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며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책날개에 실린 ‘체 게바라’의 약력 가운데 일부이다. 사실 체 게바라라는 인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줄 안다. ‘평전’ 등의 출판물은 물론 다큐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 다양한 매체들에 의해 줄기차게 다뤄진 인물로서, 굳이 이르자면 ‘글로벌 아이콘’(썩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지만)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 일부러 관심을 끄고 사는 이라면 모르되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름만큼은 한번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다. 따라서 약력을 통해서든 다른 무엇을 통해서든 ‘체Che’의 생애를 구태여 다시 옮길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어찌 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체 게바라라는 이름의 인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더욱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예수, 석가모니, 공자, 무함마드(마호메트), 4대 성인(聖人)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제외하면 아니 포함한다 해도 체 게바라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손꼽으면 열 손가락은 간신히 채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저마다 꼽는 인물의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아마도 기준에 있어서는 공통적일 것 같은데 이를테면 다른 사람이 처한 곤경을 보아 넘기지 않고 그 속에 뛰어들어 개선코자 노력한 인물이라는 점이 바로 그 공통된 기준 아닐까 싶다. 문제는 이들 인물(앞서 언급한 예수 등은 논외로 하고)의 사후, 영웅으로 추앙하다 마침내 신격을 부여하며 신화화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다. 분명히 우리와 함께 살았던 사람에게서 인성을, 그의 모든 인간적인 면모를 제하여 버리고는 사람으로 와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떠나간 이를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기이한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부요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의사가 되기까지, 말 그대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던 아르헨티나 청년이 졸업 무렵 친구와 떠난 남미 여행(이때 씌어진 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여행 동기를 따지면 거의 확실시된 실연도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을 통해 비참한 현실, 세계의 모순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 모순을 척결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스스로를 혁명의 맹아로 변모시키고, 이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 1선에서 활약 마침내 쿠바 혁명을 성공시키고 카스트로 다음의 실권자로 부각되지만 이를 저버리고 다시금 볼리비아로 건너가 게릴라 활동을 펼치다 결국 볼리비아 정부군에 포로로 잡히고,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볼리비아 정부(와 그 뒤에 미국)에 의해 잡힌 지 단 하루 만에 총살당함.

확실히 체 게바라의 생애는, 궁 밖으로 빠져나와 거리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목격하고 구도(求道)의 길을 나서서는 마침내 스스로 해탈(解脫)에 이르러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닦아 일반에게 제시하였던 석가모니를 연상케 만든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자신만을 통하라 이르지 않은 것처럼(석가모니는 불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섬기라 이르지도 않았다. 다만 하나의 길을 보였을 뿐이다. 자신으로 하나의 길이 선명해진 것처럼 다른 길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꼭 자기 방식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각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석가모니는 믿었다고 봐야 한다. 단지 현실에 사로잡혀 끄달리는 욕망에만 따라가다 보면 도무지 그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없으므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을 체계의 첫 돌을 하나 마련한 것이라 보아야 하리라.) 내가 여기서, 체 게바라의 생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총을 든 성자(聖者) 체 게바라가 아닌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인간 체 게바라다.

신화 속 존재가 아닌 인간 체 게바라를 바로보기에는 이 책『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가 어쩌면 가장 적당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게릴라 활동을 하기도 전에 몬헤라는 자식을 만나 목숨 걸고 싸워 얻을 밥상에 팔자 좋게 숟가락만 얹으려는 얘길 듣기도 하고, 게릴라 조직이기에 운신이 더욱 치밀해야 하겠지만 오히려 군율을 업신여기듯 수시로 어기고 개인적 불만을 표출하는 등 소속원의 해이한 기강과 무책임(주변지역에 대한 면밀한 정찰 없이 은신처에서 대강 그려댄 지도로 대원을 잃고 속앓이를 하기도 하고, 행군을 앞두고 여친을 만나러 며칠씩 가있다 오는 대원,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상시를 위해 비축해둔 식량을 마음대로 손을 대는 대원, 의견 대립을 조화로 끌어내지 않고 충돌로 맞서는 대원들, 그리고 정부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이탈하는 대원 등등) 그리고 이 때문에 계속 벌어지는 어이없는 실수와 사건들에 난감해하기도 하고, 지원 세력이 되어 주리라 기대했던 농민 계층의 무관심과 심지어 반목 속에서도 볼리비아 혁명이라는 대의를 생각하며 이들을 통솔하려는 데 따르는 막중한 책임감을 감당해야 했던 체 게바라. 그런 중에도 볼리비아는 물론 인접국과 그 바깥을 아우른 국제정세까지 신경 쓰느라 한 순간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던 그. 몇 차례 미약한 볼리비아 정부군 세력과의 전투 속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잇따른 고된 행군에 체력 저하(자신을 비롯한 부대원들에게서 부종이 나타나고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는 등)와 식량 부족 그리고 접전 속에 동료를 잃는 등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점점 사기가 꺾여가는 대원들을 지켜보며 그 같은 상황을 타개할 계책을 고민해보지만 농민은 물론 외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선, 후발대로 분리 된 후 계속해서 연락조차 두절된 상태가 최후까지 이어진다). 이런저런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그의 고뇌가(비록 자신의 일기에서조차 직접 표출시키지는 않지만) 일기 속에 묘사된 전장의 상황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느 혁명가의 최후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새삼 우리 곁을 떠난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른다. 열 걸음을 혼자 걸을 수 있는 사람을 오히려 열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며 그를 붙잡아 내린 건 아닌지. 마음이 아프다.

