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써야 할지...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해당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특히 최근에 ‘비합리적 신념’으로 유명한 REBT 심리학 강의를 들었기에 더욱 이 책이 가슴에 와 닿았다. 비합리적 신념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믿음, 신념, 사고 체계 중에 자신의 행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추구하고 따르는 사고들을 말한다. 흔히 우리가 ‘나는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비합리적 신념이다. 그 중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던 신념이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아야 한다.’와 ‘나는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였는데 들었던 강의 내용에 이 책이 더해지면서 내가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허상이었다. 나는? 나는 그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누구나 다 사랑하나? 얼마나 다른 사람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남모르게 비판하고 재단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반대로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들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면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얼마나 굴렸던지, 모임만 끝나면 파김치가 되곤 했고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느라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한순간에 폭발해 ‘평소에는 참 좋은 사람인데 가끔 한번씩 불같이 화를 내는,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틀 역시 나를 정말 지옥 속에 가두었던 생각들 중 하나였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슈퍼맨이 될 수 없고 결코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알고 있는데 평상시 감정적으로는 그게 용납이 안 됐다. 그래서 직장에서 일 하나 맡겨지면 죽을 듯이 일했고 일상에서도 아주 작은 임무라도 주어지면 상대방으로부터 요만큼한 뒷말 하나 안 나오게 하려고 기를 쓰고 일했다.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게 됐고, 사실 고강도의 에너지를 들여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저강도의 에너지를 들여 빨리, 대충, 간단히 끝내고 넘어갈 일이 있기 마련인데 모든 일을 다 강-강-강-강의 에너지를 들여 잘하려고 하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너무 딸렸다.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결국 감정적으로 상대를 원망하게 되고... 잘하고 싶어서,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하는 짓들인데 결과적으로 상대를 미워하게 되고 내 자신을 더 혐오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내 패턴이었다.

 

그러던 중 5장에 <‘나약한 자신’ ‘능력 없는 자신’을 인정하면 일이 더 잘 된다>는 대목이 어찌나 두려우면서도 마음 깊숙이 다가오던지... 뭐든지 다 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잘 안 될 것 같고 어려울 것 같은 일은 처음부터 아예 시도조차 안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늘 고만고만한 일 속에서 그럭저럭 성과를 내며 사는 것이 완벽주의자들의 특성 중 하나인데, 사실 정말 가치있는 일 중에 고통스럽지 않고 어렵지 않은 일이 있던가? 최근에 10년 동안 해왔던 일에서 한 단계 더 도약을 해야 할 상황을 맞이했다. 고통스럽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기존에 해왔던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늘 잘해야 하고 늘 완벽해야 한다는 틀을 갖고 있던 내가 보기에 그 일에 들여야 하는 노력이 너무 고되 보였다. 그리고 노력한다 해서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래서 한 4년간을 대충 노력하는 시늉만 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일을 고수하며 지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이었는지는... 아마 눈앞의 문제를 맞부딪혀 해결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피해왔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고통받고 싶지 않아 고통을 피했는데 사실 그 자체가 더 큰 고통이라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통이 없을 수는 없다. 다만 그건 ‘있는’ 고통일 뿐이다. 고통이 오면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하면 되고 내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면 도움을 청하면 되고 도움을 청해도 안 되면 포기하고 받아들이고 상황 자체를 견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일도 지나가게 되는 것이고. 하지만 ‘있는’ 고통을 해결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자꾸 거부하게 되면 거기에 ‘만든’ 고통이 더해진다. ‘있는’ 고통을 감추고 피하기 위해 자꾸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 감정, 저 감정 불러일으키다 보면 원래 없던 ‘만든’ 감정이 더해져 이제 어마어마한 고역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그랬다. 고통스럽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했으면 나았을 것을, 그 고통과 마주하기 싫어서... ‘새로운 일을 시도했다가 안 되면 어떡해? 기존에 내가 누렸던 지위마저 잃어버리면? 노력했는데 안 되면 어떡해? 노력하느라 들인 시간과 돈과 에너지, 그거 너무 아깝잖아. 안 될 것 같으면 시간, 돈, 에너지 아끼고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낫지.’ 그런 생각으로 그저 하는 시늉만 했다.

