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꽃이름이 뭔 줄 아세요? 하늘말나리예요. 진홍빛 하늘말나리는 꽃뿐만 아니라 수레바퀴처럼 빙 둘러 난 잎도 참 예뻐요. 다른 나리꽃 종류들은 꽃은 화려하지만 땅을 보고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서 핀대요. 어쩐지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모양 같아요.

-p. 32

 

 

김유정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걸 알았을 때, '아,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이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면인 소년과 소녀가 흐드러진 동백꽃 밭에 넘어지는 장면을 읽었을 때는, 마치 내가 그곳에 있었던 듯 고만 정신이 아찔하곤 했다. 하지만 동백꽃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나만의 꽃을 만들어서 상상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나 친절하게도 동백꽃의 사진까지 실어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강나무 사진이다. 이 책을 읽고 동백꽃을 다시 읽지는 않았지만, 다시 읽게 된다면 수십 번을 읽었던 그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받은 꽃의 해석이 있다면 바로 신경숙 작가님의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장미에 대한 해석이다. 3번을 정독한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소설을 읽으면서 의미를 크게 부여했던, '장미'를 보게 되어 내가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과 비교해볼 수 있었다. 항상 꽃을 심으라고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떠났을 때, 그 꽃을 보면서 엄마를 떠올리는 건 가슴 아프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이 책의 저자는 신경숙 작가가 엄마의 존재를 장미로 표현한 것은 장미가 흔하디 흔해서가 아니라, 누가 뭐래도 꽃 중에 가장 최고가 장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아차!'싶었다. 맞다. 평소 화려한 이미지가 강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장미였는데, 그것이 꽃 중에 최고라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도, 고백 받을 때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꽃이 장미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우리에게 엄마가 그런 존재라는 것도 난 미처 몰랐다. 

 

이 책에는 유난히 풀꽃이 많이 나온다. 민들레, 팬지 같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을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나오는 팬지, '봉순이 언니'의 나팔꽃은 기존에 익숙한 꽃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능소화나 배롱나무 꽃처럼 전혀 몰랐던 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생김 때문에 해당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소설 중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 많았다. 저자의 바람대로 나는 이 책에서 소개된 소설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그 내용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각 작품에서 소개된 꽃과 그 의미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미 읽었던 소설에서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꽃의 의미까지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그저 꽃을 소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해당 소설을 다시, 새롭게 읽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가끔 외롭거나 울적하다고 생각되면 에펠탑 앞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곳에 가면 사진을 찍으며 온갖 포즈를 취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뭔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손에 쥔 듯이 환한 표정을 하며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파리라는 도시가, 그리고 이 도시를 상징하는 에펠탑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그들에게 로망과 열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p. 175

 

 

갓 수능을 끝내고 열병처럼 앓았던 첫사랑 그대가 떠났다는 그곳은 프랑스였다. 꽤나 고난했던 시간들을 보내고 내 안에 남아있던 끈질긴 숙제 같은 것은 그곳에 가는 것. 그대가 갔던 장소에 가서, 그대가 본 하늘을 보고, 그대가 삶이 고단할 때 걸었던 거리와 마셨던 커피를 마시고, 혹시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 순간 그대 주변을 에워쌌던 그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래야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그것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추억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던 탓이었는지, 그만한 용기가 없었는지 갈 수 있었던 기회들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살았다. 이제는 프랑스는 그저 꿈에서나 보았던 그곳과 별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서점에서는 항상 프랑스 여행 책자를 뒤적이곤 했다.

프랑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파리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로망일 것이다. 파리를 주제로 하는 책은 굉장히 많다. 오로지 여행 정보만을 담은 책이나 추억과 감상을 주로 담은 에세이와 같은 책. 둘 중 어떤 책이 여행 책에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그마다 장점은 있다. 이 책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가 3년간 파리에서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새롭게 알게 된 것들과 또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만한 여행 정보나 재래시장 정보들은 언젠가 그곳에 간다면 꼭 이 책을 들고 가보고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언젠가 책에서 프랑스 인들은 영어를 할 수 있으면서도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일부러 영어를 못하는 척한다는 걸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이 어쩌면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나 생각했었다. 그때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이 책을 읽고 변하게 됐다.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뿐만 아니라 존경하고 예우한다는 그들의 마인드는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첫 번째가 아닐까 싶다.

