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가까와 오면서 피부에 하나 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입술 주변이 부르트고 화끈거린다거나, 겨울이 되면 얼굴에 지진이 날 듯 건조해 지거나, 심지어는 빨갛게 발진이 생기기도 했다. 몇년간 이런 증세가 나타났다가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 먹거나 주사를 맞으면 가라앉고, 그러다 약효가 떨어지면 또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최근에도 얼굴에 빨갛게 발진이 생겨 피부과에 갔다가 의사샘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화장품을 바르지 말라는 것. 스킨, 로션을 비롯한 기초화장품이 피부를 점점 망치고 있으며 특히 아이크림을 절대 바르지 말라고 한다. 의사샘의 말이 적잖이 충격적이기도 했고 병원을 나서는 순간까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장품과 피부에 관한 책을 찾아보던 중 이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이 책또한 충격이다. 그동안 스킨부터 시작해서 각종 기초 화장품을 정말로 열심히 발라왔던 것이 피부를 망치고 있는 것이었다니.. 하긴 나도 가끔은 여러가지 화장품을 꾸역꾸역 바르며 피부가 소화불량에 걸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하면 안될것 같은 조바심에 그래왔던 것 같다.

이 책에 강조하는 것 세가지. 지나치게 씻지 말것, 문지르지 말것, 화장품을 바르지 말것, 이 세가지를 조금씩이나마 실천해보려고 하고있다. 솔직히 말하면 화장품을 딱 끊지는 못하겠다. 젊은 20대라면 이런 모험도 과감히 해보겠지만 중년의 나이에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일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품고 지금은 병원에서 권해준 순한 크림 하나만 바르고 있고, 클렌징오일은 딱 끊었다. 세수도 살살살살... 그리고 아침 세수는 물로만 한다. 파운데이션은 아직 끊을 용기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많이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나서부터 피부에 빨갛게 올라오던 발진이 사라졌다. 음.. 의사샘과 저자의 말이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비싼 돈을 펑펑 들여가면 20여년간 피부를 망치고 있었다니 억울한 생각이 든다. 여드름이 많이 난 아들에게도 조언을 해 주었다. 화장품을 다 끊는다는 것이 찜찜하긴 하지만 일단은 많이 줄이고 저자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점차 줄이다가 나도 맨얼굴을 자랑하고 다닐 날이 올수 있을지... 

동시대를 살았던 두 명의 천재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교해 엮은 책이다. 저자 고미숙 씨의 전작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말미에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놓았다. 그 후로 꼭 10년 만에 이 책이 나왔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달라도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들은 타고난 사주부터 다르다. 책 속에 두 사람의 사주를 풀어 놓았지만 구체적으로 이해는 안 되고..ㅠㅠ 어쨌든 요약하자면 연암은 물의 사주를 타고 났고, 정약용은 불의 사주를 타고 났다. 연암이 물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떠돌며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정약용은 불꽃처럼 타오르며 정계로 진출한다. 연암의 인생이 물 흐르듯 굴곡이 없다면, 다산의 인생은 매우 부침이 심히다. 정조라는 태양을 만나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천주교를 만나 재가되어버리기도 한다.

 

저자는 ‘다산은 20세기 형’, ‘연암은 21세기 형’으로 정의해 놓았다. 방대한 텍스트와 정보력, 그리고 대쪽같은 성품과 진취적인 계몽정신. 이런 것이 20세기의 특징이라면 21세기는 물결의 시대라고 할만큼 유동적이다. 손과 기계의 사이, 마음과 사이버의 사이가 모호해졌다. 이것이 <열하일기>로 대변되는 연암의 특징이다.

또, 다산은 콜센터, 연암은 SNS로 빗대어 놓았다. 방대한 정보력으로 무엇이든 알려주는 콜센터는 정말로 다산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SNS와 같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디지털의 세계는 연암이다. 연암은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연암에게 물어야할 것은 길을 찾는 방법, 혹은 지도다.

