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가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과 <뿌리깊은 나무>를 빌려주었다. 책을 받아들고도 오래전에 드라마로 본 것들이었기에 그다지 큰 감흥이 일지는 않았었다. 그래서인지 <바람의 화원>을 펼쳐든지 며칠이 되도록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런데 2권에 접어들면서 책장 넘어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빠져들기 시작했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한 시대에 살았으며 도화서 화원이었다는 아주 작은 역사적 사실만을 가지고 이렇게 촘촘하고 개연성있는 이야기들을 펼쳐놓은 이정명 작가가 존경스러워졌다. 이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들을 얽어내기 위해 두 사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을 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며 밤을 지샜을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멀쩡한 남자 신윤복을 왜 여자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역사 왜곡이며 한 사람의 정체성을 흔들어놓는 무례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왜 신윤복이 여자이어야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에 색채를 거의 쓰지 않았으면 화려한 색채를 쓰는 그림은 천박하다 멸시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림에서 여인이 중심에 등장하는 것도 금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윤복은 그런 틀을 거부했다. 화려한 색채를 이용했으며 여인을 당당히 그림의 중심에 세웠다. 그녀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도 느껴진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신윤복이 여자가 이니고는 여인들에 대한 이런 애정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한 시대에 존재하는 두 명의 천재 김홍도와 신윤복. 그러나 같은 천재라는 수식을 담고 있었지만 너무나 다른 색깔을 지녔던 사람들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고미숙 씨의 책이 생각난다. 공료롭게도 같은 정조 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천재 박지원과 정약용. 이들도 사상과 성향이 극과 극이었던 것은 다르지 않다. 서로 달랐으니 두 천재가 공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바람의 화원> 책과 드라미가 한창 인기를 끌던 몇년 전, 간송미술관에서는 때맞추어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대량 방출(?)했다. 미술관 앞 도로까지 길게 줄을 서서 한참을 기댜려서 봤지만 사람들에 치여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때 책에서만 보던 단오풍정과 미인도롤 바로 눈앞에 두고 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두 눈에 흡수라도 시키려는듯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아들녀석이 기타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이라며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을 구해다 달라고 한다. 아들이 고전을 읽겠다하니 기쁜 마음에 이 두 권을 주문해 주었다.

'데미안'은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몇달 째 책꽂이에 그대로 꽂혀 있는 걸 내가 꺼내다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첨엔 좀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 책 청소년 권장도서 맞아? 주인공 홀든의 방황과 일탈이 곱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담배와 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성적인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하는 열 예닐곱의 남자아이. 역시 보수적인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책이야 하며 읽어내려갔는데,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나도 모르게 홀든에게 빠져들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됐다. 책을 덮고 나서는 한동안 쓰린 가슴을 달래야 했다. 책 속으로 손을 넣어 홀든을 끄집어 올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수한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면서도 그 순수함을 간직하기에 세상은 너무 혼탁하다. 어찌보면 홀든은 서서히 혼탁한 세상에 물들어가지 못하고 그 세상에 대항하다보니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홀든을 보면 마치 초현실주의 작가의 횡설수설함을 보는것 같다. 뜬금없이 오리 걱정을 하는가 하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갈곳 없는 소년의 그 외로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만약 홀든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불러냈다고 해도 나조차도 그의 말에 귀를 귀울여주지 않았을 것 같다.

미국에서도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한동안 금서였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홀든과 비슷한 나이의 우리 아이도 이런 혼란을 겪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이런 책을 읽어도 거뜬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랐는데도 나는 아직 아이를 어린아기 취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매사에 부정적인 홀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형이나 동생, 특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동생이 오빠에게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말한다.

"진짜 하고 싶은 건 아이들이 놀고 있는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거야. 하루종일 그 일만 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거야."

혼탁한 세상에 물들어가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학교 벽에 쓰여 있는 욕설을 지우는 것도 이런 의미로 보인다. 하지만 탈선을 일삼던 홀든이 갑자기 이런 생각과 이야기를 하게 되는 계기가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은 감도 있다. 탈선과 파수꾼 사이의 개연성이 좀 아쉬웠다고 할까..

결국 홀든은 집으로 돌아가고 정신병원을 거쳐 학교에 진학한다. 홀든의 이 3일간의 여정도 통과의례라고 해야 할까. 통과의례라고 하면 성숙해가는 과정의 아픔이라고 해야 할텐데, 홀든의 경우는 부패한 세상에 적응해가는 과정이 되어버렸으니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도 앞으로는 이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성인이 되지 않을까. 씁쓸하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와 닿는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누구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예를 들면 뭔가 나쁜 일을 했어봐, 그리고 상대방이 그걸 알고, 그럴 때 그가 너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는 거야.(52쪽)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것 말이야.(116쪽)

 

새는 알에서 깨어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123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152쪽)

 

누구든 한 번은 자신을 아버지로부터, 스승들로부터 갈라놓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누구든 고독의 혹독함을 조금은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견딜 수 없어 다시 밑으로 기어든다 하더라도.(165쪽)

 

나는 자연에 던져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세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172쪽)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