 

 

그러다가 바로 얼마 전 도망다니는 그 고통이 극에 달해서 ‘그냥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새 일거리를 준비하는 첫삽을 떴다. 모르는 것 투성이고, 나는 잘났고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어제 본 것도 까먹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애초에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형편없이 적고... 매순간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아는 양은 적으면서 내가 엄청 많이 아는 양, 허상같은 이미지를 붙들고 물고빨고 앉아있었는데 여실히 보이더라. 아팠다. 되게 아팠다. 나는 잘나고 싶은데, 멋지고 싶은데, 완벽하고 싶은데 실제 내 모습은 못나고, 못하고, 잘 모르고, 불완전한 부분 투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너무 아팠다. 근데 계속 공부를 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들을 확인하고, 내가 몰랐다는 사실,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새로운 앎을 통해 메꿔나가려고 해보니 놀랍게도 지난 4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 느껴지더라. 지난 4년 동안 내가 느끼지 못했던 보람, 즐거움, 만족감, 충족감, 살아있다는 생생한 느낌이 느껴지는데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고 나니, ‘잘난 나’라는 이미지를 고수하려고 조금도 도전하지 않는 내 자신을 인정하고 내가 이렇게 나약하구나, 내가 이 부분엔 능력이 아직 부족하구나를 직시하고 뛰어들고 나니 오히려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더 편안해지고 만족스러워졌다. 고통을 피하려고 했고 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고 좋은 모습, 완벽한 모습만 유지하려 했던 게, 그렇게 정체된 물처럼 썩어가고 있던 게 과거의 나였나 보다.

 

 

여러개의 짤막한 챕터로 되어 있는 이 책이 주는 울림은... 글로 다 표현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가 머리로 ‘안다’ 하는 것과 그것이 실제 내 가슴으로 내려와 온 몸을 울릴 때 ‘알아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으면서 앞으로도 내 행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고집스럽게 쥐고 있는 틀, 습관, 신념들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책이 길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책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한 달간 제주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간 거지만 중간 중간 평상시 점찍어두었던 곳들도 많이 다녔는데 생각보다 외국인이 참 많더라. 오히려 내가 원래 살던 지방 소도시보다 외국인이 많아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거나 길을 헤매는 것 같으면 도와줄 수 있었다. 도시처럼 자로 재듯 딱딱 정비된 도시가 아니라서 자동차나 스마트폰의 네비 만으로는 버거웠던 모양. 나도 초행길이면서 마치 현지인인양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재수가 좋았던 거지~)

 

 

고맙다고 막걸리 한잔 하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술자리 외국어라는 게... 정말 깊은 이야기까지 나올 수 있는데 내 실력이 그 정도까진 되지 않아서 지레 겁먹고 됐다고 피했던 기억도 난다. 사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아무 말이나 그냥 지껄일 수도 있는 건데... 맛있는 제주 막걸리를 못 먹고, 또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돌아서면서 (여행가면 사람들이 백번 천번 하는 다짐인) ‘내 이번에는 기필코 영어, 제대로 하고야 만다’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따끈따끈한 책이 기다리고 있더라. <시니어 영어회화 첫걸음>

 

사실 이 책은 아버지를 위해 주문한 책이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 하셔서 집에 계신지 좀 됐는데 워낙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셨던 분이라 퇴직 후 의기소침해지실까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새로운 재미거리를 찾아서 잘 지내시는 듯 했다. 하지만 여유로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쉬신지 2년이 넘어가니 이제 무료함을 느끼시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은데... 자서전을 한번 써보시라 말씀드려도 귀찮아하시고 매일 집과 산만 오가시니 조금씩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직장일 하실 때는 퇴직만 하면 내 어디든 떠나겠노라 힘주어 말씀하셨는데, 정작 이제 시간이 생기니 영어 때문에 엄두도 못 내시고... 형제들 중에서 비교적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내가, 모시고 다니겠다고 큰소리치긴 했는데 나 역시 영어는 문서나 책으로만 자주 접했지 회화는 텍스트로 직접 보는 것만큼 자신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의 소개글을 읽고 아빠랑 함께 공부하면 딱이겠다 싶었다. 사실 나 혼자만 공부하면 무슨 의미인가. 나는 이 책의 주 타겟층인 시니어도 아니고, 사실 아빠와 함께 여행 다니기 위해 필요한 책인데 함께 떠나는 아빠도 같이 공부하셔야지! 그래서 같이 한 문장씩 매일 외우자고 아빠에게 신신당부를 했고 아빠도 OK 하신 상황에서 책이 도착한 것이다. 출판사에서 내세운 이 책의 특징은,

 

1. 입문자 및 중장년층이 읽기 편하도록 서체와 디자인을 최적화하여 가독성을 높임

2.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1,000단어 이내의 초급난이도 수준으로 학습이 가능하도록 구성