그러고 보니 서울시 콜센터의 이름이 ‘다산 콜센터’다. 설마 정약용의 호 ‘다산’은 아니겠지? 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니 그 ‘다산’이 그 ‘다산’ 맞다. 홈피에 ‘다산 콜센터’의 뜻을 ‘위민(爲民), 청렴(淸廉), 창의(創意)의 정신을 토대로 지방 행정의 혁신을 주장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서울시의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라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그야말로 콜센터 안내원이 되어도 좋았을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 다산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그럴 듯 해 웃음이 나온다.

 

이 책에 앞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난 후라 이 책 속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 연암이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주 인상적이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큰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라든지, 시험에 붙고 떨어지고를 떠나 다치지나 말고 오라는 글을 보니 ‘너희가 책이 없냐? 총기가 없냐?’하고 호통치던 다산의 모습과 대조적이어서 무척 인상적이다. 나도 연암같이 여유있고 쿨한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불가능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연암과 다산 두 사람의 자식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평범하게 자란다.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연암의 아들은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애정어린 저서를 남겼다는 것. 그러고 보니 잔소리하고 호통치는 아버지보다는 느긋하게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소통하는 연암 식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더 애틋하게 남는 것은 아닌지. 이 부분에서 잠깐 들었던 생각인데, 만약 다산 같은 아버지 밑에 연암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으~~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두 사람이 부자지간으로 만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다. 반면 염암같은 아버지 밑에 다산 같은 아들이라면 그리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겠다. 아버지가 늘 아들에게 꽁생원이라고 놀려대긴 하겠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천재의 라이벌 전. 고미숙 씨 덕에 두 라이벌의 매력에 빠져 더운 여름을 이겨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개성과 매력을 듬뿍 담아내긴 했지만 읽다보면 저자가 누구의 손을 들고 있는지 슬그머니 보이기도 한다..ㅎㅎ

제목은 라이벌전이라고 붙여 놓았지만 애초에 승부를 겨루자는 마당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너무나 다르며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철저히 해낸 두 사람의 승부를 어떻게 가를 수 있을까. 세상에 다산처럼 꼿꼿하고 흔들림 없는 범생이만 산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또 연암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유람하며 돌출행동을 일삼는 사람들만 산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책을 구입할 때 사은품으로 두 개의 컵이 같이 도착했다. 다산 정약용이라고 써있는 빨간 컵과 연암 박지원이라고 써있는 검정 색 컵이다. 받을 땐 별 생각 없었지만 책을 읽고 보니 빨간 색과 검정 색이 각각 두 사람에게 썩 어울리는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암은 정말로 미관말직을 원했다. 그가 원했던 건 오직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녹봉이었다. 이름하여 생계형 관직! 최소한의 녹봉이 있고, 책을 볼 수 있는 한직이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80)

이 부분을 읽고 머릿속에 불 하나가 켜진 것 같았다. 아!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지금의 내 자리는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만든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불평 불만 가득했던 내 마음을 텅 비워버리자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연암의 기질을 가진건 절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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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이제 연암은 주류의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원심력의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이고, 다산은 비주류들의 부활을 꿈꾸며 전력을 다해 중심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한 사람은 중앙에서 변방으로, 다른 한 사람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원심력과 구심력의 한판 승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43)

 

연암은 정말로 미관말직을 원했다. 그가 원했던 건 오직 생계를 꾸릴 수 있는 녹봉이었다. 이름하여 생계형 관직! 최소한의 녹봉이 있고, 책을 볼 수 있는 한직이면 더할나위 없이 좋다. (80)

 

이것이 연암이 즐겨 구사한 ‘처세의 기술’이다. 정계에 입문했지만 결코 상승을 바라지 않았고, 다만 변방으로, 변방으로 떠돌았다. 각종 견제와 질시에도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우스갯소리 아니면 침묵으로 대응했다. 권력의 장에선 어떤 말도 왜곡된다. 중요한 건 시비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시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81)

 

부귀공명과 지성은 양립할 수 없음을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또 배움과 익힘, 독서와 글쓰기만이 생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연암이 ‘연암’이 되고, 다산이 ‘다산’이 된 것은 이 시간들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123)

 

정조는 또 어떠한가. 세손시절 불과 열한 살에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했고, 평생 그에 대한 울분과 회한을 안으로 삭이며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폭군이 되지 않았던 건 단 하나 그가 복수보다는 학문을, 권력보다는 지성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148)