올해 나의 가장 큰 목표는 그곳으로 떠나기. 잠시 안일해졌던 나의 신년 계획을 이 책은 다시 일깨워주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여전히 내 안 저 깊은 곳에 있는 그대도 마음이 외롭거나 울적할 때면, 에펠탑에 나간다고 했던 이야기를 건너건너 들었다. 빈번하게 에펠탑 앞으로 간다고. 그대가 그곳에서 떠올리는 것이 나는 아닐테지만 이제는 좀 괜찮을 듯하다. 누구나 그곳으로 가는구나, 싶었으니까. 그대가 그곳에서 나를 떠올리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대가 그곳에서 맡았던 냄새와 보았던 것과 느꼈던 것만 나 또한 느낄 수 있다면 괜찮다. 어서 이 책을 가지고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젊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 p. 201

 

 

김연수라는 작가를 굉장히 좋아한다.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황순원 문학상에서 '달로 간 코미디언'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고, 그에게 빠져 한동안 '꾿빠이 이상'과 '스무살'을 읽으며 어떤 때는 그가 정말 좋아서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 이후 그가 써내는 글들을 빠짐 없이 숨가쁘게 읽어댔다. 지금까지 그의 소설과 글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때를 잘못 만났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나 지금 많이 후회하고 있다.

지금 내게 이 책은 마치 독약과도 같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일이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한동안 일이 바빠서 하지 못했던 서평을 다시 하고 싶어서 신청했던 책이 2권이 있었다. 한 권은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행 에세이였고, 한 권은 기다렸던 김연수의 장편소설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려고 했는지, 이 책의 배송이 많이 늦어져서 2권의 책을 같은 시기에 같이 읽게 됐다. 예상했었던 여행 에세이는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기 때문에 나를 힘들게 했고, 또 심적으로 부담이 많이 가는 고통스러운 계절인 가을이 너무 빨리 왔고, 이 책은 역시나 김연수 작가의 이전 소설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 이 책의 시점인 카밀라는 불행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냉소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몇 편이라도 본 독자라면 알 수 있다. 그가 만들어 낸 인물들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 그가 이 책의 말미에 적은 것처럼 적지 않아도 표현되는 무언가. 궁금하고, 궁금한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렵고, 가벼운 듯하게 만드는 것.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글은 가벼운 대화체에서도 가벼움이 없으며, 마침표에도 감정이 실린다. 그게 그의 힘이다.

얼마 전 출간한 그의 에세이에서 이런 글을 본 적 있다. '20대만 해도 세상에 둘도 없는 염세주의자인 것처럼 잔뜩 인상을 쓰고 다녔다. 그때는 인간은 모두 위대한 혼자이니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구할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이제서야 그동안 읽었던 그의 글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이 소설의 첫 화자인 카밀라가 바로 젊은 시절의 김연수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닌 듯 보이지만 세상과 간격을 두고 있는 모습이 그가 말한 것처럼 20대의 김연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대단해. 넌 멋져. 넌 아름다워. 넌 소중해. 난 네가 너무나 좋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어. 평생 너만을 사랑할 거야. 난 너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

말들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있을 줄이야.

그 달콤함 때문에 내 몸이 촛농처럼 완전히 녹아버릴 줄이야.

나란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죽음처럼.

그런데 그 일이 나를 살렸다.

- p. 25

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좀 힘들었다. 계절 탓이었는지. 심적인 것이 너무 큰 탓이었는지. 어떻든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나 잠시 괜찮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이때. 너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평생 너만을 사랑한다고 했던 그 말이. 아주 달콤했던 그 말이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것처럼 녹게 하던 그 말이. 결국 나를 지금까지 살게 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역시 김연수 작가답다. 그는 이번에도 나를 그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또 나를 잡았다. 이 한 문단으로. 사실 조금은 식상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게 해 준 그에게 다시 한 번 감탄하며, 다음 책을 기다리게 된다. 어서 더 좋은 글로 나타나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