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예술 - 가상과 현실

 

고대 예술과 미학 – 가상의 탄생

일반적으로 그리스 걸작품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자세나 표정에 나타난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바다의 표면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도 그 깊은 곳만은 언제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 인들의 표정은 아무리 격정적인 상황에 있어도 한결같이 위대하고 침착한 영혼을 보여준다. (81)

 

우리는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 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테크네)로 간주했다. 한편 시는 음악과 무용, 연극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는데, 재미있게도 시는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왜? 시는 ‘영감’ 또는 ‘광기’의 산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99)

 

아리스 : 오리려 그 반대죠. 비극은 그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하니까요

플라톤 : 카타르시스? 화장실에서 열변을 토하는 거 말인가?

아리스 : 썩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적절한 비유죠. 비극은 사람의 가정을 극도로 흥분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걸 진정시키고 정화합니다. 묘한 역설이죠? 비극을 봄으로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공포를 배설해버리고, 후련해진 마음으로 극장 문은 나서게 되죠. (113)

 

중세 예술과 미학 – 가상을 넘어서

예술가의 영혼은 정신세계 속의 ‘원형’을 보고 그것에 따라 창작한다. 그는 이 ‘원형(형상)’을 무정형적인 질료에 부여해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만약 예술작품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내면에, 더 나아가서는 원래 정신세계에 있던 거다. 예술가는 이렇게 질료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에 모자란 것을 보충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예술가는 창조자다.(126)

 

이렇게 추(醜)는 비록 그 자체론 아름답지 않아도 전체적으론 미를 한층 복잡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요인이 된다. 이 생각은 사실 일종의 변신론, 곧 신을 변호하는 논리다. 생각해보라. 신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했는데, 거기 왜 추한 것이 끼여 있을까? 난처해진 신을 위한 고전적 변명은 이거다.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부분적으로 추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전체적으론 더할 나위 없이 아릅답다.”(135)

 

자연 모방이란 관념에서 해방된 탓으로, 중세 회화는 대상이 가진 원래의 형태와 색채에서 과감히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구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세 예술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사실 대상에서 해방된 형태와 식채의 자유로운 구성은 곧 현대 회화의 원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처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밝은 빛과 화려한 색채로 추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게 바로 중세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여기서 중세 미학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라는 걸 알수 있다.(152)

 

후기에 이르면 물질세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현실세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다. 이제 교회는 물질세계를 소극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그걸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으로 바라본다. 이 세상은 신이 창조한 거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물 속엔 창조의 질서가 들어 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하는 건 곧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고딕 자연주의는 이런 사회저그 철학적 분위기에서 나왔다.

 

근대 예술과 미학 – 가상의 부활“나는 다만 잉여인 것을 제거할 뿐이다. 조각상은 거기에 그렇게 있다.” 그(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곧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돌 속에 갇혀 있는 그 형상들을 해방하는 작업이었다. (213)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예술과 바로크 예술의 대립되는 특징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평면에서 깊이로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230)

 

소크라테스는 미를 ‘유용성’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겐 화려한 황금방패보다 튼튼한 강철방패 쪽이 더 아름다웠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가했다. 그래서 고대인은 미와 선을 아예 하나로 합쳐 삶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게 바로 ‘칼로카가티아“다. 한편 근대인들은 미를 ’인식‘이라고 생각했다. 다 빈치에게 예술은 과학이었고, 비움가르텐에게는 감성적 인식었다. (253)

 

아름다움은 이처럼 ‘목적’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미가 존재하는 목적이 있다면, 단 하나 우리 마음에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다. 칸트는 이를 역설적으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불렀다. 미에는 목적이 없다. 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257)

 

예술은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의 산물인 양 자연스러워야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면 안 되고, 자유로이 유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262)

 

아름다움에 대하여 – 아름다운 가상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는 서로 교차하는 두 개의 원으로 표시할 수 있다. 동그라미 두 개가 완전히 겹치면 유미주의적 예술론,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이게 바로 칸트의 생각이기도 하다....반면 동그라미가 서로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때 예술은 미적인 효과 이외의 다른 목적에 종속된다. 가령 톨스토이는...예술은 그보다는 좀더 높은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 지고한 목표를 그는 예술이 가진 도덕적 교화 기능에서 찾았다. ...미적인 것과 예술의 관계는 교차하는 두 개의 원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315)

 

인문학 책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쏙 빨려드는 소설을 읽는 것도 행복하다.

하루키의 소설, 제목도 참 길다. 난 이 제목이 잘 외워지지 않아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겨우 책 제목을 안 보고 끝까지 말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을 다 큰 성인의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너무 가벼운 정의일까.

 다자키는 학창시절 다섯 멤버였던 친구들 그룹에서 영문도 모른 채 퇴출 당한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넘어 서른 여섯 살이 된 지금은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큰 상처는 뚜껑은 단단히 덮어 두어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젊은 날의 상처는 늘 어느 구석에선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자키를 지배하고 있다. 어느 날 여자친구 사라의 조언으로 16년 전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나서며 과거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려 한다.

