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안 되면 어때. 또 그냥 그래도 사는 거지. 왜 계획 없는 여행처럼 말이야.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거야. 버스를 타고 가는데 펑크가 났어. 그럼 걷는 거야. 걷다가 지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그러다 힘이 나면 다시 걸어. 배가 고프면 아무데나 들어가서 눈에 띄는 걸 먹고. 재수 없어서 배탈이 나면 병원에 갈 수도 있고, 가게 한쪽에 쪼그리고 않아 배를 움켜잡고 한없이 앉아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심심하면 다시 걸어. 걷는데 저쪽에서 버스가 오면 올라타. 올라탔는데 아까 탔던 버스의 승객들이 이 버스에 있는 거야. 분명히 행선지가 다른데. 그런데 또 펑크가 나. 문득 시계를 봤는데 아까 펑크가 났던 시간에서 멈추어 있는 거야. 그럼 생각하겠지. 어떤 시간이 진짜이고 어떤 시간이 가짜일까.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 p. 98~99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생애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이는 가족이고, 가장 큰 슬픔을 주는 이도 가족이라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공감이 가는 말이다.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은 총 10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져 있다. 10편 모두 가족과 관련된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소재라는 것이 참으로 자극적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최악의 상황들만 모아놓은 듯하다. 이혼 가정은 기본이고, 미혼모에 성적 폭행이나 우울한 병까지. 모두 다른 내용의 단편소설인데 자꾸 앞 장의 소설과 연결이 되는 듯한 기분은 어쩌면 이런 어두운 소재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왜 이렇게 불행하고 극단적인 가족 모습만을 그렸을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사실 대체적으로 아주 지루하다 싶을 만큼 평범하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큰 병을 얻거나 가정의 평화를 뒤흔들 만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일들은 살다보면 그리 빈번하지 않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만 가득한 일상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 아닐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서로에게 무조건적이기를 바란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바라고, 용서를 바라고, 책임을 바란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특히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유난히 애착을 가지는 우리는 그 정도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항시 불행을 껴안고 살면서, 행복한 척 애를 쓰면 살아가는 이들이 아주 많다.
10편의 단편소설 중 유일하게 두 번 정독을 한 소설은 이 책의 제목을 가진 '퀼트, 퀼트'였다. 사실 다른 소설에 비하면 그리 무거운 내용은 아니었다. 치매성 병을 앓고 있는 아내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다. 아내는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의 모습이 모두 낯설고, 이상하다. 그리고 점점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어가고, 잊어간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치매성 병을 앓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가족 대부분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분명 처음에는 정말 사랑해서,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고, 사랑해서 키웠고, 사랑받으면서 자랐고, 그래서 사랑했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그 기억을 잊고, 그들을 낯설어 하고, 자신이 했던 말도 잊고, 행동도 잊고, 가족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꿈꾼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그런 가족의 모습. 하지만 이 책에서 다뤘던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듯한 극적인 소재들처럼 그런 장면도 드라마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드라마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막장 드라마에 나올 만한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따사로운 빛이 비춰지는 그 삶도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