시간이 금세 간다. 같이 들어 있는 컬러링북은 점 잇기가 이미 되어 있어서 컬러링에 집중할 수 있다.

점 잇기 & 컬러링북은 이번에 한 세계 불가사의 편 외에도 인물, 동물, 도시, 명화 편이 더 있다. 그중에서 명화는 직접 그려보면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눈은 좀 아팠지만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집에 온다. 배가 고프다. 밥통을 열어 찬밥을 푸고, 김치와 젓갈과 장아찌와 햄 정도로 밥상을 차린다. 내가 음식을 못 하니 밑반찬과 인스턴트 말고는 기대하지 못한다. 요즘은 인스턴트도 다양할뿐더러 배달 음식이 지천이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천국이다. 맛있는 것도 좋지만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인 사람.

그런데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 토마토를 썰어서 소금을 친 다음 10분 기다릴 수 있는 사람, 한밤중에 가지에 칼집을 넣고 맛국물에 끓여 가지절임을 만드는 사람, 집에 레몬이 떨어지면 묘하게 서운해하는 사람.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2016, 히라마스 요코 지음, 씨네21북스 펴냄)의 저자다. 책 날개에 쓰인 저자 소개를 보면, '도시형 슬로 라이프의 전파자이자, 자신만의 흐름을 따르는 살림의 고수'라고 쓰여 있다. 미식가, 푸드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 파인다이닝에서나 만날 수 있는 요리들이 아니라, 앞에 쓴 것처럼 토마토, 가지, 레몬 같은 소박한 재료들로도 충분한 맛과 여유를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 자그마한 책은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집에 있고픈 날에는, 나만의 맛을 만든다, 새 바람을 불어넣는 법'이라는 네 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손이 많이 가지 않으면서도 에너지를 충전하고 한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요리들이 소개된다. 매실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답게 우메보시를 이용한 요리들이 눈에 띄고, 주먹밥과 된장국, 맑은장국은 괜히 반갑다. 2장에는 요리뿐 아니라 유리컵, 가타쿠치, 틴케이스라는 소품들도 등장해서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요리의 마지막은 플레이팅이라는 점을, 요즘 한창 진행 중인 '마스터셰프 코리아'에서 느끼고 있다. 저자가 소개하는 유리컵은 상큼함과 청결함으로, '액체를 따를 수 있게 한쪽으로 귀때가 난 그릇이나 술병'(82쪽)이라는 가타쿠치는 삶의 여유를, 틴케이스에서는 비우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식이다. 3장 '나만의 맛'에서는 더 단순해진다. 단무지는 써는 방법을 달리하는 것으로도 새로운 느낌이 되고, 그가 아끼는 레몬을 짜는 착즙기는 그 나름의 멋으로 소중해진다. 여기에 행주와 칠그릇이 합류하고, 가장 단순한 것은 생수다. 마지막 4장도 3장과 비슷한 느낌으로 주방의 여러 가지 면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이 책 제목을 보고 요리책이라고 생각했다. 레시피가 동반된 꼭지도 많지만, 번잡하지 않다. 가장 마지막 꼭지인 '질그릇'에서는 음식뿐 아니라 시간까지 읽어낸다. 가타쿠치와 절임통에서는 일본 문화가 물씬 풍기고, 뱅쇼와 프로슈토에서는 유럽의 향기가 느껴진다. 부엌에서 삶의 온기는 시작되고, 아주 작은 것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부엌과 이런 글이라면 물 한 잔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회사에서 한겨레21이라는 주간지를 정기 구독하는데, 이슬람 난민의 이야기가 특집 기사로 5주 연재되었다. 정치와 사회 뉴스를 보면 한숨만 날 뿐이어서 멀리했더니, 난민의 규모와 정도가 그렇게 큰 것을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탈출한 사람들은 그나마 탈출 비용을 마련할 경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용 문제로 가족이 생이별하고, 브로커에게 걸려 돈만 뜯기는 일도 다반사며, 탈출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그렇게 어렵게 탈출해서 유럽에 도착해도 이들을 반기는 나라는 없고, 내전 중인 세 나라 출신이 아니면 국경을 통과할 수 없다. 독일이 난민에게 문호를 개방했다고 해도, 독일까지 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라, 이들의 심각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TV 뉴스에 나오는 자료 화면과 숫자일 뿐,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먹고살기 바쁜 우리 문제에 신경 쓰느라 그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정치와 종교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문제이며,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새로운 계급투쟁'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계급투쟁>(2016, 슬라보예 지젝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에서 말이다. 현상은 당장의 정치와 종교 대립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그들을 조종하는 세력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글로벌 자본주의'이고, 현재 세계는 지배계급과 하층계급이 엄연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좌파, 종교, 신적 폭력, 마르크스주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 IS 등 다양한 현상과 함께 다양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든다. 그러면서 계급투쟁은 "유일한 준거이자 다른 모든 투쟁을 아우르는 의미의 수평선이 아니라, 여타의 적대를 '등가의 사슬'로 연결함으로써 지극히 '모순적인' 다양한 방식을 해명해주는 구조화 원칙"(73쪽)으로 종합한다. 그런 다음 페미니즘 투쟁을 예로 드는데, 페미니즘 투쟁은 한편으로는 해방을 위한 진보적 투쟁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중상위 계층이 하층계급의 '가부장적 권위와 비관용적 자세'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이데올로기 도구로 악용'된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종교적인 단체인데, 지주와 소작농 사이를 분열시켜 계급 봉기를 일으키는 것도 이와 같은 노선이다. 이처럼 타인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단순하게 관용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투쟁하자고 말한다.

나는 사실 이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주석을 제외하면 100페이지 겨우 넘는 작은 책인데도, 수없이 나오는 철학적인 개념들에 치이고 유럽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하지 않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저자의 모습을 느꼈고, 아메리카의 인디언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들, 이슬람의 명예살인에 희생당하는 여성들 등 다양한 존재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큰 시야에 감탄했다. 다시 차근차근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