 

 

15년째 살아오고 있다면 이 곳에 익숙해져 고향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정은 생겼어야 하건만 나는 서울이 싫다. 아니 사는 15년 내내 서울이 싫었던 건 아니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과 내 몸 하나 누일 원룸이 있고 가볍게 만나서 웃고 대화할 수 있던 사람들이 곁에 있던 그 시절엔 나도 서울을 좋아했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하나씩 잃어갈 때마다, 잃어간다고 느낄 때마다 서울은 더 이상 행복한 곳도 살고 싶은 곳도 아닌 그저 살아내야 하는  전쟁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계속해서 이 상태면 게다가 돌아갈 곳조차 없다면 아니 돌아갈 상황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 어쩌면 나도 <멋진 추락>의 승려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단 한 번의 추락을 시도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결과는 승려의 그것처럼 멋질 확률은 거의 제로겠지만... 그게 소설과 현실의 차이니까.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을 수는 있지만 삶에서 한 번도 펴보지 못한 날개가 인생의 마지막 극적인 순간에 펴지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 것. 이것이 현실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뻔히 보이는 결과를 알면서도 사람들을 추락이란 극한으로 내모는 건가. 그건 뿌리다. 삶을 지탱해줄 뿌리. 누군가는 그것을 돈이라 부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가족이라 부르고 혹은 사랑이라, 꿈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뿌리가 흔들리는 순간 사람들은 균형을 잃은 채 균열이 가기 시작한 삶을 조심조심 힘겹게 겨우겨우 버텨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는 운좋게 다시 새로운 뿌리를 내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할 대로 약해진 뿌리를 멍에로 생각한 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몇몇은 뿌리가 바싹 말라버린 것을 깨닫고 그 말라비틀어진 뿌리를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날릴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핏줄이라는 원초적 뿌리를 자의든 타의든 놓아버렸다는 것이다. 다양한 뿌리들 중에서도 삶에서 비교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뿌리를 잃었기에 그들은 태풍이 아닌 자잘한 바람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 뿌리를 놓아버린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인해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이주민들의 삶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늘 궁핍할 수밖에 없다. 하진은 이러한 중국 이민자들의 흔들리는 다양한 모습을 무겁지 않게 다소 희망적이기까지 한 어조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과거와 아무 상관없이 자유롭고 호탕하게 살고 싶어요.”

“과거가 없으면 어떻게 현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죠?”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거를 없애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어요. 과거를 버리는 거죠. 과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거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어쩌다 그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게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이에요. 유일한 방식이라고요. 당신이 과거와 관련된 모든 끈들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맞죠?”

- <계약 커플> 中

하진의 단편들을 읽다 보니 몇 달 전에 봤던 <방가방가>란 영화가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별 생각없이 보러 갔다가 울고 웃었던 기억이 있는 영화다. 타국에서 마음고생 몸고생 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모습도 안쓰러웠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은 주인공인 방태식이다. 오리지널 한국인이지만 볼 것 없는 이력 때문에 계속해서 취업에 실패하자 자신의 이국적인 외모를 이용해 부탄 사람이라 속이고 난 후에야 한 공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방태식. 나는 그가 외국인 근로자보다 더 안쓰럽고 불쌍했다.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후에야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그의 삶이 남일 같지 않다.