이야기 속에 지하철 분실물을 살피던 중 여섯번째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끔 있다는 육손이. 그들은 여섯번째 손가락을 잘라내는데, 어떤 이는 이 손가락을 포르말린에 담가 박제를 만들어 둔다. 손가락이 여섯 개면 피아노 칠 때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지만 실제로 여섯번째 손가락은 걸리적거릴 뿐이란다. 이 여섯번째의 손가락, 잘려나가 박제가 되어버린 손가락이 바로 다자키 자신이 아닐까,

사라는 말한다.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이금이의 '유진과 유진'이란 청소년 소설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시절 성추행을 당한 기억을 잊고 사는 주인공이 있다. 소설 속의 유진이 할머니가 그랬다. 상처를 꼭꼭 싸매두면 다 나은것 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곪아터지고 있다고. 끄집어 내어 햇볕도 쏘여주고 해야 낫는다고. 정확한 말은 생각 안 나지만 이런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다. 다자키도 싸매두었던 상처를 끄집어 내어 치료하기 위해 순례를 떠난다. 눈앞에 드러나는 옛 상처는 처참하지만 햇볕도 쏘여주고, 바람도 쏘여주고 약도 발라주고 나니 후련하다. 앞으로 살아갈 이유와 용기도 생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난 색채가 없다는 말에 참 많이 공감했다. 나도 딱히 색채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감이 없고, 늘 자신은 누군가의 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핀란드에서 만난 에리는 다자키에게 말한다.

"넌 다정하고 쿨하고 조용하고, 그때부터 자기 삶의 방식을 가졌어. 그리고 잘생기기도 했고.

....넌 색채가 없는 게 아냐. 그런 건 이름에 지나지 않아. ...넌 정말 색채가 넘치는 다자키 스쿠루야. 그리고 근사한 역을 만드는 사람이고. 지금은 건강한 서른여섯 살 시민으로 선거권이 있고 세금도 내고 날 만나러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까지 올 수 있어. 너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동의보감은 '절대적인 의학서적'이었다. 그래서 매우 방대한 의학지식들이 논리정연하게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고미숙 씨의 설명을 통해 맛본 동의보감은 방대한 의학지식 그 이상이었다. 동의보감에는 의학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철학, 역학, 그리고 우주의 원리까지 담겨있다. 병을 치료하는 데 우주의 원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생명의 탄생이며 사람의 형상 마저도 우주의 섭리와 맞닿아 있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이런 질병에는 이련 치료와 이런 약'이란 공식들로 이루어진 서양 의학과는 근본 자체가 다르다.

반면에 '논리적'이란 말을 붙여도 될지는 조금 망설여진다. 동의보감은 질병이나 약초에 대한 지식을 나열한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려놓았는데, 그것이 마치 옛이야기처럼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하고, 또 듣고보면 그럴듯도 하다. 귀나 코에 뱀이 들어갔을 때의 처방법이나 뱀이 몸을 감았을 때는 소변을 보면 된다는 좀 우스꽝스러운 처방도 있고, 환자의 화를 돋구어 한바탕 화를 내게 했더니 병이 낫더라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어떤 과학적인 자료가 없던 그 시대엔 나름 논리적인 처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의학은 사람의 몸에 접근하는 방법이 서양의학과 매우 다르다. 서양 의학이 사람의 몸 하나를 떼어내어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한의학에서는 사람과 자연과 우주를 하나로 본다. 그래서 사람의 모습 자체가 우주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기운도 우주를 닮아있다.

우리는 병이 나면 정작 나는 내 몸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그저 의사에게 내 몸을 내맡기고 만다. 내 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 이것이 내 몸의 주인으로서 마땅한 의무가 아닐까. 허준이 동의 보감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고미숙 씨의 쉽고 재미있는 해설 덕분에 술술 읽혀나갔다. 의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학자였던 허준. 백성들을 위한 그의 노고가 전해진다.

 

천지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회로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 (내경편 10쪽)  -p23-

 

인간은 태역, 곧 빅뱅과 더불어 생겨난다.생명과 우주가 하나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태역에서 태소로 이어지는, 다시 말하면 기.형.질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질병도 함께 탄생한다. 즉 질병이란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다.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질병을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아니, 질병이 곧 존재의 표현형식이다. -아파야 산다 중 p132 

 

차이는 생성을 낳지만 반복은 망상을 낳는다. 망상이란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이 따로 노는 것을 뜻한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고 봄엔 가을을 꿈꾸고, 여기에선 저곳을 저기에선 또 다른 것을... 이런 '엇박'들 속에서 '지금, 여기'의 시공간은 해체되어 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부질없는 망상들의 쳇바퀴뿐. 이 '차이 없는 반복' 속에서 아무것도 생성되지 못한다. 인생도, 우주도. 그러므로 그 부질없는 쳇바퀴를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지금, 여기'라는 현장을 오롯이 주시할 일이다. "겨울에 여름을 그리워하지 않고 밤에 새벽을 기다리지 않는' 툰드라의 유목민들이 그러하듯. -6장 오장육부, 그 마법의 사중주 중 p 244-

 

음양의 이치상, 기쁨은 발산하는 양기다. 슬픔은 침잠하는 음이고. 그레서 전자는 쉽게 잊혀지고 슬픔은 오래 간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식이다. 복은 내탓이고 화는 남의 탓이 되는 것도 이런 원리다. 사랑의 기쁨은 산산이 흩어지지만 사랑의 아픔은 천년이 지나도록 절대 잊혀지지 않아야 하는 것도 이런 법칙의 산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말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치를 깨우침으로써 오리혀 감정의 무의식적 벡터를 벗어나라는 뜻이다. 기쁘은 쉽게 잊어버리고 슬픔은 차곡차곡 쌓아두는 건 결코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해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음양과 기억 :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하라' 중에서 p271-

 

박노해 시인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호모 큐라스'가 된다는 건 '지가 몸의 연구자'가 된다는 의미다. -'호모 큐라스 : 자기뭄의 연구자' 중에서 p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