 

연암은 이질성의 바다를 유영했다. 자유롭게 또 경쾌하게! 그리고 또 열정적으로 쓰고 또 썼다. 호기심 제왕에다 호모루덴스였던 연암으로선 일기만으로는 부족했다. 매일의 일지로이동경로와 유적, 그리고 사건들을 정리함과 동시에 그걸로 환원되지 않는 감흥과 지성을 모아 별도의 문장을 덧붙였다. (259)

 

한 가지 더, 여기 아주 흥미로운 대쌍이 하나 숨어 있다. <열하일기>는 공간을 가로지르고, <목민심서>는 시간의 추이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토대는 그러한데, 상부구조는 정반대다. <열하일기>는 공간을 이동하지만 시간적 변화가 핵심이다. 연암은 서사와 사건을 구성하는 데 주력한다. 반대로 <목민심서>는 시간적 흐름을 따라가지만 공간적 배열이 더 우선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되 항목별 질서와 배치에 더 중점을 둔다. 소리는 시간적 리듬을 타면서 움직이고, 빛은 공간의 점유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전자는 청각이, 후자는 시각이 더 주도적이다. 청각은 다중적이지만 시각은 일의적인다. 청각의 귀, 귀는 신장으로 이어지고, 시각은 눈빛, 눈빛은 심장으로 이어진다. 유머와 패러독스를 통해 의미를 다양하게 분사하는 것이 연암의 전략이라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해 백과전서식 종합에 주력한다. 연암이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면, 다산은 시각적 도표, 요즘으로 치면 프리젠테이션의 명수였다. 눈치챘겠지만, 전자는 물의 속성이고, 후자는 불의 속성이다.(261)

 

“이 강은 바로 저들과 나 사이에 경계를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이 물가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271) <열하일기>중에서

 

연암은 이 도그마들에 맞서 ‘이념적 바리케이드’를 치지 않는다. 연암은 어떤 비방과 논란에도 ‘시비를 가르는’식의 논변을 펼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길을 포기하거나 굴절시킨 적도 없다. 유머와 해학으로 대충 얼버무린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을 뿐이다. 연암에게 정말로 중요한 건 시비의 쟁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의 파레임 자체를 해체하난 것이다. 비유하자면, 바리케이드를 칠 장소를 제거해 버리는 것. ‘사이’라는 화두는 바로 이런 사유의 산물이다. (274)

 

"내 이제야 도 (道)를 알았다. 명심(冥心)이 있는 자는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잗달아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그러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280) -열하일기 중에서-

 

엣날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본 것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일 따름이다.....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353)<영치고서> <연암집>중에서

 

연암은 사이비(비슷하지만 가짜다)를 못 참고, 다산은 뒤죽박죽 섞이는 것을 못 참는다. (261)

 

과거볼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과시는 몇 수나 지어 봤으며 속작에는 능하여 애로가 없느냐? 글제를 대해서 마음에 어렵게 느껴지지 않은 뒤에라야 시험장에 들어갈 일이고, 비록 반도 못 썼다 하더라도 답안지는 내고 나올 일이다. (365)<고추장>

 

너희 형제는 걱정되지 않고 늘 마음에 잊히지 않는 사람은 효수(손자)니 우습구나, 우스워. 넌 모름지기 수양을 잘해 마음이 넓고 뜻이 원대한 사람이 되고, 과거공부나 하는 째째한 선비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 (365) <고추장>

 

시험에 붙고 안 붙고는 관계없는 일이며, 다만 과장에 출입할 때 조심해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게다 (385) <고추장>

 

이렇듯 연암과 자식들의 관계는 허물이 없다. 친구나 형제에 더 가깝다. 하여 연암의 교육법은 계몽이 아니라 촉발에 가깝다. 계몽은 제자들을 스승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고 촉발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방향이나 목표가 아니라 리듬과 박자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되 서로 교감하고 감응할 수 있으면 된다. (387)

 