 

 

저희들끼리 쌓아올린 권위의 철옹성 안에서 취향이라는 이름의 편식, 지들 입맛에 걸맞게 지들 마음대로 팩트를 요리해버리는 게 메인-스트림의 일반성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터. 왜냐? 주류의 경향이 보통 이러하다는 건 후일의 역사가 보증! 가만 보면(아니 대강 훑어보아도 그렇지만) 역사, 인간의 역사란 참으로 재미난 컨텐츠가 아닐 수 없다. 구체제의 모순을 혁파!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하며 새롭게 권좌를 꿰차고 들어앉는 새로운 주류. 성공적인 안착 이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권세를 누리고 부리다 문득 정신 차려보면 어느덧 꼰대, 구체제가 되어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 마침내 이런 꼰대들의 꼬라지를 더는 못 보아주겠노라! 외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젊고 새로운 것들에게 험한 꼴 당하며 쫓겨나기까지;; 이처럼 권력의(아니 차라리 욕망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러한) 생애주기라는 형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 보고 있자면 역시 재미나다. 인간은 정말 학습, ‘학이시습’의 동물일까? 진지하게 의심도 하게 되고 말이지. 하여튼 의심과 반성의 기회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꼭 할애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그렇다고 역사만 들여다보는데 생의 전부를 할애하는 건 역시 좀 그렇다. 어줍지 않은 식자층만 양산하는 이따위 분업체제 난 반댈세!).

자 여기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이는 지금까지 형성된 가치관,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여겼던 그것을 의심하고 반성할 기회라는 말도 되겠다.『편집된 역사』가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계기. 그런데 무언가를 새롭게 알아간다는 건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내가 배워서 알게 된 과학이 절대적 진리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은 지금까지 그 과학을 바탕으로 구축한 일련의 지식체계를 뒤흔드는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 아 물론 잘못된 것, 낡은 것 허물고 다시 짓는 건 좋은 거고 또 그래야만 하겠지만 이게 말처럼 만만한 일이 아님은 현실의 건축물 같은 데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역사고 뭐고 다 마찬가지란 얘기. 이전 것을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걸 다시 지어 올리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새로 들여야만 한다. 그러니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아 그냥 이대로가 좋아, 몰라도 좋으니 나 좀 내버려둬’하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지사요, 인지상정 아니겠나; 하지만 주류의 무소불위는 또 이러한 무관심과 귀차니즘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보면 무언가 자꾸 고정된 실체로 머물려 하는 것들이 있으면 아니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은 일단 의심부터 앞세우는 데서 시작하고 볼 일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잠만 처자려는 의식의 엉덩일 자꾸만 아주 부지런히 걷어차며 깨워대야 하는 것.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다. 피곤해도 밥은 먹고 살 듯, 피곤해도 의심할 건 의심하고 살아야지; 사는 게 죄다 의심이다. 꼭 들어맞는 얘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심’이 ‘돈발’이다, 아무렴!

그런데 맛대로 멋대로 그야말로 지들 꼴리는 대로 재단하는 주류의 행태를 놓고 시비를 가리려는 의지는 충만함을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충만한 의지 못지않게 구체적인 실증이 근거로 뒷받침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점 아쉽다. 근거라 생각되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 그런지 힘주어 주장하는 목소리만큼 밝히려 노력한 만큼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바가 미약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주류 학계의 무관심을 대중의 관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다면 조금 더 자세히 밝혀주어도 좋지 않았을까, 읽고나서 든 생각이다. 주류든 비주류든 서로 논박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제시하는 논거를 무작정 터무니없는 걸로 치부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주류의 이야기도 그걸 반박하는 비주류에 대한 이야기도 선명하게 드러나질 않는다. 보다 확실하게 드러나는 건 주류의 입맛에 맞게 조리된 역사에 섞여들지 못하고 통편집 당한 데 따른 울분이랄까? 이것만큼은 페이지 곳곳에 표출되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학계의 왕따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쌓였을 울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편도 아직 고대라는 프레임에 분명한 형태의 그림을 복원한 것은 아니니 조금 더 형태를 잡아가는 쪽으로 엮었다면 보다 흥미롭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렇게만 꿰어놓으면 여기서 드러나는 흐름이란 결국 주류가 역사를 지들 마음대로 편집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 않나. 무리하게 하나로 꿰려 말고 하나의 주제에 천착, 조금 더 나아갔어도 좋았으리라. 물론 내용 중 언급된 적잖은 도서들과 그를 엮어낸 인명들의 존재가 그러한 주제에 천착하여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긴 하다만.