3. 입문자 및 중장년층의 학습편의를 위해 한글발음을 제공

4. 초급학습자에게 꼭 필요한 필수패턴 문장학습을 통해 기본회화를 습득할 수 있도록 구성

5. 해외여행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엮은 생생한 구어체 표현

6. 학습의 실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요 단어에 모두 악센트를 표시

7. QR코드를 통해 해당 페이지의 내용을 바로 확인 가능

 

이었는데 과연... 책을 받아서 직접 살펴보니 시니어 초급자가 공부하기에 정말 편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활자도 큼직큼직하고 한 페이지에 공부할 내용이 너무 깨알같이 들어차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도 아니고, 일단 알파벳 기본 발음부터 시작해서 대표 발음 중심으로 영어를 익힐 수 있게 쉽게 쓰여 있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영어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아온 젊은 층이라면 필요 없는 페이지겠지만, 일본어로 만들어진 영어 교재를 번역해서 어렵게 영어를 접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꼭 필요한 부분이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품사와 문장성분 같은 어려운 개념, 기본 문법 사항도 아주 쉽게 설명이 되어 있어 문법을 오랜만에 접하는 나도 다시 한 번 간단히 개념정리를 할 수 있었고 골치 아픈 거 싫어하시는 아버지도 하루에 꼭꼭 2시간씩 시간을 내서 살펴보실 만큼 쉽게 잘 쓰여 있었다. 가장 감탄한 것은 실전회화 익히기 부분이었는데, 책의 앞 부분에 나왔던 상황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지 최대한 쉬운 표현으로 소개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회화에 나온 단어들이 강세를 표시한 한글발음 표기와 함께 제시되어 있어서 영어 단어를 보는 것도 골치 아픈데 발음 기호까지 읽어야 하는 이중고를 가진 초보자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도 특히 이 부분을 마음에 들어 하신 듯 했다.

 

아직은 부끄러우신지 내가 집에 없는 시간을 골라 연습하신다. 집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물어보면 2시간 가까이 CD를 틀어놓고 솰라솰라 하신단다. 발음이 안 되는 부분은 몇 번이나 반복하기도 하시고. 전에 복지관에서 중국어 배우실 때는 좀 하시다가 마시더니, 이번엔 재미있으신 모양이라고 엄마도 신기해하셨다. 그만큼 이 책이 쉽게 쓰여 있고 또 딸하고 뭔가 한 가지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게, 저녁 밥상에서 공통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거리가 있다는 게 즐거움이신 모양이다. 효도가 뭐 별건가? 중국 고사에 아주 유명한 효자가 있어 가봤더니 노모가 발을 씻겨주는 것을 고대로 받고 있는 중년 남자가 있더란다. 이러고도 당신이 효자냐고 물었더니 부모가 하자시는 대로, 당신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 게 진짜 효도가 아니냐고 했다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이해를 못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부모님이 발을 씻겨주게 그냥 둬?’ 근데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부모님을 내가 아는 지식, 내 식대로, 나한테 가장 좋은 걸 해드리고 그렇게 이끄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당신 눈높이에 맞춰서,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도록 그냥 옆에 있어드리고 맞춰드리는 것이 진짜 효도라는 것을. 책 한권으로 아빠와 새로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듯 하다. 즐겁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 일생을 추구한 깊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한히 열려 있는 사람, 스스로를 구루나 스승이라고 여긴 적 없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소박한 거처의 문을 열어 놓은 사람, 스승인 자신에게 헌신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제자들이 진리에 헌신하기를 원한 사람, 삶의 고통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유머가 넘치고 너무 자주 웃어 어린아이처럼 보인 사람, 가식이 전혀 없어 그 앞에선 우리 자신도 꾸밀 필요가 없는 사람, 그러나 근원적인 의문을 느꼈을 때 맨 먼저 찾아가 대화하고 싶은 사람, 자연스러운 기쁨을 강조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가르친 사람, 미소 지으며 생을 마친 사람… 작가가 말하는 진정한 ‘스승’, 누구나 만나길 꿈꾸는 그런 멘토를 나는 가지고 있다.