다산의 빛이 입자라면, 연암의 빛은 파동이다. 전자가 불꽃이라면 후자는 물결이다. 불꽃은 뚜렷하지만 물결은 일렁거린다. 물결의 일렁거림을 저확히 포착하기란 불가능하다. 더구나 연암은 사후에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에 받은 찬사와 비난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그래서인가. 연암은 다산이라는 주연을 빛나게 해주는 조연이거나 아니면 다소 ‘어색한’파트너로 20세기를 통과해야 했다.(402)

 

이 개성넘치는 별을 하나로 이어 버리면 그만큼 우리의 창공은 흐릿해질 테니까. 따라서 지금 중요한 건 이 두 개의 별을 각자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알고 있듯이, 별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서로 비춤으로써만이 빛난다. 다산이 다산이 되려면 연암이 있어야 한고, 연암 또한 마찬가지다. 저 멀리서 다산 같은 별이 빛나야 그걸 배경으로 전혀 다른 빛을 분사할 수 있다. (410)

 

앞서서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이 책도 기대를 갖고 읽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연암 글쓰기의 본질이나 과정 등을 밝혀 놓았고, 뒷부분에는 연암의 작품 중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기록>,<황금대기>, <범의 꾸짓음>을 함께읽어보며 글 속에 담긴 사상이나 글쓰기 기법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옛 성인들의 글들을 인용해야 좋은 글이란 평가를 얻던 시대에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당당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그만이라는 글쓰기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 보수적이던 그 당시로 보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다. 오죽하면 <열하일기>가 정조의 문체반정에 걸려들었을까. 그래도 용감한 연암이 있었으니 후대의 우리가 이렇게 본으로 삼을만한 좋은 작품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호방한 인품, 글쓰기에 대한 남다른 노하우, 주체사상, 중국의 대하는 마음 등 다양한 인간 박지원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 책 속에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암에게는 중세의 근대, 탈근대의 모습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연암은 ‘그때’의 구조 속에 구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구조를 성찰하고 구조 너머를 바라본다. 그는 모 든 인간이 ‘그때 저기’를 향해 갈 때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금 이곳이 과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불합리한 세계와 치열하게 대결한다. (16.시작하며)

 

연암에 따르면 참된 것은 내 눈앞 사물에 있다. 이를 즉사(卽事)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모범으로 떠받드는 한나라와 당나라는 지금 여기의 공간이 아니며, 위대한 문장가인 반고와사마천은 과거의 사람이다. 연암은 과거가 아무리 훌륭해도 먼 옛날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며, 반고와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이들을 배우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참된 것은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계수나무도 살아 있는 오동나무만 못하다. 아무리 훌륭한 그림일지라도 지금 살아 있는 사물보다 더 뛰어나게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30.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연암은 코끼리의 습성과 생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필연의 법칙과 조물주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자연 사물의 질서는 일직선으로 줄 세울 수 없다. 사물마다 우연한 상황들이 있고, 사물 고유의 특성이 있다. 저 크고 넓은 세계의 온갖 현상을 하나의 이치로써 하나하나 규정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정해진 이치란 없으며 자연 사물에는 단순하게 밝힐 수 없는 복잡한 양상들이 있다. 연암은 하늘은 인격자이며 사물마다 객관적인 이치가 있다는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48.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이와 같이 <말 머리에서 무지개를 본 기록>은 ‘무엇을’알려주려 하지 않고 ‘어떻게’ 보여줄까에 초점을 둔다. 개인의 여정이나 경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 자체에 주목하고 그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의론을 차단시키고, 자연 경물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는 기존의 기문, 나아가 기조의 산문에서조차 보기 드문 표현 방식이다. (63.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글은 자연은 소리와 빛깔, 정과 경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연암이 말하는 정은 눈앞에 마주친 경물을 통해 시인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는 것이다. 연암에 따르면 이별이 슬픔을 표현할 때, “말없이 애간장을 녹이면서 헤어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별이라는 글자에 주석을 단 멋대가리 없는 표현이다. 이별하는 데 가장 적당한 공간인 물가의 경치를 보여주면 그 간절한 마음이 더 효과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66. 글쓰기의 본질/연암의 글쓰기는 생태글쓰기다)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은 검푸르러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다.

 

곧 생태글쓰기란 자연 사물의 생태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나와 타자, 인간과 자연 간의 다양성을 자각하고 상생과 공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글쓰기다. 생태 글쓰기에서 자연 사물은 단순히 소재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 사물의 생의로부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거나 인간의 심미 의식을 높여 준다. (69. 글쓰기의 본질/생태 글쓰기는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 진심을 표현하면 그뿐이다. 진심을 표현한다는 것은 내 품은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글의 본질은 닮는 데 있지 않고 멋있는 표현에 있지도 않다. 작가의 속생각이 저절로 드러나는 글, 평소의 자연스런 모습을 표현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폼 잡는 말, 고상한 문체를 쓴다고 좋은 글이 아니다. 비속어나 일상의 말도 내 진심을 드러내는 데 소용된다면 써야 한다. (91.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해서 우유부단하기만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92.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어린 아이가 나비를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돋움하며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서 다가갑니다.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나비는 날아가고 맙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기에 겸연쩍어 씩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93.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그러므로 ‘지금’은 ‘옛날’과 대비해 부르는 이름이고, ‘비슷하다’는 것은 ‘저것’과 비료해 쓰는말이다. 무릇 ‘비슷하다’는 것은 비슷하기만 할 뿐이고, 저것은 저것일 뿐이다. 비교한다고 해서 이럿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종이가 희다고 해서 먹이 따라허 하얘질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진짜 같다고 해서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다. (99.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대상을 묘사할 때는 평범하게 좋은 것을 좋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흠이나 결점, 즉 남들과는 다른 그 사람만의 개성이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둥근 것은 모나게 그리고 긴 것은 짧게 그릴 때 더 진실한 대상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110.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이는 곧 연암의 글은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고, 논쟁을 촉발하거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독자의 반성을 유도하거나 독자에게 흥미를 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처음에 과감하고 분명한 논지를 제기하라는 것이 연암이 말하는 서두의 글쓰기 요령이다. (114. 글쓰기의 기본 방침/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그의 글쓰기 과정은 ‘탐구심으로 관찰하기-자연 사물과 교감하기-자료 모으기-제목에 따라 구상하기-(내용 조직하기)-협력적인 글쓰기-수정하기’로 정리할 수 있었다. (123. 글쓰기의 과정)

 

“처음 초고를 잡을 때는 마음에 치우친 뜻이 있어 스스로 글의 결점과 문제점을 보기 어렵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처음 글을 쓸 때 가졌던 치우친 마음이 없어지고 객관적인 마음이 생겨 비로소 그 문장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38. 글쓰기의 과정)

무릇 글에는 옛사람의 뜻을 취해 쓴 것도 있고, 자기가 뜻을 만들어 쓴 것도 있습니다. 옛사람의 뜻을 취해 쓴 것을 그 말을 어렵게 해 다른 사람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 해야 하고, 자기가 듯을 만들어 쓴 것은 그 말을 쉽게 해 남들이 의심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옛사람의 뜻을 취하면서 아울러 그 말까지 취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책의 이름을 써서 구별해 내 말과 섞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진부해지거나 표절한 글이 됩니다. -이건창 <답우인논작문서>

 

(글을 마쳤으면) 잠시 내버려 글상자에 넣어 두고, 눈으로 보지 말고 또 가슴에서 깨끗이 씻어 몰아내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룻밤 또는 2,3일을 잔 뒤에 일어나 다시 그것을 취해봅니다. 내가 내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 뒤에 남의 글을 보듯이 하면, 옳은 것은 즉시 그 옳음이 드러나고 그른 것은 즉시 그 그른 점이 드러납니다. 그른 것은 버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창 <답우인논작문서> (146. 글쓰기의 과정/연암의 글쓰기는 과정 중심이다)

 

연암 그룹은 글이 담아내야 할 주요대상을 자연 사물로 확장함으로써 글쓰기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다. 이들에겐 자연은 살아 있는 몸짓, 일상의 모든 존재가 표현 대상이다. 재잘대는 새소리, 튀는 벌레가 한 편의 시이고 글이다. 오히려 과거의 글에서 법 삼으려 한다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한다.(155. 맥락의 글쓰기, 전략의 글쓰기/연암의 글쓰기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