 

 

이 책 서평단 모집에 선뜻 응한 이유가 바로 내 스승이 떠올라서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이 분을 만난 것이고, 내가 만난 모든 인연을 포기한다 해도 이 분과의 만남과는 바꿀 수 없을 만큼 좋은 분이고 존경하는 어른이다. 이런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내가 갈 길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할지, 그 사이사이 만나는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단순히 말이 아닌 실제 살아가는 모습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인연이 닿은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 책은 무닌드라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어서 진술한 것을 엮은 책이다. 선각자(先覺者)가 직접 쓴 책이 아니기에 생생한 깨달음의 느낌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깨달은 자가 직접 전하는 글이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무닌드라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말한 것을 저자가 다시 글로 엮은 것이니 아무래도 중간중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글이 다르게 받아들여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가치가 있는 책이기에 류시화 씨가 번역을 했겠지)

 

 

책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아침에 운동하기 위해 산호세의 스틸포인트 명상 센터 모퉁이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건너가곤 했다. 그곳에 부랑아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나의 즉각적인 판단은 이것이었다. ‘저 사내에게서 멀어지자.’ 당연히 무닌드라는 그 남자에게로 걸어가서 옆에 앉았으며, 그에게 붓다가 가르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닌드라는 그 남자에게 매우 다정했다. 나는 깊이 감동받았다. 이 이야기에는 무닌드라가 그 남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교훈이 없다. 그 남자는 자신의 삶에서 한 순간 작은 사랑을 경험했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나의 스승과 나 사이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그 날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스승을 배웅하러 버스 터미널에 가는 길이었는데 터미널 앞에서 한 할머니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쳤고 나 역시도 그냥 지나치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서 걸어가던 스승이 경쾌한 걸음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가 “아이고~ 이 추운데 왜 나와서 이러고 계시우~” 하면서 500원짜리 동전을 할머니 손에 떨어트렸다. 할머니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했고 스승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매표소로 걸어갔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내 스승은 다른 사람을 돕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와주는 것이 아닌 꼭 필요한 곳에,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만큼, 꼭 필요한 액수나 물품을 기부하는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주는 500원은 보기에 따라서는 큰 돈일 수도, ‘에게?’할 만큼 적은 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큰 돈이다. 나는 아예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었다. ‘내가 힘들게 번 돈을 이렇게 쓰긴 아깝다.’라는 생각이 있었고 ‘열심히 하는데도 안 되는 사람에게, 그런 타이밍에 줘야지.’라고 마음먹고 지갑을 여몄고 내 스승은 그냥 호주머니를 뒤져 500원을 줬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돕는 것인지를 배웠다. 그냥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 거였다. 저 사람이 어떻게 쓸 것인지, 이 돈이면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인지, 오늘 하루 지출이 얼마나 되는지, 이 일을 함으로써 내가 얼마나 복을 받게 될 것인지 지금 이 시간 이후의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순간 줄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상대가 고마워하든 말든 은혜를 갚으려고 들든 말든 그냥 나는 내 갈길 가면 되는 것이다.

 

스승이 가고 난 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저렇게 하면 되는 건데... 저렇게 그냥 살면 되는 건데... 나는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았을까... 나는 왜 그렇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고, 머릿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재고 살았을까... 무닌드라 역시 내가 느꼈던 감동, 깨달음, 배움들을 그와 인연이 닿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아니, 그를 만난 사람들이 스스로 일으켜서 받았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기로 스승은 ‘주는’ 사람이 아니다. 스승은 그냥 있는 그대로 살 뿐이고 그가 살아가는 모습, 그가 내뱉는 말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받아’가는 것이다. 똑같은 말을 해도 경험과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가져가는 게 다를 것이고, 똑같은 행위를 보고도 “500원?” 하며 픽 웃을 수도, 그 모습에 감동을 받고 깨닫는 바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스승’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자유롭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고 그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자유스러움을 발견하고 자유로 향하게 되는 것일 게다.

 

역자인 류시화 씨가 책 속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어느 곳에 물이 맑고 수련이 핀 연못이 있었다. 손이 더러운 여행자가 그곳을 지나갔다. 연못에 씻으면 손이 깨끗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씻으러 연못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손이 여전히 더러운 상태였다. 그는 연못을 지나쳐 여행을 계속했다. 이 비유를 말한 뒤 붓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만일 그 사람이 더러운 채로 있다면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연못인가, 여행자 자신인가?” 물론 비난받을 사람은 여행자 자신이다. 그는 연못에서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번뇌와 괴로움의 원인인 생각과 감정에 이끌리지 않는 방법이 있음에도, 그것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그 방법도, 그것을 가르친 스승도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이 글을 읽고 책만 사서 모으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좋은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매순간 가르침을 얻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들을 통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행위는 나를 파괴시키고 어떤 행위가 나를 살리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것, 알고 있는 것만 실천해도 나는 지금보다 100배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천하지 않고 오늘도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알지만...’을 운운하며 또 새로운 지식을 모으고(collecting) 있다. 그렇게 머리만 커져가고 가볍게 움직여야 할 손, 발은 더 무거워지고 있다. 부끄러웠다. 반성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한 것은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로 실제 살고 있지 않은 내 탓이지, 세상 탓도 부모 탓도 배운 게 적은 탓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